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지막 박수가 끝나자 의상실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반납하셔야 해요. 내일 오전에 다른 촬영 나가는 옷이라서요.”
밤 10시가 넘어서야 대기실의 옷걸이를 세었다. 흰 드레스와 입지 않은 검정 드레스, 이헌의 여벌 재킷까지. 사람들을 귀가시켜도 이 물건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에는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채원은 가방을 멘 채 기다렸다. 화장을 지운 얼굴이 한결 어려 보였다.
“내일 오전 일정, 그대로 할게요.”
“취소해도 되는 인터뷰예요. 오늘 일 질문할 수도 있고요.”
“영화 잡지잖아요. 질문지 보고 결정할게요.” 채린은 습관처럼 괜찮겠냐고 한 번 더 물으려다 멈췄다. 채원은 자기 드레스가 커버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저 옷, 오늘 입어서 다행이에요.” 채린은 말없이 지퍼를 올렸다. 찢어진 옆선이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옷에는 아무 흠도 없었다.
출입증을 반납하러 온 현정에게 병원은 어땠느냐고 물으려다 말을 삼켰다. 낮의 통화를 들었다는 설명부터 해야 할 터였다. 채린이 오늘 고생했다고 인사를 건네자, 현정도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마주 인사했다.
출입 담당자가 내민 미회수 목록에는 최유정 명의의 증을 경찰에 인계했다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지우는 목록 곁에 제 출입증도 놓고 수량을 다시 세었다.
“본부장님, 저 오늘 놓친 거 없었죠?”
“응. 잘했어요.” 너무 빠른 대답이었는지 지우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어쩌면 오늘 하루 내내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기다린 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찾아온 행사 실장은 교체 인력 확인서와 외주 계약 사본을 내밀었다. 이름은 바로잡았지만 추가 비용 승인은 아직 남았다는 설명이었다.
의자 등받이에 서류를 받쳐 놓고 넘기던 채린의 눈이 계약 하단에서 멎었다. 처음 보는 관리번호가 붙어 있었다.
외주관리 R-17.
인력 공급 업체명 옆에 붙은 번호인데 정작 지급처는 별도로 적혀 있었다. 채린은 실장에게 이 번호가 어느 쪽에서 붙인 것인지 물었다.
“저희도 상위 계약에서 넘어온 거라. 내일 회계 담당자한테 물어볼게요.”
“그럼 인원 확인만 서명할게요. 비용은 확인하고요.” 번호를 메모에 옮기는데 첫 글자와 달리 숫자 끝이 자꾸 겹쳐졌다. 왜 이러지 싶어 손을 펴 보니 엄지와 검지 사이가 떨리고 있었다.
춥네. 그렇게 느끼기 무섭게 이가 부딪혔다.
지우가 급히 냉방 스위치를 찾는 사이 괜찮다고 하려던 목소리가 목에 걸렸다. 채린이 벽을 짚고 주저앉는 동안 옷걸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본부장님?” 그 소리를 듣고 돌아온 이헌이 재킷을 벗어 채린의 어깨에 둘렀다. 행사 의상이 아닌, 사복 위에 입고 있던 옷이었다.
채린은 재킷 안쪽의 상표를 보고 반사적으로 팔을 뺐다.
“이거 비싼 거잖아요.”
“그래서 바닥에 떨어뜨리려고요?”
“구겨지면 배우님이 또 뭐라고 하실 텐데.”
“지금은 내가 입을 게 아니라서요.” 미끄러지는 옷깃을 받쳐 주던 손이 채린이 다시 걸치고서야 떨어졌고, 평소라면 돌려줄 날짜부터 말했겠지만 입술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따뜻한 천을 덮고도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세탁비는 다음에 받아요. 지금 계산하지 말고.”
“제가 낼 건데요.”
“그럼 더 천천히 계산해요.” 채린은 반박하려 했지만 턱이 떨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우에게 의무실 위치를 묻던 이헌이, 일어나려다 휘청이는 그녀의 팔꿈치 아래를 받쳤고, 몇 걸음 뒤 의무 담당자가 이동 의자를 가져오자 그제야 자리를 비켜 줬다.
끝나기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끝내겠다고 버틴 몸이 뒤늦게 자기 차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의무실에서는 혈압과 체온을 확인하고 증상을 물었다. 채린이 어제부터 오한과 집중력 저하가 있었다고 설명하자, 담당자는 현장 확인만으로 원인을 정할 수 없다며 추가 진료를 권했다.
반납은 수정에게 맡겼는데도 병원으로 옮기기 전까지 확인서 사진을 놓지 못했다. 글자가 자꾸 겹쳐 보이고서야 채린은 휴대폰 화면을 껐다.
진료를 마쳤을 때는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의료진은 당장은 쉬면서 상태를 살피고, 증상이 이어지거나 심해지면 다시 진료받으라고 했다. 왜 하루를 되살린 뒤 몸이 이러는지는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귀가 차량을 기다리는 동안 채린은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업무 메모와 다른 수첩이었다.
