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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첫 번째 정시 퇴근 실패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2:35:39

잠에서 깼을 때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아니라 수정의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일어나면 연락. 회사 오기 전에 일부터 하지 말고.

메시지를 다시 읽으며 메일로 가려던 엄지를 멈췄다. 침대에서도 출근할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 잘 알 필요까지 있나.

그래 놓고 결국 업무용 메일부터 열었다. 수정이 질문을 확인했고 채원도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오전 인터뷰가 예정대로 진행 중이라는 보고였다.

다음 보고에 따르면 백민우 관련 조사 절차가 시작됐고, 제출된 메시지의 작성 경위와 반입 물품은 아직 확인 중이었다. JS엔터가 내놓은 답변은 개인적으로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짧은 말뿐이었다.

답장을 쓰는 동안 오자가 3번이나 났다. 채린은 결국 글로 버티기를 포기하고 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오후에 갈게.”

“오후에 와서 뭘 하려고?”

“서명할 게 있어.”

“전자 결재 되는 것과 내일까지 기다릴 수 있는 것밖에 없어.”

“그래도…….”

“침대에서 말하면 목소리가 더 멀쩡해지는 줄 아냐.” 채린은 이불을 무릎까지 끌어올렸다. 들킨 것 같아 짜증이 났다가, 들키지 않았다면 벌써 옷을 입었을 자신이 더 짜증 났다.

점심을 먹고 한숨 더 잔 뒤에야 머릿속이 조금 맑아졌다. 해 질 무렵 사무실에 들를 수 있었던 건, 수정과 남은 일만 확인하고 바로 나온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뒤였다.

본부장실은 돌아왔던 순간과 비슷했다. 의자, 모니터, 창밖 교차로. 채린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올렸다.

오후 5시 50분이 되자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때와 같은 자리에 앉아 돌아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떨리는 손으로 시간을 확인해 봐도, 창밖의 차들은 한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1분이 지났다.

예약 버튼도 아닌데 시각부터 맞추고 있다니. 채린은 피식 웃었다. 무엇 때문에 돌아왔는지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수첩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 앉는 것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

무슨 실험을 계속할 힘도 없었다. 그녀는 수첩을 서랍에 넣고 잠갔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이헌이 채린을 발견하자 걸음을 멈췄다.

“또 출근했어요?”

“잠깐 왔습니다.”

“회사에 귀신이라도 두고 갔나.” 채린은 잠긴 서랍에서 손을 뗐다.

“재킷은 세탁 맡겼어요. 나오면 전달할게요.”

“그 얘기 하러 온 거 아닌데.” 문에 기댄 이헌이 대본을 조금 들어 보였다. 위층에서 다음 광고 콘티를 보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고도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도 나가요. 태워 줄 수는 있는데, 혼자 가고 싶으면 기사만 연결해 줄게요.”

“배우님 일정은 안 바쁩니까?”

“끝났어요. 5분쯤은 기다릴 수 있어요.”

“그 5분은 제가 드릴 게 아니라서요.”

“오늘은 내가 쓰는 거예요.” 거절하려던 채린은 병원 앞의 택시 호출 화면을 떠올렸다. 작은 글씨가 흐려져 몇 번이나 들여다봤었다. 오늘 조금 나아졌다고 다시 혼자 버틸 자신까지 생긴 건 아니었다.

“오는 길 많이 돌아가시는 거면…….”

“주소를 아직 안 말했는데.”

“아.” 이헌이 웃는 바람에 더 서둘렀는지 외투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채린이 고개를 들자 그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러 못 본 척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건 잘할 자신 있는데. 방금 나한테 물어봤잖아요.”

“그럼 제 질문도 못 들은 척해 주세요.”

“그건 자신 없는데.” 그가 돌아선 사이 채린은 단추를 다시 끼웠다. 외투를 여미고 따라 나서려는데 수정이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내일 볼 거.”

“왜 지금 줘?”

“집에 가져가지 말라고 책상에 놓으려고.” 수정이 파일을 내려놓자 표지를 읽으려던 채린은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이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책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쪽으로 걸었다.

오후 6시 3분. 딱 3분 늦었다.

이 정도면 정시 퇴근이라고 우겨도 되지 않을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이 조금 우스워 보여 채린은 입가를 만졌다.

휴대폰이 울렸다.

블러드 러너 배급사 홍보 담당자였다. 화면에 표시된 영화 제목만으로도 미뤄 둘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본부장님, 류진혁 씨 지금 연결되세요?”

“무슨 일입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취소 문의가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교통사고 현장 사진이 돌고 있어요. 뺑소니라고요. 진혁 씨 차라는데.”

이헌을 돌아보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그는 열림 버튼을 다시 누르는 대신 채린의 답을 기다렸다.

“사진부터 보내 주세요. 진혁 씨는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오늘도 퇴근은, 입 밖에 꺼내기 전에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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