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청하는 성유리를 나무라지 않았다.그저 그녀의 손을 가볍게 한 번 쥐고는 웃으며 말했다.“그래. 먼저 올라가서 쉬어.”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었다.하지만 집에는 늘 그렇듯 도우미들이 있었고 그녀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방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예전 성유리가 두고 간 물건들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듯 그대로였다.눈에 익숙한 모든 것들, 그런데도 성유리는 이곳에서 ‘집’의 따뜻함 같은 걸 느낄 수 없었다.침대에 한동안 누워 있던 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박한빈에게 보낼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성유리가 먼저 그에게 연락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사실 연락할 이유는 이미 없었다.박한빈의 긴 침묵은 이미 성유리에게 모든 대답을 해준 셈이었으니까.그렇지만 오늘 있었던 일들이 성유리에게 한 가지를 다시 일깨워주었다.앞으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적어도 그들 사이의 관계는 외부에 명확히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자신을 박한빈의 ‘장모’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니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직접 그녀의 부모님께 상황을 설명해 주길 바랐다.왜냐하면 똑같은 말을 자신이 한다면 부모님은 또다시 그녀가 고집을 부린다며 몰아붙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박한빈은 달랐다.그가 말한다면 부모님은 단 한마디 항의도 하지 못할 것이다.그런데 메시지를 다 써놓고 보니 왠지 모르게 너무 냉정하고 딱딱한 문장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마치 자신이 그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성유리는 차마 보내기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그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조금 전 그 북적이는 분위기를 떠올리니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쓸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바로 그때였다.문밖에서
박한빈은 사람을 시켜 성유리를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그날 이후 한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을 다시 볼 수 없었다.성유리는 생각했다.아마 그날 밤 자신이 한 말이 박한빈에게 겁줬거나 아니면 정신을 차린 걸 수도 있다고.자신 같은 사람에게 얽히는 건 사실 꽤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었다.왜냐하면 성유리가 원하는 것은 박한빈의 돈도, 지위도 아니었고 바라는 건 그저 한 사람의 진심뿐이었다.하지만 박한빈 같은 사람에게 감정이란 건 사실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는 결코 한 여자에게만 충실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날 밤 다른 사람들의 ‘오픈 마리지’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성유리가 원하는 삶은 박한빈의 이상적인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그러니 박한빈이 자신을 멀리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가끔 성유리는 재무 관련 뉴스를 통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 역시 뉴스를 보는 대중과 다를 바 없었다.그럴 때만 박한빈의 근황을 알 수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모든 것이 마치 예전처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이로 되돌아간 듯했다.그들 사이에는 이제 ‘약혼자’라는 이름만이 공허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그리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이번 겨울방학은 성유리에게 있어 마지막 방학이기도 했다.윤청하는 보름 전부터 성유리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라고 성화였고 여러 가지 일정을 준비했으니 반드시 집에 와야 한다고 했다.성유리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게 온갖 인맥 관리와 접대 모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가고 싶지 않아 별의별 핑계를 만들어 시간을 끌었다.그러다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자 결국 짐을 싸서 집으로 향했다.집에 들어선 성유리는 집 안이 유난히 북적이는 걸 느꼈다.거실은 이미 완전히 손님맞이 공간으로 변해 있었고 낯설거나 익숙한 얼굴들 십수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성유리가 들어서는 순간, 마침 누군가 윤청하와
성유리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박한빈은 코웃음을 치듯 가볍게 웃었다.“옥지나 씨가 사진까지 보내줬는데 아직도 모르겠습니까?”“저희를 갈라놓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에 맞받아쳤다.“하지만 저희는 분명히...”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박한빈은 매서운 눈빛으로 성유리에게 쏘아봤다.마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짐작한 듯.하지만 성유리는 멈추지 않았다.“사실 괜한 걱정을 한 거예요. 두 사람이 이런 짓을 안 했더라도 저희가 정말 잘될 수 있었을지는... 모르니까요.”박한빈이 이런 이야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성유리는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렇지만 박한빈은 그 작은 목소리조차 놓치지 않았고 성유리의 턱을 꽉 잡으며 물었다.“지금 뭐라고 했죠?”“제가 틀린 말 했어요?”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사실이잖아요. 지난번 일 이후로 지금까지... 박한빈 씨는 저한테 한 번도 분명한 대답을 준 적 없어요. 그럼 저는 어떻게 생각하겠어요?”박한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고.”“그건 박한빈 씨 아버님의 유언 때문이잖아요. 그게 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는 거, 저도 알아요.”“그래도 당신처럼 계속 도망치려는 것보단 낫잖아요.”“저는 도망친 거 아니에요. 그냥 무서울 뿐이지...”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박한빈 씨는 거짓말로도 제가 좋다는 말 한마디 안 해주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어떻게 박한빈 씨랑 결혼을 해요?”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듣고 싶은 겁니까?”“그게 사람 마음 아닌가요? 누가 듣기 좋은 말을 싫어하겠어요?”“성유리 씨는 저한테 원하는 게 많은데 정작 본인은 저한테 어떻게 하고 있는지 생각은 해봤어요?”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박한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시선을 서서히 떨궜다.