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6.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4 19:56:43

느릿하게 흐르던 재즈 선율 사이로 휴대전화가 다급하게 몸을 떨었다.

지이잉, 지이잉.

느긋한 음악의 박자를 무시하듯 제멋대로 빠르게 울려댔다.

[윤오]

참 대단한 백마 탄 왕자님의 등장이었다.

“…….”

선우가 에단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건넸다.

에단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ㅡ “어디야.”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목소리.

스물일곱 해를 들어온, 지나치게 익숙한 음성이었다.

“……밖.”

ㅡ “밖 어디.”

“왜.”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ㅡ “차. 점심에 병원에 두고 갔잖아.”

짧은 말 사이로 숨길 수 없는 답답함이 묻어났다.

ㅡ “지금 어디야.”

다짜고짜 왜 승질이야, 권윤오.

선우가 무심코 에단을 힐끗 바라봤다.

“……압구정.”

ㅡ “압구정? 누아르 오크?”

척하면 척이었다.

“응.”

ㅡ “거기 있어.”

뚝.

대답을 기다릴 생각조차 없다는 듯 전화가 끊겼다.

“……진짜.”

선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작게 혀를 찼다.

우리 아빠도 이 정도는 아닌데.

“바쁘신가 봅니다.”

에단이 잔 속 얼음을 천천히 굴리며 말했다.

“……그냥, 차 때문에요.”

“그럼 가보셔야겠네요.”

에단은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

“야.”

공기를 가르며 날아든 익숙한 목소리에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아래.

익숙한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권윤오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기다리던 윤오는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턱을 들었다.

“빨리 와.”

왜 명령이야.

선우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왜.”

“차 타.”

“나 걸어갈 건데.”

또 시작이었다.

윤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

한 걸음 내디뎠다.

“말 길게 하게 하지 말고.”

참 나.

선우의 가슴 밑바닥에서 묵직한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아니.

짜증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축축한 감정이었다.

권윤오의 저 말투. 저 태도. 저 확신.

나를 다 안다는 듯한 그 눈빛이, 결국 나를 한 발짝도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버릴 것 같아서.

그게 싫었다.

아니.

싫어해야만 했다.

저 익숙함이 너무 익숙해서.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움직이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답을 정해버리는 당연함에서 간절히 도망치고 싶었다.

“넌 맨날 이런 식이야.”

“뭐?”

“물어보는 척하고, 이미 다 정해놓고.”

권윤오의 눈이 가라 앉았다. 그래봤자 평소와 같은 무심한 눈인데, 당연한 것처럼 알아차리는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거리가 그만큼 줄었다.

“잘못됐어?”

잘못됐냐고.

“…….”

선우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권윤오는 늘 옳았다.

늘 적절했고.

늘 선우 자신을 위했다.

그 사실이 선우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빨리 타.”

“싫다구.”

이번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대답이었다.

“김선우.”

경고였다.

“…….”

선우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냥.

그냥 오기라도 한바탕 부려보고 싶었다.

“누구야?”

그런데 별안간 윤오의 시선이 선우의 뒤편으로 향했다.

바의 출입구.

윤오가 턱을 살짝 까딱였다.

“지금 나오는 데서.”

“…….”

“누구랑 있었냐고.”

“…….”

“또냐.”

그 한마디에 선우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또 남자랑 있었냐는 뜻이지.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한 박자도 쉬지 않고 돌아오는 대답이었다.

”…….“

선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윤오 역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무결한 눈을 마주하고 있자 속이 자꾸만 뒤틀렸다.

결국.

내뱉지 말아야 할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상관없잖아.”

순간, 주변의 소리가 뚝 끊긴 것 같았다.

“…….”

“…….”

선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아.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상관없어?”

윤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놀라울 만큼 잔잔했다.

“……어.”

선우가 턱 끝에 힘을 주었다.

“상관없어.”

기어코 비뚤어진 진심을 뱉어냈다.

그리고 정면으로 윤오의 눈을 마주했다.

“…….”

네가 내 연애를 걱정하든.

내 오답을 비웃든.

그 모든 게 ‘친구’라는 선 안에서만 허용되는 오지랖이라면.

이제는 질색이었다.

“…….”

“…….”

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오는 선우를 오래 바라봤다. 표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한마디가 이상할 만큼 담담했다.

윤오가 미련 하나 없는 몸짓으로 몸을 돌렸다. 곧 시동이 켜지고 엔진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차가 움직였다.

붉은 후미등이 멀어졌다.

“…….”

