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보세요?”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ㅡ “김선우 씨.” 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제 예상을 완벽히 빗나간 탓이었다. 분명 오늘 처음 들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은 음절의 무게. ㅡ “에단 로웰입니다.” 아, 이 기시감의 원인은 역시나였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ㅡ “뒤 돌아보시겠어요.” 선우가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 곳에, 그가 서 있었다. “…….” 낮은 조도가 일렁이는 바 한가운데, 낮의 정갈한 수트 차림과는 전혀 공기를 두른 남자. 그는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하게 맞물린 순간, 바 안의 소음들이 먼 곳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른하게 흐르던 음악도 베일 너머로 사라지고 오직 그가 몰고 온 긴장감만이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머물던 공간의 밀도가 순식간에 진득하게 바뀌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느낄 뿐이었다. 찰나는 짧은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길게 늘어졌다. 본부장이, 여길 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벙찐 선우의 앞으로 에단이 터벅, 터벅 걸어왔다. 느릿한 발걸음인데도 이상하게 주변의 공기까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발걸음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놀란 건 비단 선우뿐만이 아니었다. 수정 역시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광경을 관조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을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머릿속 계산기가 멈춘 듯했다. “놀라셨죠.” “……여기까지 어떻게.”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거래처 리스트 보다가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신 거예요? 시장조사?” “겸사겸사요.” 겸사겸사. 그 말은 애매했다. 철저히 계산된 비즈니스 같기도, 혹은 사적인 유혹 같기도 한 모호한 경계. 상대를 끌어당기기 위해 던져진 낚싯바늘에 더 가까웠다. 수정은 선우와 에단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무언가를 알아챈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이거. 재밌는 그림인데. 반면 선우는 곤란했다. 눈빛 하나, 표정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하필이면 저의 앞에, 그것도 회사에서는 거리가 꽤 있는 단골 바에서 재회라니. 오늘 술 맛 다 배렸네. “암룻이네요?” 선우의 속을 알 리 없는 그가 잔 속의 호박빛 원액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마치 그 안에 정답이라도 적혀 있다는 듯 말했다. “암룻이 취향이라면, 선호하는 위스키는 대체로 비슷하거든요.” 속단도 빠르시네. 선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잔을 천천히 굴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취향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에단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흔들림 없는 감청색 눈동자가 사람 속을 훑듯 머물렀다. “제가 틀렸습니까.” “……아직은 모르겠는데요.” 방어적인 대답이 툭툭 나갔지만, 그녀가 방어벽을 세울수록 에단의 눈빛은 오히려 흥미로운 불꽃이 튀듯 반짝였다. “그럼 확인해보죠.” 그가 바(Bar) 안쪽을 향해 짧게 시선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에단은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선우의 옆자리를 점령했다. “오늘, 괜찮네요.” “……뭐가요?” 선우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제는 이 남자의 입이 꼭 시한폭탄같았다. 도통 무슨 말이 터져나올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이 자리요.” 정확히 이런 경우 말이다. 그의 한마디가 잔잔한 수면 위에 돌을 던진 것마냥 고요한 내면을 어지럽혔다. 밀려오는 묘한 열기를 털어내려 선우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본부장님은 어떤 위스키를 제일 좋아하시는데요?” “그때 그때 다릅니다.” 선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자, 에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잔의 호박빛 액체처럼 천천히 번졌다. “그리고…….” 에단이 선우 쪽으로 몸을 아주 약간 기울였다. 은밀한 비밀이라도 공유하려는 듯 지나치게 사적인 거리였다. “같이 마시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네?” 다짜고짜 무슨?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만 개쯤 떠올라 과부하가 걸리려던 찰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몸을 바로세웠다. “저는 히비키(Hibiki)로 부탁드립니다.” 곧이어 암룻보다 맑은 색의 액체가 잔을 채웠다. 잔을 든 남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향을 깊게 음미하고 한 모금을 머금는 동작 하나하나가 유려했다. 액체를 흘려 보내느라 바쁜 목울대가 시야에 또렷하게도 박혔다.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에 선우가 의도적으로 시선을 거뒀다. “부드럽네요. 선우 씨가 마시고 있는 암룻은 진하고 여운이 길죠. 히비키와는 다릅니다." “…….” “대신, 첫 입에 강렬한 낙인을 남기지는 않죠.” 나직한 음성이 잔 위를 맴도는 향처럼 느릿하게 흩어졌다. 그의 말은 조급함 없이, 오래 숙성된 시간처럼 느리게 흘렀다. 선우는 괜히 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느닷 없는 상사와의 독대가 불편했다. 선우는 제 호흡을 흩트리는 이 묘한 흐름을 끊고 싶어 서둘러 말을 보탰다. “본부장님은 어느 쪽이 더 취향이신데요?” 에단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선우의 질문을 입안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는 사람처럼,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짧은 침묵동안 선우는 그의 옆얼굴을 훔쳐봤다. 날카롭게 뻗은 콧대와 선명한 턱선. 긴 속눈썹 아래로는 좀처럼 읽히지 않는 무언가가 잠겨 있었다. 이목구비는 이토록 정교한데, 잔을 쥔 손끝은 의외로 느긋한 남자. 자꾸만 시선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의 얼굴을 이렇게 빤히 뜯어보고 있었다니. 들킨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진 선우는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지만, 괜스레 귀 끝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테이블 위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옳지. 비상구라도 찾은 듯한 안도감에 선우의 손이 재빨리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그런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윤오] “…….”