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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버릴 것이 없는 날에도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
처음부터 이상했던 것은 아니다.
결혼한 뒤 줄곧 분리수거는 도진의 몫이었다. 수요일 밤 열 시가 되면 거실과 주방을 한 바퀴 돌며 페트병과 캔을 모았다. 서윤이 상자를 접어 현관에 내놓으면, 도진은 그것까지 끈으로 묶어 들고 내려갔다.
십 분이면 끝나는 일이었다.
“분리수거하고 올게.”
“응. 우유 팩도 가져가.”
“어디 있는데?”
“싱크대 옆.”
“알았어.”
익숙한 대화였다. 다녀온 도진이 손을 씻는 동안 서윤은 보리차를 따랐고, 둘은 소파에 앉아 십 분쯤 텔레비전을 보았다. 말없이 같은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이 불편하지 않은 것. 서윤은 그런 게 오래된 부부의 평온이라고 생각했다.
변화는 석 달 전부터 시작됐다.
수요일이 아닌데 도진이 페트병 두 개를 들고나갔다. 그다음에는 금요일, 그다음 주에는 월요일과 목요일이었다. 최근 보름 동안은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나가는 시간도 길어졌다. 십 분이 이십 분이 되고, 어느 날은 사십 분을 넘겼다.
“분리수거하는 데 오래 걸렸네.”
서윤이 무심코 묻자 도진은 냉장고 문을 열며 대답했다.
“아래층 남자 만났어. 주차 때문에 말이 길어져서.”
“무슨 주차?”
“내 차 옆에 자꾸 바짝 대는 차 있잖아.”
그런 차가 있었나. 서윤은 생각하다가 금세 잊었다. 마감을 앞둔 주에는 하루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보냈고, 지하 주차장에 내려갈 일도 드물었다.
도진은 서윤의 그런 생활을 잘 알았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서윤은 아직 데뷔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작가였다.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달과 그렇지 않은 달의 차이가 컸고, 세금 신고일만 되면 새벽까지 영수증을 뒤졌다. 숫자에 밝은 도진이 하나씩 대신 맡아 주기 시작했다.
법인을 만들자고 한 것도 도진이었다. 서윤은 글을 쓰고, 도진은 계약과 돈을 관리했다. 서윤이 신작을 세 편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도진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주위에서는 아내의 일을 돕는 남편이 흔치 않다며 부러워했다.
서윤도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작품의 처음과 끝을 책임지는 동안 도진이 그 밖의 세계를 지켜 준다고.
그래서 법인 계좌의 보안카드가 어느 서랍에 있는지, 거래처가 몇 곳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결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도진이 펼쳐 놓은 서류의 표시된 자리에 서명했다. 7년 동안 문제는 한 번도 없었다.
최근 도진이 밤마다 나가는 일 역시 처음에는 그가 맡은 사소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서윤은 마감 시간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원고 파일 옆 작은 수첩에는 그날 있었던 일도 한두 줄씩 적었다. 어느 날 ‘도진 분리수거 11:20’이라고 쓴 문장이 사흘 연속 이어진 것을 보고서야 횟수가 눈에 들어왔다.
“일은 얼마나 남았어?”
“두 장면. 오늘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무리하지 마. 또 새벽에 속 쓰리다고 하지 말고.”
그는 따뜻한 물을 서윤 앞에 놓아 주었다. 손바닥만 한 약통도 함께였다. 도진은 서윤보다 약 먹는 시간을 잘 챙겼다. 두 번의 유산을 겪고 몇 달을 방 안에서 보내던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날 낮까지는.
택배 상자가 현관을 막을 만큼 쌓여 있었다. 집필이 막혀 산책이라도 할 겸, 서윤은 직접 상자를 들고 내려갔다. 플라스틱 용기와 빈 병, 캔도 전부 챙겼다. 냉장고 안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소스병까지 씻어 라벨을 떼었다.
