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지는 홍지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대답을 이어갔다.“그리고 오늘은 그저 평범하게 다 같이 차나 마시며 간단한 일상 대화를 나누는 날이에요.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눌 장소가 아니고.”“그럼 저희 다시 날 잡고 얘기 나눌까요?”홍지은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며 신영지에게 물었다.“연락처가 어떻게 되세요? 통화가 불편하시면 문자라도...”신영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사람이 먼저 말했다.“아이고. 곧 사진 찍는데 두 분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세요? 저기 키 크신 분, 뒤에 분 막으셨어요. 뒤로 가서 서세요.”그 사람이 말한 키 큰 분은 바로 홍지은이었다.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지만 옆에 사람들이 하나둘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사진은 금방 찍었는데 홍지은은 자신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표정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러나 당연하게도 홍지은의 상태가 어떤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신영지는 홍지은에게 연락처를 주지도 않았고 캐톡 친구를 추가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사진을 다 찍고 나서 바로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로 인해 며칠간 할 말을 준비한 홍지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모임 장소인 찻집에서 나온 홍지은은 남편이 이미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때? 신영지 씨는 봤어? 말은 걸었고?”딱 봐도 야윈 남자가 홍지은에게 다가와 문을 열어주며 묻자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말하긴 뭘 말해? 오늘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말도 안 걸어준다고.”“그래? 그럼 어떡하지? 공장 일... 마땅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면 정말 끝이야.”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홍지은에게 계속 물었다.“넌 다른 생각을 해볼 생각도 안 하는 거야?”“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데?”홍지은은 남자의 말에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네가 남자잖아!
홍지은과의 우연한 만남은 성유리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만약 오늘 하늘이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성유리가 급히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마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전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 하늘이기에 성유리는 아이가 작은 병에 걸리기만 해도 극도로 긴장됐다.다행히 오늘 의사가 그저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뿐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성유리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그러던 중, 홍지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밥이나 먹을까?”성유리는 그녀의 제안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필경 두 사람 사이는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홍지은은 눈치가 없는 건지 계속 성유리에게 말했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지. 근데 그거 다 성유정한테 속은 거야. 나도 나중에 알아차렸어. 그때... 너한테 못 할 짓을 했다는 걸.”“그래서 정식으로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홍지은의 사과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성유리는 마땅히 거절할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제가 요즘 많이 바빠서요.”“그냥 밥 한 끼 먹는데 그렇게 오래 안 걸리잖아.”홍지은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유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말을 내뱉었다.“아니면... 내가 그렇게 싫어? 밥도 같이 먹기 싫을 정도로?”“아니요. 너무 멀리 가셨네요.”성유리가 차분한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을 이어 나갔다.“전 홍지은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같이 밥 한 끼 먹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정말 없기 때문에.”“다른 일 없으시면 먼저 끊을게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는데 다행히 홍지은에게서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성유리는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바꿔놓고 하늘이의 옆에 살며시 다가가 누웠다.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 잠에 든 적이 없는 성유리지만 아이는
박한빈은 성유리가 보내는 무언의 “나무람”을 못 본 척하며 온도계를 다시 손에 넣었다.“음, 확실히 열은 없네. 그냥 감기 초기 증상인가 봐.”박한빈은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뒤돌아 바로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그때, 아래층에 있던 도우미 한 명이 올라와 박한빈에게 말했다.“박 대표님, 손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박한빈은 그 말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누군데요?”“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분 성이 홍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모님과 친구 사이라고 하시던데...”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힐끔 쳐다봤고 그녀는 금세 찾아온 손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홍지은 씨?”“홍지은이 누구야?”박한빈의 물음에도 성유리는 침묵했다. 그러다 그녀의 눈빛을 발견한 순간, 그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는 홍지은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제야 떠올랐다. 