에단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왜.”ㅡ “어디야.”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목소리. 스물일곱 해를 들어온, 지나치게 익숙한 음성이었다.“……밖.”ㅡ “밖 어디.”“왜.”수화기 너머로 짧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ㅡ “차. 점심에 병원에 두고 갔잖아.”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답답함이 배어 있었다.ㅡ “지금 어디야.”선우는 무심코 에단을 힐끗 바라봤다.“……압구정.”ㅡ “압구정? 누아르 오크?”척하면 척이었다.“응.”ㅡ “거기 있어.”툭. 대답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진짜.”선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우리 아빠도 이 정도는 아닌데.“바쁘신가 봅니다.”에단이 잔 속 얼음을 천천히 굴리며 물었다.“……그냥, 차 때문에요.”“그럼 가보셔야겠네요.”그는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야.”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선우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익숙한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권윤오였다.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턱을 들었다.“빨리 와.”왜 명령이야.선우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왜.”“차 타.”“나 걸어갈 건데.”또 오기였다. 윤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 단 한 걸음.“말 길게 하게 하지말고.”참 나.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묵직한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건 짜증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축축한 감정이었다. 권윤오의 저 말투, 저 태도, 저 확신.나를 다 안다는 듯한 그 눈빛이, 결국 나를 한 발짝도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버릴 것 같아서.“넌 맨날 이런 식이야.”“……뭐?”“물어보는 척하고, 이미 다 정해놓고.”그게 싫었다.아니.싫어해야만 했다.윤오가 다시
“여보세요?”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ㅡ “김선우 씨.”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제 예상을 완벽히 빗나간 탓이었다. 분명 오늘 처음 들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은 음절의 무게.ㅡ “에단 로웰입니다.”아, 이 기시감의 원인은 역시나였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ㅡ “뒤 돌아보시겠어요.”선우가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 곳에, 그가 서 있었다.“…….”낮은 조도가 일렁이는 바 한가운데, 낮의 정갈한 수트 차림과는 전혀 공기를 두른 남자. 그는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하게 맞물린 순간, 바 안의 소음들이 먼 곳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른하게 흐르던 음악도 베일 너머로 사라지고 오직 그가 몰고 온 긴장감만이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머물던 공간의 밀도가 순식간에 진득하게 바뀌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느낄 뿐이었다.찰나는 짧은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길게 늘어졌다.본부장이, 여길 왜?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벙찐 선우의 앞으로 에단이 터벅, 터벅 걸어왔다. 느릿한 발걸음인데도 이상하게 주변의 공기까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발걸음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놀란 건 비단 선우뿐만이 아니었다.수정 역시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광경을 관조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을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머릿속 계산기가 멈춘 듯했다. “놀라셨죠.” “……여기까지 어떻게.”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거래처 리스트 보다가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신 거예요? 시장조사?” “겸사겸사요.”겸사겸사. 그 말은 애매했다. 철저히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마자 낯선 기류에서 오는 긴장감이 피부를 훑었다. 그리고 넓은 회의실 창가, 쏟아지는 역광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수트 핏과 조각처럼 고정된 자세.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모든 산소를 독점하고 있는 듯한 실루엣. “…….”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창을 가로지른 빛이 그의 얼굴 위로 선명한 궤적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건 깊은 눈매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이었다. 화려한 외모였다. 하지만 선우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이목구비의 생김이 아닌, 그의 시선이었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위압적이지도 않았으나 단숨에 상대를 묶어 두는 힘이 있었다. “김선우 씨?”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네, 김선우입니다.”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온 대답 위로 남자의 구두 소리가 얹혔다. 그가 거리를 좁혀올수록, 선우는 자신이 사냥감이 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에단 로웰입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서로의 손바닥이 맞닿은 짧은 찰나, 선우는 자신의 맥박이 상대의 손끝에 실시간으로 읽히고 있다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름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가 손을 놓으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브랜드 총괄로 파견 왔습니다. 이번 분기 신규 위스키 론칭부터 김선우 과장님과 함께하게 될 겁니다.” 과하게 힘을 주지도, 가볍지도 않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의 저음에는 거부할 수 없는 확신과 지배력이 실려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여유롭게 웃는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선우는 에단의 시선이 제 얼굴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신경 쓰였다. 이 남자의 눈동자는 꼭 잘 숙성된 위스키의 원액처럼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업무 복귀해 보겠습니다.” 선우가 서둘러 몸을 돌린 찰나였다. “김선