첫 장에 두 날짜를 적었다. 없어진 날의 오후 5시 50분, 다시 돌아온 전날의 같은 시각.
그 아래에는 채원이 오늘 무대에서 입은 흰 드레스가 멀쩡했다는 말을 적었다.
귀가 차량이 도착해 가방을 닫으려다, 방금 적은 문장에 손끝이 멎었다. 채린은 그 문장을 한 번 짚어 본 뒤 수첩을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사무실 유리문에 자기 얼굴이 두 개 비쳤다.밖은 어둡고 안은 밝았다. 채린은 모니터와 유리문을 번갈아 보다가 커튼을 닫았고, 반성하는 얼굴까지 옆에서 일하는 기분은 별로였다.감사 예고를 받은 다음 날 밤이었고, 라운에 보낼 수정안은 4번째 파일이 됐다. 기존 촬영분에서 만들 영상, 새로 찍어야 할 영상, 취소할 영상. 셋으로 나누면 될 일이 비용을 넣을 때마다 하나로 엉켰다.채린은 추가 인건비를 회사 부담 칸으로 옮겼고, 그만큼 본부 실적이 줄었다. 지우의 계약 연장을 설명할 때 또 이 숫자가 돌아올 터였다.“밑줄 친다고 돈이 생겨?” 수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코트 단추를 채운 채로 채린의 책상부터 봤고,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남아 있는 자료의 양을 훑었다.“왜 아직 있어요?”“네가 보낸 파일 기다리느라.” 채린은 낮에 검토본을 공유하겠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완성하고 보내려고 미뤘다. 미완성인 채로 부탁하면 남의 일까지 늘리는 것 같았다.“거의 됐어요.” 수정이 노트북 시계를 봤다.“그 말 듣고 3시간 지났어.” 채린은 반박하려다 파일 목록을 돌려 보여 줬다. 수정은 의자를 끌어 앉지 않고 선 채로 첫 장을 읽었다.“이 안이면 지우 씨가 내일 뭘 말해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어?”“걔는 아직 거래처 앞에 세우기 어려워요.”“네가 쓴 초안 때문에 겁먹었는데, 그걸 네가
채린은 메일을 닫지 않은 채 가방을 들었다.“밥은 먹고 올게요.” 이헌이 대본에서 고개를 드는 표정을 보니 지금이라도 식사를 취소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고, 채린은 감사 대상 명단이 떠 있는 모니터를 끄고 문을 열었다. 굶으면 억울한 말부터 더 쉽게 나왔다.식당까지는 가지 못했다. 대표 비서가 로비에서 두 사람을 불렀고, 장태경이 잠깐 보자고 한다는 말에 채린은 이헌에게 먼저 내려가 달라고 했다.“잠깐이 몇 분인데요?”“이번 건 저도 모릅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은 빈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식사 약속 하나를 지키는 데도 회사 전체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대표실 탁자에는 라운 광고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감사 예고 메일은 출력되지 않았다.“분쟁부터 끝내자. 그러면 민석 이사한테도 내가 말할 수 있어.” 태경이 빈 의자를 가리켰다. 채린은 앉기 전에 물었다.“재무팀 접속 경위는 확인됐어요?”“그건 별도로 보겠지.”“저희 관리 실패는 지금 감사하고, 그쪽은 별도로요?” 태경은 펜을 내려놓았다. 부드럽던 목소리에서 온도가 빠졌다.“광고주가 손실 처리해 달라고 들어오면 이쪽에서도 책임을 정해야 해. 네가 합의해 오면 정보 관리 건은 개선 조치로 끝내도록 막아 줄 수 있다고.” 채린은 계약서를 펼쳤고, 추가 촬영 조건은 여전히 빈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전에 얼마
“재무팀에서 쓴 적이 있어요.” 서진의 목소리는 수화기 안에서 작았다.“임원 보고에 넣을 파일을 바로 확인해야 한다고 해서요. 권한 신청하면 늦는다고, 잠깐만 제 계정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어요.” 채린은 책상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고, 누가 시켰느냐고 묻는 말이 너무 빨리 튀어나올 것 같았다. 먼저 지금도 접속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물었다.“비밀번호를 바꿔 놓지는 않았어요.”“알겠어요. 기록 지우지 말고, 주고받은 연락은 그대로 두세요. 접속 차단은 담당자에게 요청할게요.”그날 밤 채린은 정보 담당자에게 계정 보호 조치를 맡기고 집으로 갔다. 의자에 더 앉아 있으면 밝혀질 일이 아니었는데, 잠들기 전까지 서진이 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다음 날 아침, 서진은 평소보다 일찍 와 있었고, 채린은 문 앞에서 서류를 받지 않고 면담실로 함께 갔다. 수정도 자리했다.“그 파일을 밖으로 보냈어요?”“아니요. 전 보고자료 출력 요청인 줄 알았어요. 열어 볼 수 있는 계정이 제 것밖에 없다고 해서…….”서진은 메시지를 보여 줬다. 재무팀 직원이 임원 보고 시각을 적어 보냈고, 접근 권한 처리를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채린의 초안을 특정해 달라는 문장은 없었다. 보고용 폴더 안에서 어떤 파일을 열었는지는 추가로 확인해야 했다.“전달받은 사람이 그 글을 올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수정의 말에 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이름 대