그녀는 바로 전에 성유정이랑 잘 어울려 다니던 친구였다.이런 일은 이미 박한빈과 성유리 사이에서 잊힌 지 오래였기에 그는 홍지은이 이런 방식으로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홍지은 씨가 왜 너를 찾아온 거지?”박한빈은 얼른 화제를 돌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저도 몰라요.”“그럼 그냥 가라고 하자.”박한빈은 금세 결정을 내렸다.‘괜히 그때 일이 생각나게 하면 안 돼. 아니면 또 화낼 테니까.’그는 도우미에게 찾아온 손님을 떠나보내는 말을 했지만 돌아온 도우미는 많이 난감해하며 말했다.“그게... 손님께서 떠나기를 거부하십니다. 무조건 사모님을 만나 봬야 한다면서...”“게다가 임산부인 것 같습니다.”도우미의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하다 결국 한번 만나기로 결정했다.“제가 가볼게요.”“아니면 내가 갈까?”만약 예전 같았으면 박한빈은 바로 내려가 손님을 내보냈겠지만 행여나 전에 일들에 연루될까 아무런 행동도, 선택도 쉽사리 내리지 못했다.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 박한빈의 말에도 그녀는 침묵했고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바로 걸음
홍지은은 구렁이 담 넘듯이 능글맞게 핸드폰을 꺼내더니 성유리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셔터를 눌렀다.성유리는 셔터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홍지은과의 거리를 더 넓혔다.“아, 맞다. 어젯밤 제가 했던 말은 다 진심이었어.”홍지은은 원하던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난 뒤,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전에... 내가 너무 어려서 철이 안 들었나 봐. 게다가 그때는 나랑 유정 씨 사이가 꽤 괜찮았잖아?”“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유정 씨가 뭐라고 하면 그 말을 다 믿었어. 근데 누가 알기나 했겠어? 유정 씨가 그렇게 나쁜 *이라는 걸.”“뭐가 어떻게 됐든 내가 유리 너한테 큰 상처를 준 건 맞아. 그래서 진심으로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어. 정말... 미안해.”홍지은은 몸을 일으키더니 성유리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려고 허리를 굽혔다.그녀의 행동에 성유리는 행여나 임산부인 홍지은이 자기 배에 머리를 부딪힐까 봐 두려워 얼른 막았다.“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홍지은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막고자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정말? 이 말은 나를 용서한다는 말이야?”성유리의 대답에 홍지은은 잔뜩 흥분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진짜 잘 됐다!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어. 유리 네가 유정 씨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친구로 삼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것도 알았어.”“필경 우리야말로 진짜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 아니겠어? 한 사람 성격이 어떤지, 인성이 어떤지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거지.”“네가 진짜 성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 우리 둘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어야 해.”홍지은은 성유리에게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마치 그녀가 물기를 기다리는 어부처럼.성유리가 아무리 자기 손을 빼내려고 애를 써도 홍지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원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성유리기에 더는 홍지은을 마주할 힘이 없어졌다.그 순간, 다행히도 박한빈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박...
그의 말에 항상 생글생글 웃던 홍지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이 문제는... 사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필경 전에 성유리가 박한빈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홍지은은 성유리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성유리는 지금 엄연히 박한빈의 안사람이자 사모님이다.처음에 이 소식을 접해 들은 홍지은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이 정말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게다가 성유리는 전에 항상 박한빈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각종 모임이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홍지은은 성유리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어젯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홍지은은 여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다 박한빈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지금 그의 신분과 지위로 만약 성유리와 다시 만난다는 일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그리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성유리를 지켜주고 있었다.이건 어떠한 감정일까?박한빈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적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성유리만 선택했다.그제야 홍지은은 성유리에 대한 박한빈의 감정을 알아차렸다.그게 아니면 왜 어젯밤부터 끈질기게 성유리와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겠는가.전에 홍지은이 알던 평범하기 짝이 없던 성유리라면 그녀는 자신이 사과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박한빈이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다.그래서 그의 말에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 있다 한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전에 유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래서 사과를 못했죠.”“그러십니까?”박한빈은 살짝 미소 지으며 홍지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 미소가 무엇보다 더 두려웠다.
