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원래 성유리를 먼저 도연제로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성유리를 회사로 데려갔다. 성유리가 지화 그룹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박한빈이 손을 잡고 당당하게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박한빈의 이런 행동 때문에 회사 안 곳곳에서 직원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하지만 박한빈의 권위 때문에 대놓고 보지는 못하고 대부분 은근슬쩍 성유리를 훔쳐보는 정도였다. 성유리는 이런 시선이 불편해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더 세게 손을 잡았다. 대중 앞에서 그와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일 수 없어 결국 성유리는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그의 뒤를 따라 박한빈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박한빈이 김서영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건 핑계가 아니었다. 며칠간의 출장으로 밀린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끝없는 회의가 이어졌다. 성유리는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피곤한지 사무실 소파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게다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회사까지 억지로 데려온 상황이니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누웠고 바로로 잠이 들었다. 사실 성유리는 예전에도 회사에서 바쁜 날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곤 했다. 하지만 박한빈의 사무실 소파는 훨씬 편안했고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낯선 공간이 보이자 성유리는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여기가 박한빈의 사무실이라는 걸 떠올렸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옆에는 스탠드 조명 하나가 켜져 있었다. 성유리의 몸 위에는 누군가 덮어준 담요가 있었는데 박한빈이 돌아왔다가 다시 나간 것인지,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담요를 덮어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자고 일어나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던 성유리는 소파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먹을 것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이미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이었지만, 비서실에는 여전히 불이 환
박세빈의 얼굴은 박한빈과 거의 똑같을 정도로 많이 닮아 있었다. 체구는 물론 이목구비마저도. 오늘 그가 입은 흰 셔츠는 깔끔하면서도 단정해 보이는 디자인이었는데 넥타이는 없었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접혀 있었으며 손목에는 다소 오래됐는지 가죽 밴드가 다 닳아 있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박세빈은 언제나처럼 다정다감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계속 말했다. “아까 슬쩍 지나가면서 봤는데 확신이 안 서서 인사를 못 드렸네요. 어떻게 혼자 여기 계십니까?” “그냥... 산책 중이에요.” 박세빈과 성유리는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성유리는 지난번 박한빈의 본가에서 있었던 어색했던 상황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박세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저녁은 드셨습니까? 형님은 회사에 돌아간 뒤로 계속 회의 중이라서 형수님을 챙길 시간이 없으셨을 것 같은데요?” 성유리는 저녁을 먼저 먹었다는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 허나 입을 떼기도 전에, 배에서 먼저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박세빈은 성유리 배에서 나는 그 소리를 들었고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에 성유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웃던 박세빈은 금세 정신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저녁을 사 드릴까요? 마침 이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하나 있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성유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냥 제가 알아서 간단히 먹으면 돼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곧바로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박세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성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성유리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박세빈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불편함에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그러나 잠시 후, 성유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휙 돌아보았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성유리는 방금 전 느꼈던 누군가의 시선이 단순한 자신의 착각이었을
박세빈의 반응은 아주 재빨랐다. 박한빈이 다가오는 순간, 그는 성유리를 부축하고 있던 손을 빠르게 떼버렸다. 성유리는 방금 전까지 몸의 무게를 박세빈의 팔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손을 떼자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나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거칠게 성유리의 팔을 붙잡고 단숨에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형, 그런 게 아니라...” 박세빈이 서둘러 박한빈에게 말했다. “방금 전 형수님이 분수 때문에 놀라서 가만히 있기에 옷이 젖을까 봐 제가 잠깐 잡아드린 것뿐이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성유리를 쳐다만 보았다. 박한빈의 표정은 성유리가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심지어 과거 연정우를 마주했을 때조차 이런 표정을 짓지는 않았었다. 성유리는 곧 이 상황의 다른 면을 깨달았다. 눈앞의 사람이 바로 그의 이복동생이자 얼마 전 김난희에게서 5%의 지분을 받아 지화 그룹에 정식으로 합류한 박세빈이라는 사실 말이다. 