재활용장을 두 번 오간 뒤 싱크대 밑 분리함은 깨끗이 비었다.
그날 밤 열한 시 십 분.
작업실 문밖에서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뭐 해?”
“분리수거.”
서윤은 의자에서 몸을 돌렸다. 도진이 작은 반투명 봉투의 입구를 묶고 있었다. 안에는 손바닥으로 구겨지는 생수병 하나와 과자 상자 하나뿐이었다.
“그건 내일 버려도 되잖아.”
“나온 김에 버려야지. 쌓이면 귀찮아.”
“낮에 내가 다 버렸는데.”
도진의 손이 잠깐 멈췄다.
“뭘?”
“재활용품. 전부.”
“작업실 앞에 상자 하나 더 있더라.”
서윤은 열린 작업실 문 너머를 보았다. 복도는 깨끗했다.
“무슨 상자?”
“택배 온 거 있잖아. 내가 접었어.”
도진은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현관으로 걸어갔다. 회색 후드 집업을 걸치고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까지 손으로 정리했다.
고작 분리수거를 하러 가면서.
“금방 올게.”
문이 닫혔다.
서윤은 한동안 모니터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커서가 빈 문장 위에서 깜박였다. 쓰려던 대사는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도진이 말한 택배 상자가 마음에 걸렸다.
서윤은 작업실과 현관, 서재까지 확인했다. 접힌 상자는 없었다. 종이 한 장, 빈 병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분리수거함 바닥에는 낮에 씻고 난 물기만 말라붙어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서윤은 거짓 장면을 만드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호텔 라루체 31층에서 정확히 8초 동안 정전이 일어난다. 여주인공은 흰 동백 브로치 안에 녹음 장치를 숨기고, 불이 꺼진 사이 남주의 재킷에 그것을 꽂는다.실제 차기작에는 호텔도, 녹음 장치도 나오지 않았다. 인물 이름도 임시로 만들었다.일부러 눈에 잘 띄지 않는 세부도 넣었다. 정전이 끝난 뒤 엘리베이터 표시창에 존재하지 않는 32층이 한 번 나타나는 장면이었다. 유리가 줄거리만 훑어서는 떠올리기 어려운 조합이었다.문장을 쓰는 일은 익숙했지만, 누군가 훔쳐 가기를 기다리며 쓰는 건 처음이었다. 평소라면 인물의 동기를 세 번쯤 고쳤을 장면을 서윤은 그대로 두었다. 완성도를 높이면 나중에 자기 작품에 쓰고 싶어질 것 같았다.서윤은 파일을 클라우드에 올리기 전 정미란과 재하에게 보냈다. 제목과 작성 시각, 파일의 고유값까지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다.재하에게 곧 답이 왔다.[스토리온 서버에 수신 원본 그대로 보관하겠습니다.]파일 이름은 ‘차기작_후반부_수정안’으로 정했다. 도진이 종종 확인하던 대표 검토 폴더 안에 넣었다. 보조 작업 계정에는 접근 권한이 없는 곳이었다.유리에게는 새 파일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도진에게도 차기작의 후반부를 다시 쓰고 있다는 말만 전날 식탁에서 흘렸다. 둘 중 한 사람이 합법적인 권한으로 열고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도, 유리가 저장된 접속 정보를 이용해 직접 들어올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 필요한 건 유출 경로를 단정하는 일이 아니었다.업로드 시각은 오전 10시 12분.오전 10시 29분, 낯선 윈도 기기에서 파일을 열었다.다운로드 기록까지 남았다.서윤은 당장 누구의 기기인지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접속 기록을 저장해 미란에게 전송한 뒤 평소 원고로 돌아갔다. 한 문단을 고치는 동안에도 화면 오른쪽 아래의 시계만 눈에 들어왔다.오후 한 시가 지나도록 아무 연락도 없었다.도진은 회사에 있었고, 유리는 오늘 오지 않는 날이었다. 두 사람이