홍지은이 올린 사진에는 성유리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뒤로 경매장에서 산 조명이 너무 잘 보였다. 업계 사람들은 익명의 구매자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실 다들 눈치 차리고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다.거기에 더해 성유리는 전에 이런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많은 사람들은 성유리의 옛날 사진과 홍지은이 올린 사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곤 그 사람이 정말 성유리가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렇게 성유리와 박한빈의 사이는 순식간에 퍼졌지만 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원래 약간의 감기 기운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심부터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도우미가 다시 박한빈에게 연락했을 때, 그는 의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의사는 빠르게 성유리의 체온을 재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병원으로 향해 피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피검사요?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에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닙니다. 사모님의 지금 상황으론 감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 맞는 것 같은데 피검사를 하면 다른 상황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다른 상황이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때, 가만히 누워있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 걱정마세요. 저 임신 안 했어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한껏 당황하며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주 차분한 말투로 의사에게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병원 안 가도 돼요. 바로 약 처방 해주세요.”“아... 네.”의사는 잠시 주춤거리다 결정을 내린 듯 성유리에게 하려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떤 상황엔 생리주기가 일정하다고 해서 임신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임신초기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피임을 하지 않으셨다면...”“저 했어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계속 피
“하늘이가 아팠을 때도...”말을 꺼내던 박한빈 스스로 말을 뚝 멈췄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일로 인해 성유리에게 영원히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성유리를 꼭 끌어안아야만 했다.그래야만 그녀가 정말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박한빈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때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그러나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그때 내가 잘못한 거 알아.”박한빈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땐 그냥... 너무 화가 났고 받아들이기 싫었어.”“네가 내게 한 번만 져주길 바랐어. 처음 호텔에서도... 난 네가 내게 순순히 져주길 바랐다고.”“그때 네가 내 앞에서 돌연히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했을 때 난 마치... 팔려 가는 기분이었어.”“그래서 일부러 버텼던 거야. 그냥 네가 나한테 한 발자국만 양보해 주길 바랐을 뿐이었어.”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이며 계속 말했다.“그때 난 정말 형편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도박을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됐어.”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봤다.“하지만 유리야, 이거 하나만 믿어 줘. 나도 우리 아이를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네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그의 진심 어린 말에도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사실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지금 자신이 내린 선택과 현재의 태도가 과거의 신념과는 어긋난다는 것을.늘 스스로를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약을 다 먹은 후 잠에 든 성유리는 그날 오후까지 자버렸다.그 덕에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들을 저녁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메시지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홍지은이 올린 사진 속 사람이 성유리가 맞냐고 물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금성에 돌아온 것을 확인하며 언제 한번 만나 밥을 먹자고 했다.하지만 사실, 성유리가 금성에 돌아온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지난번 사하나의 장례식 때도 이미 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했었으니까.다만, 그때 성유리는 사씨 가문 사람들에게 쫓겨난 신세였다.심지어 그 자리에서 불길한 존재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이렇게 태도를 180도 바꾸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기회주의적으로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손익을 따져 움직이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게다가 메시지를 보낸 이들의 이름조차 성유리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다.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예전의 성유리였다면 아무리 그들이 싫어도 박한빈의 아내라는 신분 때문에 억지로라도 상대해 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이 어떻게 나오든 이젠 상관없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본 뒤,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옆에 툭 던져버렸다.그때, 하늘이가 성유리를 찾으러 방에 들어왔다.아직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터라 혹시라도 다시 옮길까 봐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문가에 서 있었다.“엄마, 괜찮아?”하늘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많이 아파?”성유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괜찮아. 너는 어때?”“나도 괜찮아! 의사 아저씨가 말했어. 내일이면 완전히 나을 거래! 봐, 나 오늘도 이렇게 멀쩡해!”말을 마친 하늘이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두 번이나 뛰어 보였다.그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그건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