그러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침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곧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그는 내용을 확인할 새도 없이 바로 핸드폰을 성유리에게 내밀었다.성유리는 이를 꽉 깨물었다.아무리 인내심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박한빈이 방금 쏟아낸 독설을 들었다면 기분 좋을 리 없었기에 그가 핸드폰을 건넬 때 성유리는 보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대신 핸드폰 잠금을 풀고 화면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줬다.사진 속에는 성유리와 백지환이 함께 찍힌 모습이 가득했다.몇 장은 각도 탓인지 두 사람이 아주 친밀해 보였고 예전 연애하던 때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성유리는 사진을 보며 표정이 살짝 변했다.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번쩍 뜨고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설마... 저를 몰래 감시하신 거예요? 사람까지 붙여서?”성유리는 원래 박한빈을 나무랄 작정이었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뚝 끊었다.“누가 메시지를 보낸 건지 보고 싶습니까?”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았다.옥지나.그녀의 이름을 본 성유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물었다.“이게 무슨 뜻이죠? 저를 따라다니던 사람이 옥지나 씨라고요? 도대체 왜...”말을 이어가려던 성유리는 갑자기 생각난 게 있었는지 말끝을 흐렸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고 코웃음을 쳤다.“왜 말을 끝까지 안 하십니까? 계속 말해 봐요.”성유리는 그의 비아냥거림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박한빈 씨 말은... 둘이 이미 작전을 짜고 저한테 다가온 거고 백지환도 일부러 제 앞에서 불쌍한 척하며 사진 찍히게 한 거라는 거죠? 그리고 그걸 박한빈 씨가 보라고 보낸 거고?”성유리의 질문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이 정도는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아직 그렇게 멍청하진 않다는 증거군요.”성유리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이빨을 꽉 깨물었다.“아직도 백지환 그 인간이 불쌍한가요?”순간, 옥지나가 몇 개 더 메시지를 보냈다.그건 분명 박한빈에게 성유리 같은 변덕
성유리는 짜증이 나 얼굴을 찌푸린 채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휴대폰을 되찾으려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받지도 않고 그냥 꺼버리더니 성유리의 휴대폰을 밖으로 던져버렸다.그 행동이 너무나 단호하고 신속해서 성유리는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곧 박한빈은 앞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계속 운전하시죠.”운전석에 앉아 있던 서훈은 처음부터 긴장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의 명령을 듣고서야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성유리는 잠시 얼어붙었다가 문득 깨달았다.‘방금 던진 거... 내 휴대폰이잖아!’“멈춰요!”그녀는 급히 외치며 문손잡이를 잡으려 했다.그렇지만 박한빈은 재빨리 성유리를 끌어당겨 다시 제자리에 앉혔다.성유리는 그렇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의 무릎 위에 앉아버렸다.“놔줘요!”그녀가 몸부림치려 했지만 박한빈은 손을 쭉 뻗어 갑자기 성유리의 목덜미를 단단히 잡았다.그 동작은 마치 오랫동안 숨어 있던 맹수가 마침내 송곳니를 사냥감의 치명적인 곳에 대는 것처럼 단호했다.아마도 전에 이미 예감이 있었던 듯했다.그래서 성유리는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다만 반항하려던 몸짓이 순식간에 멈추었고 이내 박한빈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길가 풍경은 빠르게 지나갔고 빛이 그의 깊은 눈동자에 떨어졌지만 그 속엔 따뜻함이라곤 전혀 없었다.그저 차가운 냉기만 맴돌 뿐.“왜죠?”침묵하던 박한빈이 물었다.“네?”성유리는 애써 침착하려 애썼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물었다.“저는 성유리 씨가 원하는 걸 안 줬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요구를 못 맞춰 줬나요?”“제가 시간이 아주 많다고 생각하십니까?”“그 백지환이라는 놈은 제 눈에 그저 파리 한 마리 같은 존재입니다. 성유리 씨를 위해서 제가 얼마나 신경 써서 사과하게 만들고 해명하게 하고... 백지환이 손댄 모든 프로젝트의 꼼수를 조사까지 하게 했는지 아십니까?”“이런 거 하면서 제 시간과 에너지를
성유리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다가 무슨 우스운 얘기라도 들은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지금 저더러 백지환 씨를 봐주라는 말인가요?”“네. 지금 걔는...”“제가 왜 봐줘야 하는데요?”박한빈이 성유리의 말을 딱 잘랐고 그 한마디에 그녀의 말문은 막혀버렸다.“제가 백지환 씨한테 뭘 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본인이 벌인 짓 때문에 저 사달이 난 거 아닌가요? 굳이 따지자면 자업자득이죠.”“그리고 지금이라도 나가서 평범한 일자리 구해서 돈 벌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텐데 백지환 씨는 대체 뭘 더 바라는 겁니까?”“보아하니 제가 너무 봐줬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런 헛된 희망을 품고 있겠죠.”박한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비웃듯 미소 지었다.그 표정을 본 성유리는 문득 무언가 깨달은 듯, 다급히 물었다.“뭐 하시려는 거죠?”박한빈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다만 성유리의 손목을 꽉 쥐고 있던 손을 풀고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그래서 성유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박한빈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지금 뭐 하시려고요? 꼭 그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여야 돼요? 지금 저렇게 된 것만으로도 벌 충분히 받았잖아요!”성유리의 반박에 박한빈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그리고 그는 뒷좌석에 앉은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저한테 뭐라고 하는 겁니까? 제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저는 박한빈 씨한테 그렇게 하라고 한 적 없어요!”성유리가 홧김에 내뱉은 말에 차 안은 물 뿌린 듯 고요해졌다.사실 성유리는 순간 욱하는 마음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막상 박한빈의 시선을 마주하고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다.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눈을 똑바로 뜨고 박한빈과 마주 앉아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볼 근육까지 당겨지는 그 웃음은 눈부실 만큼 잘생겼다.그 웃음은 분명 예뻤다.하지만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