아침을 먹던 도진도 먼저 계정 이야기를 꺼냈다.“비밀번호 바꿨어?”“응. 낯선 기기에서 접속했다고 메일이 왔어.”“회사 계정도?”“내 개인 계정만.”도진은 숟가락을 놓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공용 폴더가 다 풀렸던데. 새 비밀번호 알려 줘. 다시 연결해 놓게.”“이중 인증 걸어서 내가 해야 돼. 이따가 할게.”“그런 걸 귀찮게 왜 직접 해.”“내 원고 계정이잖아.”짧은 침묵 뒤 도진이 다시 국을 떴다.“그래. 잊어버리지 말고 해 놔.”그는 평소처럼 그릇을 싱크대에 넣고 출근했다. 현관문이 닫히기 전까지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서윤은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누구에게 연락할지 생각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유리는 예정대로 목요일 오전 열 시에 왔다.“작가님, 클라우드 비밀번호 바꾸셨어요?”인사보다 먼저 나온 말이었다.서윤은 현관문을 닫으며 유리를 보았다.“어떻게 알았어요?”“아침에 공유 폴더가 로그아웃돼 있더라고요. 자동 저장이 풀려서요.”유리에게 알려 준 계정은 완성 원고를 올리는 보조 작업용뿐이었다. 전날 바꾼 것은 서윤의 개인 계정이었다.“요즘 계정 도용이 많대요. 전체 로그아웃했어요.”“아, 그래서 그랬구나. 깜짝 놀랐어요.”유리는 금세 웃었다. 노트북 가방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가더니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냈다.“작가님도 드실래요?”“괜찮아요.”“대표님이 새로 주문한 거 맛있던데.”유리의 손이 잠깐 멈췄다.“지난번에 여기서 마셔 봤어요.”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탄산수는 사흘 전 도착했다. 그 뒤 유리가 집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유리는 탄산수를 서윤이 거의 쓰지 않는 길쭉한 유리컵에 따랐다. 도진이 술을 마시지 않는 날 탄산수를 담는 컵이었다. 냉동실 둘째 칸에서 레몬 조각을 꺼내는 손도 망설이지 않았다.“여기 물건 위치를 나보다 잘 아네요.”“자주 오니까요. 작가님은 작업 시작하면 주방에 잘 안 나오시잖아요.”서윤이 글을 쓰는 동안 유리가 도진과 함께 커피를 마시거나 점심을 주문한
페이지온은 1년 8개월 전에 만들어진 회사였다.최유리가 서윤의 보조 작가로 들어오기 두 달 전이었다. 법인 등기상 목적에는 콘텐츠 기획, 번역, 마케팅, 저작권 중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등록 당시 주소는 월 단위로 빌리는 공유 사무실이었다.설립 석 달째부터 해윤콘텐츠의 번역과 홍보 물량 대부분을 맡았다.현우가 세금계산서 세 장을 나란히 놓았다. 발행한 달과 금액은 달랐지만 품목 설명은 한 글자까지 같았다. ‘해외 시장 확장을 위한 현지화 콘텐츠 기획 및 검수.’ 어느 국가의 어떤 작품인지 적힌 곳은 없었다.“거래처를 이렇게 빨리 바꾼 이유가 보고서에 있나요?”“제가 받은 보고서에는 거래처 이름 자체가 없었어요.”도진은 외주비라는 항목 아래 숫자만 적어 왔다. 서윤이 작업에 필요한 비용이냐고 물으면 앞으로 해외 시장이 커질 거라고 했다.“실제 작업물을 받은 적은요?”현우가 물었다.“번역 샘플이나 광고 보고서 같은 거요.”“저한테 직접 온 건 없어요. 남편이 알아서 했으니까.”말하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문장을 같은 방식으로 끝냈는지 알 것 같았다.도진이 알아서 했다.세금도, 계약도, 회사도. 서윤은 작품을 쓰는 것으로 자기 몫을 다한다고 믿었다.현우는 정산표 옆에 지급 증빙을 나란히 띄웠다. 페이지온은 매달 편집 용역이나 홍보 대행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 같은 달에 번역료와 마케팅비가 겹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공유 폴더 안에는 결과물도, 외부 업체에 다시 맡긴 내역도 없었다.