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가 안 자고 있으면 네가 가서 잡으려고?”박한빈의 그럴싸한 말에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곧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물었다.“이거 한빈 씨가 하늘이한테 가르친 거죠? 박한빈 씨, 제발 딸한테 좀 제대로 된 걸 가르쳐줘요.”“난 지금도 하늘이가 아주 잘 크고 있다고 생각해.”박한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뭐 하시려고요?”“알리 씨한테 밥 한 끼 하자고 연락하려고.”“왜 그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건데요?”성유리가 당황한 듯 물었지만 박한빈은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유리야, 우리 내기 한번 해볼래?”이 말에 성유리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강하게 느껴 즉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싫어요.”“난 아직 뭘 걸고 하는지도 말 안 했는데?”“뭔지는 몰라도 싫어요. 전 당신이랑 내기하면 항상 지니까. 한빈 씨도 그걸 노리고 그러는 거잖아요!”성유리는 온몸으로 박한빈을 밀어내며 반항했지만 그는 그녀의 허리에 감은 자신의 팔을 더 꽉 조였다.“안 돼. 이번엔 무조건 해야 돼.”“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네?”성유리는 박한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려 하며 외쳤다.“매번 한빈 씨랑 내기하면 나만 손해 보잖아요. 이거 지금 사람 협박하는 거예요. 강매라고! 강매!”“아까 너 분석 잘하더라?”박한빈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으면 네 선택이 맞을 거라고 믿는 거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말문이 막혔다.그 사이 박한빈은 알리의 연락처를 찾아 바로 전화하려고 했다.그런데 성유리가 그의 손을 꾹 잡고는 강제로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니까 당신이 말한 내기라는 게... 알리 씨가 밥 먹자는 제안을 받아줄지 말지 보는 건가요?”“응.”“그럼 전 알리 씨가 받아들인다는 것에 투표.”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이 살짝 찌푸렸다.“왜요? 내기라면서요? 선택권은 먼저 말하는 쪽에 있는 거 아닌가?”박한빈은 한동안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요즘 들
박한빈은 오늘 밤 술을 꽤 많이 마셨다.원래 사업적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고 가끔 있는 술자리에서도 과하게 마시는 일은 드물었다.하지만 오늘은 자비 따윈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을 잘 안다.그는 술을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체질이고 오히려 마실수록 더 창백해지는 스타일이다.지금 박한빈의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보니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반면, 맞은편에 앉은 알리는 정반대였다.고량주를 반병 이상 마신 뒤, 알리의 얼굴은 피가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눈빛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성유리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말리려는 찰나, 박한빈이 또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그런데 알리는 이번에 잔을 받기는커녕 입을 틀어막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성유리는 힘들어 보이는 알리를 쫓아가는 대신 박한빈 쪽으로 몸을 돌려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괜찮아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다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도대체 왜 그 사람하고 술을 이렇게 마시는 거예요?”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물었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부축에 따라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그러곤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고 얼굴을 그녀의 가슴팍에 묻었다.박한빈의 눈은 이미 감겨 있었고 호흡은 차분했다.성유리는 한참을 지켜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설마 지금 주무시는 거예요? 잘 거면 집에 가서 자야죠. 여기서...”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아까 나가신 손님분 일행 맞죠? 지금 복도에 토하셨는데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여서요.”직원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이내 박한빈을 잠시 맡아달라고 직원에게 부탁한 뒤, 성유리는 곧장 복도로 나갔다.그곳은 이미 꽤 시끄러워져 있었다.그 고귀하고 차가운 인상으로 처음 봤던 알리는 지금 쓰레기통을 붙잡고 마구 토하고 있었다.“구급차 부를까요?”옆에 있던 누군
알리의 했던 말을 박한빈은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유리가 그를 발견했을 때 박한빈의 얼굴은 이미 몹시 창백하고 괴로워 보였다.성유리는 재빠르게, 그리고 정말 온 힘을 다해 알리를 자신에게서 떼어내려 했다.그리하여 박한빈 옆에 다다를 때 성유리는 손목과 손등에 따가운 통증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곧장 박한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그녀가 그의 손을 잡자마자 자연스럽게 손을 되돌려 잡았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그는 심지어 성유리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그냥 알리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술을 마신 박한빈의 얼굴엔 본래 생기조차 없었는데 이때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성유리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조금 멈칫한 후, 그는 바로 성유리를 끌어 앞으로 걸어갔다.뒤에서 따라오던 직원은 알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싸늘하게 식은 박한빈의 눈빛에 발걸음을 멈추었다.그 순간, 매니저가 달려와 직원을 뒤로 밀어내며 박한빈에게 사과했다.“박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직원교육을 잘 못시켰습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교육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한 마디도 새지 않게 하겠습니다!”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저 박한빈에게 끌려 나갔고 이내 차에 올라탔다.운전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지금이 말을 꺼낼 적당한 때가 아님을 직감했다.그는 침을 삼키며 조용히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 올라타던 성유리는 머리를 차 상단에 부딪혔다.큰 고통에 그녀는 곧바로 신음하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박한빈은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지만 그 소리에 바로 성유리의 상처를 살펴보려고 했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반응을 보고 그 기회를 이용해 그를 꽉 끌어안았다.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놔.”“안 놔요.
