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내 어머님은 일찍이 돌아가셨고, 아버님은 항상 비밀을 감춘 듯 보이셨다.’
새삼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하게 살아가던 그때가.
‘그리고 나는 물을 다룰 줄 안다.’
모호한 유년기의 기억.
은둔하며 살아가던 아버지.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마술.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얄궂게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머리로는 이해가 가도, 마음으로는 믿음이 가질 않았다.
‘내가 용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무엄하오.”천우가 지친 와중에도 주의를 주었다.“왕을 바꾸다니. 그리고 그것이 하찮다니. 백성으로서 품을 수 없는 참람한 사상이오.”“백성으로서?”어리가 되물었다.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천우를 노려보는 것이 조금 발끈한 것 같기도 했다.“물빛께서는 진정으로 당신이 이 땅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당연한 것 아니오?”천우가 콧김을 뿜었다.“이 땅에서 나는 작물을 먹고, 이 땅에서 통하는 언어를 말하고, 이 땅에서 보내는 시간을 누리고 있소이다. 또한 이 땅에서 만난 사람들과 웃고 울며 살아왔소. 그것이 이 땅의 백성이 분명하다는 증좌(證左)가 아니오?”“사람들과 웃고 울며 살아왔다. 그것이 증거라는 말씀이십니까?”“그렇소.”“사람이 아닌, 미르의 몸인데도 진정 그리 생각하십니까?”“나는 아직도 내가 물빛미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천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일평생을 팔다리가 달린 사람으로 살아왔소.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너는 미르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쩌라는 것입니까? 솔직히 처음 주상전하께 미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주상전하라.”어리가 피식 웃으며 말허리를 잘랐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불과 물의 미르가 어쩌고, 사람의 몸으로 환생을 했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며 당장 관가를 찾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러나 불을 다루는 사람이 있고, 물을 다루던 자신을 압도하였으며 주상전하로부터 미르가 실존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그리고 본인을 붉빛미르. 붉은색 빛깔을 띈 용이라 소개하는 사람이 있다.더 이상 의심할 수 있을 리 없었다.나는 물빛미르고.너는 붉빛미르다.“용이라는 것은 본디 그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짐승이다……”천우는 지난번 주상전하로부터 전해들은 말을 가만히 읊조리며 눈앞의 어리를 가만히 쳐다봤다.어폐가 있는 것이, 눈앞의 여인은 용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눈썹 긴 두 눈과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가느다란 목, 달덩이 같은 얼굴…… 이게 그냥 사람이지, 어찌 흉악한 미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미르에 대해 나름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어리가 두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불빛에 비친 눈망울에 날카로운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아니면. 누구한테서 들었다거나.”“……”“물빛께 미르에 관한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있었습니까? 누구입니까?”“대답하지 않을 것이오.”천우가 단호
“으음……”천우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상자 안에 넣고 마구 흔들어진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머리는 지끈거리고,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으며 속도 울렁거렸다.무엇보다,일어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너무나도 지쳐버린 탓인지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감각의 통제력을 상실한 듯한 기분이었다.‘여기는……’천우는 바닥에 늘어붙은 듯한 느낌을 억지로 젖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실내에 들어와 있는듯 어두컴컴했고,약간 물에 젖은 흙냄새가 났다.바닥이 차갑고 등도 젖어 있었는데,천우는 지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혼절해 있던 참이었다.진흙을 발라 세운 벽 안쪽에서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어디지?여기가……’당최 어디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인지가 되질 않았다.끼익-앞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들어보니,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사람?사람이 맞는 듯했다.팍-일순간 한덩이의 불길이 허
어리의 손에 힘이 풀렸고, 거기서 벗어난 천우가 아래로 내려왔다.탁-발이 땅에 닿자마자, 천우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강력한 적개심을 느꼈다.눈앞에 평생의 숙적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숙적에게서 간신히 풀려나 반격할 수 있는 틈을 가지자마자 파도처럼 들이닥친 적개심이었다.발 아래 땅 밑에 물이 더 있었다.생애 태어나서 가장 급하게, 빨리, 신속하게 지하수를 조종했다.흙과 모래 사이로 솟아오른 물방울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불길의 빛이 반사된 물방울들이 영롱한 광채를 뿜었다.척-천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물을 앞으로 겨눴다.그러자 천우의 명을 받은 물이 바람처럼 어리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갔다.파앙-!!!아까도 그랬듯이, 어리의 방어는 즉각적이었다.순식간에 붉은 기운으로 이뤄진 방패로 물세례를 막았다.그 바람에 충격파가 터지며 뒤로 한차례 물러났지만, 어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스으으으-어김없이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물과 불이 부딪힌 자리였다.잠시 거리가 멀어지자, 물을 다루는 남자와 불을 다루는 여자가 잠자코 그 현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아직은.”어리가 중얼거렸다.허공에 대고 신비로운 손짓을 날리는데, 어떤 주문이라도 외운 것인지 붉은 기운이 손아귀로 모여들어 점점
“이제야 알아보시는가.”천우가 강한 열기에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대 앞에 선 내가 누구인지를.”“아다마다요.”어리가, 아니 붉빛미르가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오랜만에 마주한 친우를 보는 듯하기도, 드디어 찾았다는 안도감이 보이기도, 반드시 멸해야 할 목표를 확보했다는 만족감 또한 돋보이는 미소였다.“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어리가 담담한 와중에도 상기된 투로 말했다.“평생을 그리워한 이름이거늘.”“그리워해?”“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 사이에 비록 많은 일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한 뿌리에서 나온 남매 같은 인연이거늘. 불과 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두 정수가 만나 영원히 순환하는…… 나의 반쪽. 나의 반신(半身)이자 반신(半神). 천명의 대리자. 하늘의 심부름꾼.”어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무겁게 온몸을 짓눌렀다.그러나 그 와중에도 기묘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무언가 이전에 맡아본 듯한…… 불과 물이 뒤섞인 아비규환 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워낸 연꽃 같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한, 오로지 미르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리움의 향……“진심으로.”&n
콰아아아-!!!!!분노한 어리의 몸짓에 맞추어 화마(火魔)가 맹렬하게 타올랐다.마당을 뒤덮은 불이 울타리를 넘어 옆집에까지 번지며 새빨간 지옥을 만들어냈다.이제 마당을 떠날 수도,밖에서 들어올 수도 없었다.불의 장벽이 잔혹하게 가로막고 있었다.“사,살려줘……”“잘못…… 잘못 했습니다……”아직 살아있던 역사들 몇몇이 어리에게로 엉금엉금 기어왔다.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힘 앞에서,처절하게 머리를 찧어가며 목숨을 구걸했다.“내,내가 미안하오……”정맹차도 빠지지 않았다.“내가 사람을 몰라보고 실언을 했습니다!이렇게 빕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그러니 제발 목숨만은……”두 손바닥을 비비고,바닥에 이마를 짓이기며 빌었다.화상 입은 팔의 고통 따위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모양새였다.스윽-그러나 어리는 정맹차를 살려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손을 비수(匕首)처럼 쳐들어 정맹차의 얼굴을 찔러 들어갔다.손끝에 불이 어려 있었다.얼굴을 꿰뚫고 말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