“용역을 실제로 했는지는 더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단계에서 전부 횡령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실제로 한 일이 있다면요?”“그 일의 가치와 지급액이 맞는지 봐야죠. 특수관계도 숨겼고요.”현우는 금액 옆에 실제 산출물이 확인됐는지 표시했다. 열아홉 건 가운데 첨부파일이 있는 것은 두 건뿐이었다. 그마저도 서윤의 작품 소개를 자동 번역한 네 쪽짜리 문서와, 공개된 표지 이미지를 붙인 광고 시안이었다.“이게 3천만 원짜리 결과물이라고 보기에는 설
다음 날 오후, 서윤은 스토리온 본사 맞은편 건물로 들어갔다.집을 나설 때 도진에게는 담당 편집자와 점심을 먹는다고 했다. 거울 앞에서 평소 쓰던 립스틱까지 바르고 나왔다. 현관에서 도진이 우산을 챙겨 주며 늦지 말라고 했을 때도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재하가 잡아 둔 곳은 법무법인의 작은 회의실이었다. 창가에 정미란 변호사와 오현우 회계사가 앉아 있었다. 재하는 계약서 제출 기록과 플랫폼의 본인 확인 절차를 설명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테이블 위에는 서윤이 받은 사본과 플랫폼 접수 내역이 따로 묶여 있었다. 재하는 서류를 넘기면서도 계약이 왜 만들어졌는지 추측하지 않았다.“원본과 접속 기록은 저희가 보존하겠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서윤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같이 안 계세요?”“여기부터는 작가님이 어디까지 말씀하실지 정하셔야 하니까요.”문이 닫히자 미란이 먼저 물었다.“남편에게 들킨 것 같거나, 당장 집에 돌아가는 게 위험하진 않으세요?”“그런 건 아니에요. 아직 제가 안다는 걸 몰라요.”“그 상태를 가능한 한 유지하세요. 따지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어젯밤에 남편이 다른 집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그 집에는 여자와 아이가 있었고요.”미란은 놀란 기색 대신 새 기록지를 꺼냈다.“아이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날짜부터 적겠습니다. 사진이나 녹음은 있으세요?”“없어요. 따라가기만 했어요.”“괜찮습니다. 지금부터 합법적으로 확인하면 됩니다. 다시 미행하다 들키거나 무리해서 증거를 만들 필요는 없어요.”그 말에 서윤은 처음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언가를 당장 해내지 못하면 전부 놓칠 것 같았는데, 미란은 멈춰 있는 것도 순서라고 말했다.미란은 계약서 사본을 한 장씩 확인했다. 서윤의 서명 이미지가 들어간 마지막 장에서는 확대경으로 인쇄면까지 살폈다.“이 서명을 직접 넣으신 적 없다는 말씀이죠?”“네. 이미지 파일은 남편에게 보낸 적 있어요.”“그 메일을 지우지 마세요. 전달 시각과 첨부
서윤은 베란다 문을 닫고 재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유리에게는 두통이 심하니 오늘 작업을 쉬겠다고 했다. 유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약을 챙겨 먹으라고 당부한 뒤 돌아갔다.마지막까지 완벽한 보조 작가였다.“이제 통화 괜찮아요.”- 혹시 제가 보낸 보안 메일 확인하셨습니까?“아직요.”- 열어 보시기 전에 먼저 여쭙겠습니다. 작가님이 ‘페이지온’이라는 회사와 포괄적인 저작재산권 양도계약을 체결하셨습니까?“아니요.”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기존 연재작 열두 편과 현재 집필 중인 신작을 포함한 계약입니다. 전자책, 웹툰, 영상화, 해외 번역 권리까지 들어 있습니다.“그런 계약은 한 적 없어요.”수화기 너머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계약서에는 서명이 되어 있습니다. 