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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5 06:35:57

“로얄 살루트 어때요?”

선우가 자리로 돌아오자 수정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부터 훑었다. 헝클어진 감정은 감추려 할수록 티가 나는 법이었다.

잠시 선우를 바라보던 수정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진열장에서 짙은 코발트블루 도자기 병을 집어 들었다.

Royal Salute 38 Year Old Stone of Destiny.

영국 왕실 대관식에서 왕이 앉는 '운명의 돌'을 기리며 탄생한 블렌디드 스카치.

“…….”

선우는 잔을 바라봤다. 호박빛 액체가 유리 벽을 타고 천천히 번져 나갔다.

천천히 잔을 들어 코끝에 가져가자 3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크통의 숨결을 들이마신 액체의 묵직한 향이 피어 올랐다.

선우는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럽게 혀끝을 감싼 액체가 천천히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시 좋은 술은 사람의 기분을 달래는 재주가 있었다. 가득 엉켜 있던 머릿속이, 오래 숙성된 술 한 모금에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같은 걸로 주시죠.”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에단이 바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간 줄 알았는데.

에단은 잔을 들어 조명을 향해 기울였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자 잘 재단된 슈트가 미세한 마찰음을 냈다.

호박빛 액체가 유리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 빛이 감청색 눈동자에 스며들자 차갑던 눈빛에 순간 금빛 온기가 번졌다.

“이 정도 숙성의 블렌디드는…….”

그가 나직이 입을 뗐다.

“시간이 맛을 정리했다기보다는, 층을 쌓아 올린 쪽에 가깝습니다.”

낮고 일정한 목소리.

조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

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입술의 선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서, 선우는 저도 모르게 또 그의 입술에 시선을 뺏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달게 시작합니다. 꿀보다는 진하고, 캐러멜보다는 덜 무거운. 마치 오래 된 과일을 농축한 듯한 단향이죠.”

에단이 코끝에 잔을 가져다 댄 뒤 액체를 머금고 삼켰다. 목울대가 부드럽게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뒤에 오는 건 오크향입니다. 마른 나무 향이 아니라, 시간에 눌려 부드러워진 나무.”

“……약간의 폴리시드 가죽같은 결도 있구요.”

“맞습니다. 입에 넣으면, 의외의 저항이 없습니다.”

선우도 조심스럽게 말을 덧 붙였다. 그리고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액체가 입안을 유영하며 향이 천천히 퍼졌다.

“이 술의 본질은 여기입니다.”

잠시 멈춘 그의 시선이 선우에게 머물렀다. 그 시선에 갇히는 순간, 선우는 수만 개의 층이 쌓인 오크 통 속에 홀로 남겨진 듯한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에도.”

에단이 손가락 끝으로 잔을 가볍게 건드렸다. 팅. 맑은 유리음이 잔향처럼 번졌다.

“계속 남아 있죠.”

사라졌다고 착각하는 순간에도 조용히 감각을 붙드는 잔향. 선우는 그 순간 한 얼굴을 떠올렸다.

닮았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까지.

“저는……. 남지않고 끝나는 게 편하거든요.”

​선우가 입을 뗐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한 모금을 삼켰다. 목을 타고 흐르는 알싸한 열기가 제 동요를 감춰주길 바라면서.

“그럴수도 있죠.”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는 잔을 기울여 유리벽을 타고 느리게 흘러내리는 술의 자취를 바라봤다.

​“깔끔한 마무리를 선호한다는 건, 역설적으로 무언가 오래 남겨본 적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 잔향이 얼마나 지독하고 번거로운지 이미 알고 있다는 소리죠.”

선우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건 아닌데요.”

애써 웃었다.

“전 그냥 귀찮은 거예요.”

“…….”

“남는 것도.”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정리 안 되는 것도.”

에단의 날카로운 통찰을 '단순한 취향'으로 격하시키려는 선우만의 방어 기제였다.

​“귀찮아서 정리하지 않는 것과 정리가 안 돼서 미루는 건 차이가 꽤 큽니다, 김선우 씨.”

그러나 돌아오는 건 반격.

​숨기고 싶었던 속내를 정교하게 발라낸 불쾌함, 그리고 그 불쾌함을 덮는 기묘한 감각이 선우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남자는 너무 쉽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에단은 잔을 들어 마지막 한 모금을 천천히 음미했다.

“위스키를 만들 때.”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The Cut이라는 과정이 있죠.”

정교한 영국식 발음이 짧게 흘러내렸다.

​“증류된 액체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원액만을 얻기 위해 앞뒤의 불순물을 과감하게 잘라내는 작업이죠.”

“…….”

“가장 좋은 원액을 얻기 위해서ㅡ.”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선우를 바라봤다.

“초류도 버리고, 후류도 버립니다.”

“…….”

“질척하게 남은 미련이나, 이미 상해버린 과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위스키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끝내 잘라내지 못한 자신의 후류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망설이면 원액까지 오염됩니다.”

“…….”

“김선우씨라고, 다르진 않을텐데요.”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비켜갈 틈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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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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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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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11.