지금 박한빈이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박한빈은 박세빈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저 한 번 그를 흘겨본 뒤, 성유리를 감싸안고 빠르게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한빈의 걸음은 어찌나 빠른지 성유리는 몇 번이나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분명 그들 주변에는 회사 직원들과 비서들이 함께 있었지만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춘 뒤로는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성유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박한빈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손에 힘을 더 세게 주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성유리에게 물었다. “너 방금 전에 걔랑 무슨 얘기 했어?”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뭘 얘기했겠어요?”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그렇게 서로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한 거야?” 박한빈은 또다시 떠오른 기억 때문인지 화가 다시 치밀어
폐쇄된 공간인 엘리베이터에서 성유리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박한빈의 귀에 들렸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입을 꾹 닫아버렸고 그녀는 그 틈을 타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박한빈과 한 걸음 떨어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는 아무것도 잡혀있지 않는 자신의 손을 쳐다보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야.” 단순하고 짧은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성유리는 당연히 박한빈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필경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야말로 진심일 테니까. 박한빈의 눈에 자기는 그저 낚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성유리는 잊지 않았다. 이런 일은 한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심지어 박한빈은 전에 지석민과 있었던 일들도 꺼내 자신을 모욕한 사람이니 성유리는 이제 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띵! 이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먼저 나랑 같이 나가자.” “됐어요. 저 그냥 갈래요.” 성유리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으며 대답을 이어갔다. “여기 있어도 심심해요. 이럴 바에는 집에 가서 자는 게 더 좋잖아요.” “아직 일이 좀 남아서 그래. 다 하면 같이 가자.” “싫어요. 저...” 성유리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박한빈 씨! 당장 저 내려놓으세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층은 지화 그룹의 제일 위층이었다. 박한빈의 사무실을 제외한 총비서실이 있는 층이기도 하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들쳐 업은 채로 내리자 비서실에 있던 사람들은 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유리는 그들이 보내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고 순간 저항할 힘도 생기지 않아 그대로 박한빈과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사무실 문이 닫히자 박한빈은 성유리를 소파에 강제적으로 앉히더니 그녀를 자기 몸으로 깔았다. 금방 밥을 먹은 성유리는 위가 무거운 박한빈의 몸에 깔리자 담방이라도 토할
박한빈은 성유리를 멍해서 쳐다보다가 그녀가 구토를 다 하자 물 한 잔을 따라 건네주었다. 성유리는 물을 건네받으면서도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병원 데려다줄까?” 박한빈은 갑자기 구토하는 성유리를 보고 놀랐는지 잔뜩 긴장하며 물었다. 성유리는 물로 입을 헹구고는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근데...” 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째려보며 되물었다. “아까 저를 들쳐 업지 않으셨다면 제가 토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안 그래요?” 박한빈은 성유리와 같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는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업무 더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말을 마친 성유리가 몸을 일으켜 떠날 채비를 하자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오래 안 걸릴 거야.” 성유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사무실 책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박한빈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마음먹었다. 박한빈은 이메일 두건과 몇 개의 계획안을 검토하고는 사인을 했다. 그중 하나의 서류에 문제가 생겼는지 박한빈은 당장 사람을 불러냈다. 성유리가 아직 기다리고 있기에 마음이 급한 박한빈은 잘못을 낸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잔뜩 화를 냈고 상대는 머리를 숙인 채 고개만 끄덕였다. 박한빈은 계획안을 상대에게 휙 던져버리며 소리를 질렀다. “다시 검토하고 올려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다시 검사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서류를 건네받고 사무실을 빠르게 떠났고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호되게 혼나던 사람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상대는 지화 그룹 프로젝트 부의 총대표이자 인주 프로젝트를 할 때 성유리와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사람이다. 그는 성유리 앞에서 늘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기에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저트 가게 앞을 지나던 중, 갑자기 차를 멈췄다. 성유리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했지만 처음에는 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케이크를 건네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뗐다. “저 안 먹어요.” “조금만 먹어봐.” “게다가 이거 정말 맛있어 보이지 않아?” 박한빈은 성유리를 어린아이 달래듯 먹어보라고 연신 권했다. 성유리는 정교하고 독특한 디자인의 케이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박한빈 씨가 드시면 저도 먹을게요.” 