LOGIN손형원이 서늘하게 웃었다.“주용화가 무슨 강철 체력인 줄 알아? 형서야, 착각하지 마. 주용화도 우리랑 같은 사람이야. 신이 아니라고.”손형서는 입을 다물었다.주용화는 늘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떤 상황이든 결국 그의 선에서 정리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언제부턴가, 주용화를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다는 걸.실수하지 않는 사람, 틀리지 않는 사람, 반드시 이기는 쪽이 될 거라고.하지만 아니었다.‘그래... 용화 씨도 결국 언젠가는 지칠 수밖에 없는 사람이겠지.’손형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가주라는 자리가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주용화가 나랑 단보현을 그렇게 쉽게 끌어내릴 수 있었으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갈 이유가 있었겠어? 차라리 두 가문을 통째로 먹고 우리를 아랫사람 대하듯 원하는 대로 다루는 게 더 빠르지 않았겠어?”손형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단보현은 나보다 더 까다로운 놈이야. 상황 판단 빠르고, 계산 철저하고... 필요하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놈이지. 조금만 틈을 보이면 바로 역으로 물 수도 있는 상대란 말이야.”손형원의 눈빛에 조롱이 어렸다.“연상진이 지분 뺏긴 일도 봤잖아. 주용화가 처리한 방식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지만, 한 수만 틀려도 바로 끝장날 수도 있는 판이었어. 그런 상대들을 두고 바깥 상황까지 동시에 챙기면서 우리 같은 가주들까지 상대하라고?”그는 짧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럴 바엔 차라리 연태훈이랑 연재영부터 정리해 버리고 대신 하지율을 올려놓는 게 더 수월하지 않겠어?”손형서는 말문이 막혔다.주씨 가문이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재력을 쥐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인맥마저 탄탄한 것은 아니었다.많은 걸 돈으로 해결할 수는 있어도, 한번 굳어진 관계는 쉽게 흔들 수 없었다.만약 주용화에게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애쓸 이유도 없었을 터였다.손형원의 말을 듣고 나자, 이상하게도 손형서는 주용화가 더
손형서는 한때 연정미와 속내까지 털어놓던 사이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가장 중요한 비밀까지 공유했던 적도 있었다.그런데 그 인연이 이제는 그녀와 주용화를 향한 칼이 되어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손형서는 이를 악물었다.당장이라도 연정미를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오빠, 이제 어떡해? 연정미... 임채아를 이용해서 용화 씨와 맞서려는 거 아닐까?”손형원은 비웃듯 웃었다.“고작 임채아로? 임채아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연정미가 주용화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지금 같은 상황에 몰리지도 않았겠지.”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주용화가 정말 임채아를 신경 썼다면 지금까지 살려두지도 않았을 거야. 어쩌면 애초에 임채아를 위협으로 생각해 본 적조차 없을지도...”손형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영리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둔하지도 않았다.그리고 잠시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임채아를 이용해서 직접적으로 용화 씨를 위협할 수 없다고 쳐... 그렇지만 용화 씨랑 하지율 사이를 이간질할 수는 있는 거잖아? 어떻게 생각해?”“맞아. 그게 바로 임채아를 납치한 가장 큰 목적이겠지.”손형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손형서는 짜증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하지율도, 연정미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율이 불행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언짢은 마음에 어느 정도는 위안이 됐다.손형서가 냉소적으로 말했다.“용화 씨 도움이 없었으면 하지율은 진작 연씨 가문 사람들한테 뜯겨 먹혔을 거야. 그 도움만 끊기면... 하지율은 아무것도 아니야.”이번에는 손형원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형서는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손형원을 바라봤다.손형원은 뭔가를 곱씹는 듯, 깊이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오빠, 또 뭐 생각난 거 있어?”손형원이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너도 임채아가 두 사람 사이를 흔들 수 있다고 봤잖아. 그걸 주용화가 몰랐을 리 있겠어?”손형
어차피 모두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공동체이자, 한 가족이었다.단보현이 확신에 찬 태도를 보이자 경직됐던 표정들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그래, 그렇게까지 자신 있다니 한 번 믿어보자.”“반년, 아니, 어쩌면 1년 정도 버티는 건 문제없을 거야. 그래도 너무 오래 끌면 안 된다. 회복할 기회 자체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단보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걱정하지 마.”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3개월 안에 반드시 결과를 보여줄게.”...이번 휴가는 하지율에게 있어 완전히 쉬어가는 시간이었다. 일 생각은 거의 하지 않은 채 마음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은 상태였다.그래서 단아 그룹에 문제가 생긴 것도 복귀해서야 알게 됐다.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뉴스를 바라보며 하지율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제이원 그룹이... 단아 그룹을 노리고 있다고? 