    엘리베이터 앞은 퇴근 인파가 전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루를 끝낸 사람들 특유의 피곤함과 들뜸이 뒤섞인 공기 그 속에서 선우는 틈 가장자리에 몸을 붙였다.그때였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젯밤 바에서도. 오늘 회의실에서도.안 봐도 알았다.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시선이 따가워 선우는 자석에 이끌리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괜히 확인했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좁은 공간 안으로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제 직감이 맞다면 에단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반들반들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그 위로 보이는 검은 구두 한 켤레.잘 재단된 슬랙스 끝단.맞네.“…….”​선우는 솔직히 새로 온 본부장이 좀 불편했다. 침마냥 가늘고 날카롭게 사람 속을 콕콕 찔렀다. 게다가 눈빛 하나로 생각을 읽는 것도 같았다(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그래서 마주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더 숙였다. 15F.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갔다.10F.7F.4F.층수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띵.1F.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선우도 작게 숨을 내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유쾌, 상쾌, 통쾌!선우는 기분 좋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권윤오한테 연락해야지. 그 순간.​“오늘 수고하셨습니다.”으악. 선우가 흠칫 놀라 뒤돌아봤다.에단이었다.​“본부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형식적인 인사 딱 그 정도였다. 에단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때.선우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오렌지빛 가로등 아래, 풍경처럼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권​윤오였다.눈은 정확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어 있던 선우의 입가가 헤벌쭉해졌다.“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선우의 말 끝이 경쾌하게 튀어 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윤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거의 뛰듯이 달려갔다. 윤오가 헛웃음을 흘렸다.“초딩이냐. 뛰지마.”짐짓 엄한 척

  • 부정맥 메이커   10.

    ​“그것뿐만이 아냐. 어제 점심에도 난리였다니까.” “아, 그건 나도 들었어. 남자 둘 사이에 끼어 있었다며?” “낮에는 사랑싸움하고, 저녁에는 새로 온 본부장님한테 붙어 있고. 능력도 좋아.” 어디 쥐구멍이 없을까. 선우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대로 코너를 돌아 그들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 목표였다. “후우.” 코너를 돌자 ​그제서야 메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본의 아니게 전시되어버린 제 사생활이, 타인의 입안에서 질겅질겅 씹히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여러모로 아주 엿 같은 하루였다. 머릿속에서 어제 수정이 던졌던 경고가 뒤늦게 스쳐 지나갔다. ‘이 바 오는 사람들 절반은 언니 업계 사람들이라니까.’ ​정말 그랬다. 술에 취했었는지, 분위기에 절여졌었는지. 어제의 자신은 이상하리만치 조심성이 없었다. 점심의 소란과 저녁의 동행이 겹쳐지니, 자신의 처지가 낱낱이 해부되는 기분이었다. 흑역사를 스스로 채굴한 기분이라 선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일만 하자. 진짜, 일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쏟아져 나온 인파 사이로 선우가 밀려 들어갔다. 가볍게 치이는 흐름 속에서 형식적인 인사들이 오갔다. 1층 로비로 내려온 선우는 카페 구석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맛은 단 십 원어치도 없었다. 하지만 버티려면 뭐라도 씹어 삼켜야 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공간에는 서늘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선우는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 봉투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속은 모래를 씹은 듯 까칠했다. 손은 샌드위치를 쥐고 있었지만, 포장지를 뜯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 ​아무도 없는 공간이라, 참았던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땅이 꺼져라 내뱉는 숨결마다 명치의 통증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사랑싸움이니 뭐니 그런 가십 따위는 저에게 큰일은 아니었다. 익숙해지면 그만인 소음일 뿐이었다. 그런데. “…….”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책상 위 핸드폰으로 옮겨갔다.

  • 부정맥 메이커   9.

    오전부터 신제품 런칭 회의가 있었다. 선우는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회의 자료를 띄우고, 메모장을 여는 손끝은 평소처럼 정확했다.몸은 출근해 있었다. 그런데 정신은 아니었다. 의식은 자꾸만 제멋대로 탈선을 반복했다.'상관없어?''어. 상관없어.'우리는 대체 어제 왜 그렇게도 날을 세웠나.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의 집 앞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차.선우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일하자, 일.잡념을 털어내려 고개를 저을 때쯤 문이 열렸다.“다들 모이셨네요.”아르벨라 코리아의 새로운 본부장, 에단 로웰. 어젯밤 바에서 마주한 남자와 지금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단정했고, 정확했고, 빈틈이 없었다.회의실에 들어선 순간, 그의 목소리에서는 사적인 감정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단순한 신제품 출시가 아닙니다.”​회의가 시작되고, 프로젝트 제목이 화면을 메웠다.ㅡ아시아 지역 타겟 싱글몰트 위스키 런칭ㅡ“아시아 프리미엄 싱글몰트 시장의 기준을 우리가 새로 쓰는겁니다.”웅성거리던 회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단순히 가격이나 패키지를 만지는 수준으로는 부족합니다. 껍데기는 본질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에단의 말은 면도날처럼 짧고 명확했다. 팀원들이 아시아 시장의 두터운 블렌디드 소비층과 싱글몰트의 한계를 언급하며 난색을 표하자, 에단이 그 흐름을 날카롭게 끊어냈다.“우리가 파는 건 단순한 액체가 아닙니다. 왜 이걸 마셔야 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야 합니다.”​그의 시선이 자석처럼 선우를 향해 미끄러졌다.​“김과장님 의견은요?”​“타겟을 좁혀야 합니다. 대중적인 입문층이 아니라, 이미 자신만의 취향이 확고해질 대로 확고해진 사람들로요.”​선우는 피하지 않았다. 윤오와의 일로 엉망이 된 속과는 별개로, 일에서만큼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에 에단의 눈매가 아주 미묘하게 가늘어졌다.​“구체적으로요.”“향의 선을 더 선명하게 그어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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