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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4 19:55:13

“여보세요?”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ㅡ “김선우 씨.”

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제 예상을 완벽히 빗나간 탓이었다. 분명 오늘 처음 들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은 음절의 무게.

ㅡ “에단 로웰입니다.”

아, 이 기시감의 원인은 역시나였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ㅡ “뒤 돌아보시겠어요.”

선우가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 곳에,

그가 서 있었다.

“…….”

낮은 조도가 일렁이는 바 한가운데, 낮의 정갈한 수트 차림과는 전혀 공기를 두른 남자.

그는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하게 맞물린 순간, 바 안의 소음들이 먼 곳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른하게 흐르던 음악도 베일 너머로 사라지고 오직 그가 몰고 온 긴장감만이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머물던 공간의 밀도가 순식간에 진득하게 바뀌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느낄 뿐이었다.

찰나의 짧은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길게 늘어졌다.

본부장이, 여길 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벙찐 선우의 앞으로 에단이 터벅, 터벅 걸어왔다. 느릿한 발걸음인데도 이상하게 주변의 공기까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발걸음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놀란 건 비단 선우뿐만이 아니었다.

수정 역시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광경을 관조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을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머릿속 계산기가 멈춘 듯했다.

“놀라셨죠.”

“……여기까지 어떻게.”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거래처 리스트 보다가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신 거예요? 시장조사?”

“겸사겸사요.”

겸사겸사.

그 말은 애매했다.

철저히 계산된 비즈니스 같기도, 혹은 사적인 유혹 같기도 한 모호한 경계. 상대를 끌어당기기 위해 던져진 낚싯바늘에 더 가까웠다.

수정은 선우와 에단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무언가를 알아챈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이거.

재밌는 그림인데.

반면 선우는 곤란했다. 눈빛 하나, 표정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하필이면 저의 앞에, 그것도 회사에서는 거리가 꽤 있는 단골 바에서 재회라니.

오늘 술 맛 다 배렸네.

“암룻이네요?”

선우의 속을 알 리 없는 그가 잔 속의 호박빛 원액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마치 그 안에 정답이라도 적혀 있다는 듯 말했다.

“암룻이 취향이라면, 선호하는 위스키는 대체로 비슷하거든요.”

속단도 빠르시네.

선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잔을 천천히 굴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취향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에단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흔들림 없는 감청색 눈동자가 사람 속을 훑듯 머물렀다.

“제가 틀렸습니까.”

“……글쎄요.”

방어적인 대답이 툭툭 나갔지만, 그녀가 방어벽을 세울수록 에단의 눈빛은 오히려 흥미로운 불꽃이 튀듯 반짝였다.

“그럼 확인해보죠.”

그가 바(Bar) 안쪽을 향해 짧게 시선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에단은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선우의 옆자리를 점령했다.

​“오늘, 괜찮네요.”

“……뭐가요?”

선우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제는 이 남자의 입이 꼭 시한폭탄같았다. 도통 무슨 말이 터져나올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이 자리요.”

정확히 이런 경우 말이다.

그의 한마디가 잔잔한 수면 위에 돌을 던진 것마냥 고요한 내면을 어지럽혔다. 밀려오는 묘한 열기를 털어내려 선우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본부장님은 어떤 위스키를 제일 좋아하시는데요?”

“그때 그때 다릅니다.”

선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자, 에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잔의 호박빛 액체처럼 천천히 번졌다.

“그리고…….”

에단이 선우 쪽으로 몸을 아주 약간 기울였다. 은밀한 비밀이라도 공유하려는 듯 지나치게 사적인 거리였다.

“같이 마시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네?”

다짜고짜 무슨?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만 개쯤 떠올라 과부하가 걸리려던 찰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몸을 바로세웠다.

“저는 히비키(Hibiki)로 부탁드립니다.”

곧이어 암룻보다 맑은 색의 액체가 잔을 채웠다. 잔을 든 남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향을 깊게 음미하고 한 모금을 머금는 동작 하나하나가 유려했다. 액체를 흘려 보내느라 바쁜 목울대가 시야에 또렷하게도 박혔다.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에 선우가 의도적으로 시선을 거뒀다.

“부드럽네요. 선우 씨가 마시고 있는 암룻은 진하고 여운이 길죠. 히비키와는 다릅니다."

“…….”

​“대신, 첫 입에 강렬한 낙인을 남기지는 않죠.”

나직한 음성이 잔 위를 맴도는 향처럼 느릿하게 흩어졌다. 그의 말은 조급함 없이, 오래 숙성된 시간처럼 느리게 흘렀다. 선우는 괜히 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느닷 없는 상사와의 독대가 불편했다. 선우는 제 호흡을 흩트리는 이 묘한 흐름을 끊고 싶어 서둘러 말을 보탰다.

“본부장님은 어느 쪽이 더 취향이신데요?”

에단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선우의 질문을 입안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는 사람처럼,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짧은 침묵동안 선우는 그의 옆얼굴을 훔쳐봤다. 날카롭게 뻗은 콧대와 선명한 턱선. 긴 속눈썹 아래로는 좀처럼 읽히지 않는 무언가가 잠겨 있었다.

이목구비는 이토록 정교한데, 잔을 쥔 손끝은 의외로 느긋한 남자.

자꾸만 시선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의 얼굴을 이렇게 빤히 뜯어보고 있었다니.

들킨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진 선우는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지만, 괜스레 귀 끝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테이블 위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옳지.

비상구라도 찾은 듯한 안도감에 선우의 손이 재빨리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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