진짜로 가버렸다, 권윤오.

***

낮게 가라앉은 밤공기 위로 붉은 불씨 하나가 일렁였다.

“…….”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끝이 천천히 타들어 갔다.

가느다란 연기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남자는 골목 모퉁이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조금 전부터 그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편의 비극적인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ㅡ “누구랑 있었냐고, 안에.”

ㅡ “상관없잖아.”

멀리서 날아온 선우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남자의 입술 끝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ㅡ “상관없어?”

ㅡ “……어. 상관없어.”

붉게 타오르던 불씨가 천천히 짧아졌다.

한 모금.

깊게 연기를 들이마신 뒤, 길게 내뱉었다.

곧이어.

끼이익—!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밤거리를 찢었다.

뒤따른 엔진음이 거칠게 울렸다. 붉은 후미등이 골목 끝에서 한 번 번뜩였다.

그리고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남자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툭.

구두 끝이 천천히 담배를 짓이겼다.

불씨가 꺼졌다.

“…….”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고요한 골목에 구두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또각.

또각.

또각.

그의 시선 끝에는, 홀로 남겨진 여자 하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얼굴은 어느새 힘을 잃고 있었다.

이제는 닻을 잃고 난파선처럼 흔들리는 선우를 건져 올릴 시간이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부정맥 메이커   104.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 부정맥 메이커   102.

    고요하던 정원에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에단이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Ethan Lowell speaking.”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영어가 쏟아졌다.“Slow down. Start from the beginning.”(천천히 말하세요. 처음부터.)조금 전까지 선우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빠르게 걷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다만 손에 들린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에단의 얼굴만으로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짧게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Don’t send anything else. Preserve every original file. I’ll review it myself.”(추가로 아무것도 보내지 마세요. 원본 파일은 전부 보존하고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 에단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무슨 일이에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일정이 바뀌었습니다.”“네?”“오늘 오전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세요. 항공편은 변경해 뒀습니다.”***공항 전용기 터미널 앞에 차가 멈췄다.“큰일은 아니죠?”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하이 지사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 전화를 끊은 뒤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지던 지시들.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정을 정리했지만, 그럴수록 선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전화하셨을 때 표정이…….”“선우 씨.”에단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걱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독이려는 듯, 그녀의 뺨

  • 부정맥 메이커   101.

    “여기 있었군요.”에단이었다.선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화면을 끄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휴대폰에 잠깐 머물렀다.“연락이 왔습니까?”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오한테서요.”에단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냥 안부요.”작게 끄덕인 에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에단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나와 조금 더 걸을까요?”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왔다.“오늘 밤은 제가 독점해도 되겠습니까?”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본부장님.”“네.”“질문이 많으세요.”에단이 낮게 웃었다.테라스 끝에는 작은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연회장의 음악은 유리문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낮에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짙은 녹음을 머금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받아냈다.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돌담 아래 소담하게 피어 있었고, 젖은 풀과 꽃잎에서 우러난 싱그러운 향이 밤공기 속에 번졌다.정원 너머로는 코모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산자락을 따라 늘어선 마을의 불빛이 수면 위에 길게 번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조용히 흩어질 때마다 불빛도 함께 잘게

  • 부정맥 메이커   100.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 부정맥 메이커   99.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

  • 부정맥 메이커   98.

    무라노의 아침은 수로를 가르는 바포레토의 엔진음으로 시작됐다.물살을 밀어내는 둔중한 소리가 오래된 건물 사이를 돌아 들어왔다. 창틀에 걸린 햇빛은 밤새 식지 못한 방 안의 공기를 무심하게 밀어냈다. 여섯 월의 햇살은 유난히 투명했다. 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과 입맞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침대 위로 떨어진 빛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선우는 홑이불을 걷어 내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이 떠올랐다.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에단의 목소리. 입술이 닿기 직전, 마지막까지 대답을 기다리던 눈빛. 그리고 그가 자신을 안아 주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의 품을 찾아 들어갔던 자신의 몸.무엇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로를 끌어 안았던 순간이 자꾸만 생각났다.에단.입안에서 소리 없이 이름을 굴려 본 선우는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올렸다.미쳤나 봐.어제까지는 본부장님이었는데.물론 지금도 회사에서는 본부장님이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어젯밤 이후로 그 호칭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그렇다고 아침부터 달라진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할수록 사소한 것까지 의식하게 될 게 뻔했다.선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다행히 멀쩡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일어났습니까?”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걸음이 멎었다.에단은 테라스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수트에 단정한 셔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넥타이.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 잔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