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보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에 대해 아는 것 중 몇 가지는 틀릴 수도 있지만, 입맛만큼은 확신이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디저트를 가장 싫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가 평소에는 심지어 우유조차 잘 마시지 않는 것 또한 성유리는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먹어보라고 말을 했고 그가 절대 먹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케이크를 다시 밀어내려던 찰나, 박한빈이 느닷없이 말했다. “좋아. 네가 먹여주면 나도 먹을게.” 그의 대답에 성유리는 순간 당황했다. 그 틈을 타 박한빈은 케이크를 그녀 손에 쥐여주고는 차에 시동을 걸며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운전 중이라 먹기 불편해서.” 성유리는 그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방금 그들의 대화가 초등학생처럼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묘한 복수심이 마음속에서 꿈틀댔다. “좋아요.” 그녀는 박한빈에게 먹여주기로 마음을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빈이 산 케이크는 망고 맛의 두 층짜리 케이크로 두툼한 생크림이 얹어져 있었다. 성유리는 포장을 뜯고 식기를 꺼내 큰 한 숟갈을 떠서 신호가 빨간불로 바뀐 틈에 박한빈의 입 앞으로 마구 들이밀었다. “자, 드세요.” 박한빈은 케이크를 내려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나 질식시키려고 작정한 거 아니야? 살해 시도인가?” “보기에만 커 보
성유리가 방금 전의 놀라움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키스를 해왔고 순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살짝 열린 입술은 박한빈에게 기회를 주었는지 그의 입안에는 아직 케이크의 달콤한 향이 남아 있었다. 진한 망고 향이 성유리의 입안을 가득 채우자 그 달콤함 때문인지 그녀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가만히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한참 후에야 박한빈이 몸을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왜 가만히 있어?” 박한빈은 아주 가까이에서 성유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깊고 선명한 눈동자 안에 성유리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성유리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대답했다. “케이크 떨어질까 봐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성유리의 손에 여전히 케이크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한빈은 분명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맛은 어때?” 박한빈이 물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물음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되물었다. “저 망고 알레르기 있는 거 몰라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한빈의 안색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은 불과 2초 정도였고 박한빈은 곧 다시 정신을 다잡으며 말했다.“거짓말이지?” “뭐라고요?”“너한테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잖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를 속인 것이 맞았다. 원래는 박한빈의 놀란 얼굴과 미안해하는 모습을 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이번에는 박한빈이 오히려 성유리의 표정을 쳐다보는 쪽이 되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잠시 쳐다보다 웃으며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 거죠?” 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됐으니까 빨리 운전이나 해요. 저 집에 가서 더 잘 거예요.”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의
허나 지금의 박한빈은 혼자 자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심지어 성유리를 꼭 끌어안고 있어야만 잠들 수 있었다. 때때로 그녀가 한밤중에 박한빈의 팔을 밀쳐내고 침대 반대편으로 이동하면 박한빈은 곧바로 놀라 깨어났고 다시 성유리를 꼭 품에 안아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날 밤, 박한빈은 한 번도 깨지 않고 단숨에 아침까지 쭉 잤다. 6시간 동안의 숙면은 그에게 충분했고 성유리 역시 여전히 그의 품 안에 있었다. 성유리의 잠든 얼굴은 순진하고 평온해 보였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내려앉고 입술은 꼭 다물고 있었으며 얼굴엔 잔머리 몇 가닥이 붙어 있었다. 박한빈은 손을 들어 다정다감하게 붙어있는 잔머리를 치워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어서 그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향했다. 성유리가 눈을 뜰 때쯤에는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박한빈의 손은 성유리의 종아리를 잡고 있었고 그녀가 깨어난 것을 알아차린 박한빈은 살짝 웃으며 몸을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려 했다. 그러나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박한빈은 그녀가 무엇을 꺼리는지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웃기만 할 뿐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귓불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 사이 분위기가 더 무르익는 순간, 갑자기 아래층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저택 안의 다른 사람들은 이미 박한빈이 돌려보냈기에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이 있다면 직접 내려가 열어야 했다. 그 말인즉 박한빈 혹은 성유리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초인종은 계속 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한빈의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지만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듯 성유라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성유리가 못 참고 박한빈을 먼저 밀치며 말했다. “안 일어나요?” 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쳐다보다가 마치 재촉하듯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결국 체념한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운을 주워 입은 그는 곧바로 문 앞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