“뭐야?”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회사 정문 앞,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지는 얼굴. 민재였다.“……선우야.”그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평화롭던 공기가 단숨에 비틀렸다. 윤오와 걷던 길 위에 남아있던 가슴 떨리는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회사까진 왜 왔어?”“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계속 연락했는데…….”“차단했거든.”정곡을 찔렸다. 그가 멍청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비굴함은 이내 집요함으로 변질되어 또 끈질기게 거리를 좁혀왔다.“그래도 우리 얘기 좀 하자.”“할 얘기 없어.”“나 진짜 이번에는…….”“됐어.”더 들어 볼 이유도 없었기에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관계에 미련 따위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남이야 그러던 말던 민재는 끈질겼다. 그의 손이 선우의 팔을 향해 뻗어지던 찰나, 묵직한 그림자가 들어섰다.“그만하지 좀.”언제 다가왔는지 윤오가 선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민재의 미간이 단번에 일그러졌다.“권윤오?”윤오는 대답 대신 선우의 상태를 짧게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는 건조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회사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이야.”민재의 시선이 윤오와 선우. 두 사람을 번갈아 향하더니 이윽고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니네 진짜….”그의 시선이 선우에게 날카롭게 꽂혔다.“나랑 헤어지고 바로 붙어먹는 게 또 권윤오야?”“뭐? 김민재, 너 말 똑바로 해.”선우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 민재가 답답한 듯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선우야, 내가 말했잖아. 어제 그거 다 오해라고—.”“오해?”기어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내가 도대체 무슨 시간 낭비를 한 거지?“바람 피운 게 오해야?”결국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다보니 회사 입구를 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
권윤오가 있었다. 차트를 넘기고 있는 손, 고개를 드는 타이밍, 모두 평소와 다름이 없이 무결했다.“왔네.”“어.”짧은 인사와 대답이 오갔다. 윤오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앉아.”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 질렀다. 윤오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물린 찰나, 선우의 머릿속으로 어제의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제발 좀 잊어버리고 싶었다.결국 화상을 입은 듯 먼저 시선을 꺾었다. 12년이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의 세월 동안 숨소리 하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왔던가. 권윤오의 두 눈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의식되는 거였다.“……야.”결국 선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어제 있잖아.”용기를 냈는데.“심전도 검사 한번 하자.”선우의 해명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뭐?”“금방 끝나.““야, 나 멀쩡ㅎ…….”“확인만 하는 거야.”선우가 입을 합죽이했다. 확인이라니. 지금 네 눈앞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심장 소리를, 기계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선우는 제 마음을 들킬까 겁이 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심하게 차트만 넘기는 저 잘생긴 옆얼굴이 야속해졌다.“금방하고 점심이나 같이 하자. 배고프잖아.”어르고 달래는 투였다. 항상 이런 식이다. 12년째 반복되는 이 뻔한 술래잡기는 그녀의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갑자기 왜 난린데.”선우의 날 선 물음에 윤오가 들고 있던 차트를 ‘툭’ 소리 나게 덮었다. 두 눈.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제일 두려워하는 눈이 자신을 향했다.“어제 심박 이상 있었어.”윤오가 선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눈동자 너머로 숨겨진 맥박 하나까지 다 읽어낼 것 처럼 고요한 시선으로.“…….”간질 간질, 가슴 쪽이 신경
낯익은 천장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초점이 겨우 맞물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억은 파편화되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낮게 가라앉은 눈빛,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느껴지던 숨결, 그리고 제 뺨을 감싸 쥐던 단단하고 뜨거운 손가락.나는 홀린 듯 권윤오를 올려다보았고, 그의 시선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내 입술로.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던 정적 속에서 윤오가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을 때—.‘……선우야.’고막을 간질이던 낮은 음성.쿵.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너 부정맥인 거 같아.’뭐라고?“뭐야?”선우가 눈을 깜빡였다.“아…….”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머릿속의 무게추가 한 박자 늦게 따라붙으며 관자놀이를 마구 때려댔다.숙취의 통증이 뇌세포 하나하나를 망치로 때리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올렸다. 꿈인가? 꿈이겠지?“…….”그냥 죽자, 김선우.콱 죽어버리자.선우가 제 얼굴을 이불로 둘둘 감아 봉인해버렸다.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이 차라리 머릿속에서 상영 중인 흑역사 필름보다 나았다.“죽어! 그냥 죽어!”퍽ㅡ, 퍽ㅡ.선우가 침대 위에서 발버둥을 쳤다. 이불이 여기저기 형편없이 주름졌다.어제는 꽤 마셨다. 아니, ‘꽤’라는 부사는 이 대참사에 너무 예의 바른 표현이었다. 명백히, 그리고 아주 화려하게 선을 넘었다.원래 이 정도로 자신을 방치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글로벌 위스키 브랜드 한국지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해온 그녀에게 술은 업무의 연장선이었고, 스스로의 주량 컨트롤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제는 감정이 이성을 앞질렀고, 위스키는 그저 그 뒤를 따르는 훌륭한 공범이었을 뿐이다.근데 왜 하필! 권윤오냐고!선우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괴로워. 너무 너무 괴로웠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어제의 '키스 미수 사건'의 충격 때문에 뇌가 정지한 건지 분간이 안 갔다.이게 다 내 술기운이 만들어낸 화려한 망상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