“그거 초안이에요.” 채린은 지우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말했다.회의실 문 앞에 선 지우는 휴대폰을 내리지 않았다. 화면에는 보고서가 떠 있었고, 채린이 직접 쓴 문장, 직접 정한 제목, 아직 남겨 둔 이름이었다.“수정하려고 했어요. 배포할 문서가 아니고요.”“본부장님이 쓰신 건 맞죠?” 채린은 입을 다물었고, 유출됐다는 사실을 설명하면 문장의 잘못까지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지우가 묻는 것은 경로가 아니었다.“맞아요.” 대답하자 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안도한 모양은 아니었다. 더 확인할 것이 없어졌을 때의 움직임이었다.채린은 옆에 놓인 의자를 당겼다. 지우는 앉지 않았다.“지금 이야기하는 게 괜찮아요? 내일 해도 됩니다.”“지금 듣고 싶어요.” 그가 문을 닫았고, 채린은 노트북 덮개를 내렸다. 정정문도, 이 일에 대한 결론도 아직 쓰지 않은 상태로 마주 앉았다.“제가 승인 없이 답해서 일이 시작된 건 맞습니다. 그건 아니라고 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지우가 말했다.“그런데 이번에 못한 사람으로 정리되면, 다음번에도 현장에 나갈 수 있습니까?”채린은 당연하다고 답하려다 멈췄다. 인사 결정은 아직 하지 않았다. 지우가 원하는 말을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 섣불리 보장했다가는 또 자기가 모든 결과를 떠안게 될 터였다.“잘못한 범위를 확인하고 필요한
다경의 계정은 비공개로 바뀌어 있었다.이미 저장된 사진은 그대로 돌아다녔다. 예전 행사장에서 지우와 찍은 단체 사진, 회사 이름이 보이는 출입증, 가족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계정까지 화살표로 이어져 있었다.채린은 화면을 끄고 다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은 받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숨소리만 들렸다.“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제가 사진 찍은 건 맞다고 말하면 끝나요?” 채린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끝난다고 말하면 쉬웠다. 그 말을 믿고 얼굴을 내놓은 뒤에는 주워 담을 수 없었다.“끝난다고 약속은 못 하겠어요. 지금은 공개 답변하지 않아도 됩니다. 원하시면 이름과 가족 사진 내려 달라는 요청부터 도울게요.”다경은 자기 사진보다 옆에 찍힌 친구들의 얼굴을 먼저 가려 달라고 했다. 채린은 링크를 보내 달라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이미 자신이 보고 있었다.“저희가 목록 만들고, 다경 씨는 빠진 것만 확인해 주세요.” 수정은 화면을 두 개 열고 삭제 요청을 나눴다. 지우가 아는 계정들에게 직접 따지러 가겠다고 하자 채린은 댓글부터 달지 말고 게시 주소를 모아 달라고 했다. 지우는 손을 쥐었다가 풀었다.“저랑 같이 찍힌 사진 때문에 더 찾기 쉬웠을 거예요.”“찍힌 사람들한테 연락은 하되, 지우 씨가 전부 해명하겠다고 약속하지는 마요.”그 말은 자신에게도 필요했다. 채린은 다경에게 법률 상담을 연결해 줄 수 있다고 덧붙였지만 당장 공개 대응을 맡기라고
견적서에는 ‘집중 대응’이라는 항목이 세 번 나왔다.채린은 세 번째 줄까지 읽고 금액보다 기간을 먼저 봤다. 사흘. 그 안에 검색 결과와 기사 분위기를 정리하겠다는 제안이었다.“지우는 데 돈이 드는 겁니까, 새로 쓰는 데 드는 겁니까?” 세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둘 다 필요할 수 있죠. 지금은 사실 하나를 바로잡는다고 관심이 없어지지 않으니까요.”그 말은 맞았다. 채린은 영화 사건 뒤 며칠 동안 같은 삭제 요청을 반복했고, 사실이 전달되는 속도와 잘못된 설명이 사라지는 속도는 달랐다.광고주 담당자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배우 이미지도 캠페인에 중요하니까, 회사 쪽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채린은 사진 전달 대화를 그 앞에 놓았다.“그 전에 직원분이 사진을 받은 뒤 어디로 보냈는지 답해 주세요.” 세라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곧 부드럽게 웃었다.“제작사에서 상황 확인을 부탁했어요. 대외 대응 담당자에게 온 자료를 받는 건 이상하지 않죠.”“받은 다음이요.”“내부 확인 중입니다. 최초 게시 계정까지 저희가 관리하는 건 아니고요.” 답을 줄 수 없는 일은 짧았고, 돈을 받으면 해 주겠다는 일은 견적서 몇 장을 채웠다. 채린은 금액이 적힌 쪽을 넘기지 않았다.채린은 더 밀어붙이고 싶었다. 시상식, 사진 배포, 이번 광고. 같은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