해윤콘텐츠 대표 박도진 씨가 대리 확인한 것으로 되어 있고요.“제 남편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 실무자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재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놀란 목소리로 위로하지도 않았다. 필요한 사실만 짧게 설명했다.“계약서 보내주세요.”- 먼저 사본을 보낼 수 있습니다. 원본과 제출 기록은 저희 쪽에서 보존하겠습니다.“승인은요?”- 본인 확인 전까지 보류 상태입니다.“그대로 두세요. 거절했다는 연락도 아직 하지 말고요.”재하가 잠깐 조용해졌다.-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네.”- 알겠습니다. 다만 작가님 개인 계정 비밀번호부터 변경하십시오. 회사 공용 계정과 같은 비밀번호를 쓰고 계시면 그것도 분리하시고요.“이사님.”- 네.“이 계약서가 언제 들어왔어요?”- 어제 오후 4시 12분입니다.어제 도진은 외근이 있다며 오후 내내 회사에 있었다. 밤에는 접힌 종이를 봉투에 넣어 1704호로 가져갔다.“페이지온 대표가 누구예요?”- 최유리 씨로 되어 있습니다.서윤은 눈을 감았다.왼손으로 오른쪽 손등을 감쌌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감각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사본 보내주세요.”- 지금 보내겠
서윤은 문을 열기 전에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최유리가 활짝 웃고 있었다.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 다른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어젯밤 보았던 크림색 카디건을 입은 채였다.“오늘은 라때로 사 왔어요. 어제 잠 제대로 못 주무셨죠?”“티 나요?”“조금요. 작가님 마감할 때 표정이 딱 있잖아요.”유리는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실내화를 꺼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이 집에서 일한 지 1년 반이었다. 신발장 두 번째 칸, 도진의 운동화 옆에 연분홍색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서윤은 오늘 처음 그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유리를 데려온 사람도 도진이었다. 출판사에서 교정 일을 했던 사람인데 아이디어가 좋고 입이 무겁다며 먼저 이력서를 보여 줬다. 마감 직전 자료 조사와 오탈자 확인을 맡길 사람이 필요했던 서윤은 간단한 면접 뒤 유리를 채용했다.첫날부터 손발이 잘 맞았다. 유리는 서윤이 긴 문장 끝에서 자주 빼먹는 마침표를 찾았고, 인물 이름이 바뀐 대목을 정확히 짚었다. 마감이 몰린 날에는 새벽까지 남아 주기도 했다.도진이 택시를 불러 보내 주겠다고 하면 유리는 늘 같은 방향이라며 웃었다. 서윤은 회사 근처 원룸에 사는 줄 알았다. 주소를 확인한 적은 없었다. 급여 계약서와 신분증 사본도 도진이 정리했다.그 무관심까지 두 사람은 이용했다.“대표님은 출근하셨어요?”“응. 조금 전에.”“오늘 외부 미팅 있다고 하셨죠?”“그랬나.”도진의 일정을 유리가 자신보다 잘 알고 있었다.“왜요? 일정 바뀌었대요?”“아니에요. 어제 파일 정리하다 들은 것 같아서요.”유리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찬장에서 유리컵을 꺼내 커피를 옮겨 담았다. 어느 컵을 서윤이 자주 쓰는지, 빨대가 어느 서랍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서윤은 식탁 건너편에 앉아 유리의 손을 지켜봤다.“유리 씨.”“네?”“아이 좋아해요?”얼음이 유리컵 안에서 부딪혔다.“갑자기요?”“가방에 붙은 스티커가 귀여워서.”유리의 노트북 가방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