단아 그룹을 건드릴 수 있는 수준이라면... 주씨 가문 밖에 없을 텐데. 왜 하필 단아 그룹이지?’그 순간,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내 함우민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화야 씨가 단순한 경호원이 아니라 주씨 가문 가주라고 했었지...’하지만 예전의 일 때문에, 하지율은 함우민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주용화가 주씨 가문 가주라는 이야기 역시 그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의도로 꾸며낸 거짓말처럼 느껴졌다.물론 주씨 가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일 처리 방식이 얼마나 잔혹한지 등,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다.연씨 가문에 있을 때도 연태훈과 연재영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걸 종종 들은 적이 있었다.그럼에도 하지율은 무의식적으로 주용화를 그들이 언급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하지율은 별생각 없이 말했다.“들어오세요.”비서가 업무 보고를 하러 온 줄 알았다.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예상과 달리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상함을 느낀 하지율이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사
단보현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정미랑은 상관없어. 내가 주씨 가문 가주를 건드린 건 사실 또 다른 사람 때문이야.”사람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서로를 쳐다봤다.“그게 누군데?”단보현은 또박또박 세 글자를 내뱉었다.“하지율.”하지율이라는 이름은 단씨 가문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았다. 단종건이 유독 아꼈던 것도 모자라 직접 나서서 뒤를 봐주기까지 했었으니까.친손주보다 더 챙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지율이 도움을 청했을 때, 단종건은 단씨 가문의 핵심 자원을 통째로 내어주기까지 했었다.그 일로 단씨 가문 내에서 원성이 자자했다.“주씨 가문 가주랑 하지율이 무슨 사이라도 된다는 거야? 둘이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단보현이 피식 웃었다.“엮일 일 없다고 누가 그래?”그는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내가 알아본 바로는... 하지율, 그 애가 바로 주씨 가문 가주의 첫사랑이었어. 주씨 가문 사람들, 감정 조절이 잘 안 돼서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집착하는 타입인 건 다들 알고 있잖아. 하지율이 우리를 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주씨 가문을 움직이는 건 시간문제겠지.”단보현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그래도 이상하잖아. 하지율은 아버지랑 그렇게 가까운데, 왜 우리 단씨 가문을 건드리려 하겠어?”단보현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욕심이 끝이 없는 거지. 단씨 가문 권력을 이미 맛본 사람이야. 그러니 그게 얼마나 큰 힘인지,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겠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서 지금은 실권까지 잡았잖아. 그 정도면 충분히 계산 빠른 사람이란 얘기야. 거기에 주씨 가문 가주를 등에 업었다면... 이용 안 할 이유가 있겠어?”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사람들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설마 우리 단씨 가문까지 삼키겠다는 거야?”“야망이 너무 크잖아, 표독스러운 년!”“아버지가 그렇게까지 챙겨줬는데도, 은혜를
단보현의 사촌누나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둘째 언니 말이 맞아. 주씨 가문은 원래 이 바닥에서 큰 소란을 안 만드는 편이잖아. 다른 가문의 싸움에 끼어든 적도 없고. 우리랑도 별다른 접점이 없는데, 이유 없이 단아 그룹을 건드린다는 건 말도 안 되지.”사람들은 한참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일단 일부 자금을 추가로 투입해 주가 하락을 방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주씨 가문과 정면으로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주씨 가문이랑 정면으로 붙는다고? 그건 그냥 자살행위지.’차라리 손실을 감수할지언정, 감정싸움 때문에 자금을 날릴 생각은 없었다.그때, 단보현의 조카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차라리 대표를 한 명 보내서 주씨 가문과 얘기해 보는 건 어떨까요? 원하는 게 있는지, 그쪽에서 제안하는 조건을 들어보자고요. 이대로 가면 서로 손해만 커질 텐데요.”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협상을 제안하는 게 체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감정적으로 움직일 나이는 지나 있었다.‘돈을 걸고 감정싸움을 하겠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그때였다. 누군가 말없이 앉아 있는 단보현을 저격했다.“보현아,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설마... 주씨 가문한테 밉보인 사람이 너야?”단보현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가에는 확연히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그는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내가 주씨 가문 가주를 건드렸어.”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단보현의 둘째 형이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단보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거칠게 쏘아붙였다.“단보현, 하필 건드려도 주씨 가문이냐? 주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몰라? 전부 집착 심한 미친놈들이야. 너 원래 이렇게 경솔한 애 아니잖아. 어쩌다 이런 무모한 짓을 했어!”옆에 있던 단씨 가문 셋째가 뭔가를 떠올린 듯 얼굴이 굳었다.“보현아... 설마 또 연정미 때문이야? 지난번 손형원 일도 이상했
하지만 하지율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하지율은 담담하게 말했다.“할 말 다 했어요?”함우민은 멍하니 하지율을 바라봤다.“지율 씨, 지금 제가 한 말은... 하나도 안 믿는 거예요?”하지율의 눈에는 아주 작은 파문조차 일지 않았다.“우민 씨, 이제 그만 가세요. 오늘 있었던 일은 화야 씨한테 말하지 않을게요.”하지율은 천천히 함우민의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민설아 씨랑 정기석 씨 일도 사실이 아니라면 더는 민설아 씨가 정기석 씨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함우민의 얼굴은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아주 분명한 건, 하지율은 끝내 함우민의 말을 믿지 않았다.함우민은 이미 하지율의 신뢰를 저버렸다.그러니 이제 하지율이 다시 함우민 말을 믿어 줄 리 없었다.하지율은 더는 함우민의 반응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마침 주용화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하지율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용화의 얼굴도 조금 누그러졌다.주용화가 물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그러자 하지율이 대답했다.“민설아 씨를 만나서 몇 마디 이야기 좀 했어요.”주용화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지율 씨가 설아 씨랑 무슨 이야기를 나눌 게 있어요?”그러자 하지율이 말했다.“설아 씨랑 기석 씨의 일이 사실이 아니라면 굳이 설아 씨가 기석 씨를 계속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끝까지 가 봐야 서로 좋게 끝날 일도 아니고 설아 씨한테도 성휘 삼촌한테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니죠.”그 말을 듣고도 주용화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사실 이 일은 L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미 정기석에게 다 들어 둔 상태였다.주용화가 물었다.“지율 씨, 이제 어디로 더 가고 싶어요?”하지율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우리는 거의 한 달이나 쉬었잖아요. 이제는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기회 생기면 그때 다시 놀러 와요.”정기석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라
“고씨 집안 그 자식이 겉은 반반해도 여자 마음 저버리고 바람이나 피우는 물건이었어. 허, 단씨 가문이 지켜주는 한 아무도 그 아이를 괴롭힐 수 없다는 걸 제대로 보여주지.”...하지율은 약을 받은 즉시 고지후를 찾아갔다.“약 이미 줬으니까 소린이 풀어줄 수 있지?”고지후는 손에 든 하찮은 약병을 살펴보며 의심스러워했다.“이 약이 진짜인 건 확실해?”하지율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녀가 무엇을 하든 남자는 그녀에 대해 항상 무조건적인 의심을 품고 있었다.반면 임채아가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도 그는 무조건 신뢰했
고윤택은 임채아 옆에 꼭 붙어 서 있었다.고지후는 몰래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내와 아들 사이가 갑자기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율은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내라고 했지만 고윤택은 오직 한 사람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도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분명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윤택아.”고지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네가 그때 의식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네 엄마와 그 친구가 너를 구한 건 사실이란다.”고윤택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의식적으로 외쳤다.“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들이 저를
하지율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정시온이 말을 이었다.“아까보니까 지후 아저씨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들이 저희 테이블이랑 똑같더라고요. 지율 이모가 윤택이 형 견과류 알레르기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견과류 케익 시켰잖아요.”“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요?”아이의 말을 들은 하지율이 임채아를 차갑게 쳐다보자 임채아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죄송해요. 케익 안에 견과류가 들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하지율, 너 왜 자꾸 채아한테만 뭐라고 해?”“채아가 케익 안에 견과류가 들었을지 어떻게 알겠어?”
얼굴에 홍진이 가득 올라와 있었고 볼 전체도 빨개져 있었는데 가쁜 호흡으로 인해 몸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아이의 모습에 고지후는 다급히 고윤택의 이름을 불러보았다.하지만 아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고윤택은 멍하니 서 있는 임채아를 향해 소리쳤다.“얼른 구급차부터 불러!”임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창백해진 얼굴로 구급차를 불렀다.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고지후에 식당에 있던 다른 손님들도 깜짝 놀라며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알레르기인 것 같은데 지금 빨리 뭐라도 해야 해요. 늦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