“병신같은 놈.”그 말과 함께 차가운 물이 한 바가지 쏟아져 내리자 알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처음에는 욕설을 내뱉으려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위장에서 큰 움직임이 느껴졌다.알리는 더 이상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저 눈앞에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 화장실로 마구 달려갔다.그리고 그곳에서 내장까지 토해낼 듯 구토를 했다.박한빈이 알리에게 먹인 술은 그가 이전에 마셨던 것들과는 달랐다.지금 알리는 위장이 타는 듯이 불에 달아오르고 머리가 마치 터져버릴 것처럼 아팠다.“독을 탄 게 분명해.”알리가 정신을 차린 후, 에릭에게 가장 먼저 했던 말이다.“그 인간이 술에 독을 탔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에릭은 알리의 모습을 보고는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 비웃음에 알리는 불쾌감을 느꼈다.“그건 무슨 뜻이지?”“네가 남의 땅에서 남의 아내를 탐내고 있으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널 잘 대해줄 거라고 생각한 거지?”에릭이 계속 말했다.“나는 너 같은 어리석은 동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형이 뭘 알아?”알리가 반박했다.“그리고 이게 형이랑 무슨 상관인데? 형 그 인간이랑 절교했다고 하지 않았어?”“난 그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려고 했을 뿐이야. 그리고 너 성유리 씨를 좋아한다고? 너 전에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나는 결혼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 그냥 유리 씨랑 연애하고 싶을 뿐이야!”“술집에서 했던 멍청한 고백 다시 말해줄까?”에릭은 동생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며 물었다.“정말 창피할 지경이야.”“내가 아무리 창피한 짓을 해도 형보단 낫잖아.”“상대방이 형을 좋아하지 않는 거 알면서 결혼하려고 했잖아. 그런 형이 나보다 뭐가 나은데?”“뭐라고?”“내가 틀린 말 했어? 형은 지금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성유리 씨한테까지 찾아갔어. 1억 좀 빌려달라고.”알리의 말에 에릭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그래서? 성유리 씨가 빌려줬어?”“당연히 안 빌려줬지. 아무 사이도 아니니
“저번에 다 말했잖아요. 뭘 더 원하세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저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성유리는 그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전 하늘이랑 집에 있을게요.”비록 전에 아라가 거절했었지만 지금 그들이 정말 결혼식을 올린다는 게 성유리에게는 좀 찝찝하게 느껴졌다.마치 사람이 불 속에 뛰어드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었다.“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면 되지.”박한빈은 아라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고 대답했다.“나도 얼굴만 비추고 금방 돌아올 거야. 돌아오면 우리 다 같이 놀러 가자.”“어디로요?”“어디든. 뭐... 쇼핑몰 가도 좋고.”성유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내 그녀는 박한빈에게 외투를 입혀주고 발끝을 들고 넥타이를 묶어주었다.박한빈은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쳐다봤다.성유리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마친 상태였는데 오늘 바른 립스틱은 광이 도는 빨간색이었다.그 촉촉한 질감이 그녀의 입술을 더욱 풍성하고 윤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술을 잠시 응시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입술을 정말 물어버렸다.성유리는 아프다고 신음하며 그의 가슴을 세게 때렸다.그러자 박한빈은 금방 그녀를 풀어주었지만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박한빈이 미소에 성유리는 화가 나서 다시 때리려 했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립스틱도 발랐잖아. 낭비하면 아까운 거 아냐?”그는 진지하게 말했다.“중독되면 어쩌시려고요?”“괜찮아.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은 모두 네 거야. 손해 볼 거 없어.”성유리는 더 이상 박한빈과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꼈고 잠시 대치한 후, 결국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빨리 가세요.”“그럼 집에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한빈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돌아서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선물.”“뭔데요?”“직접 열어봐.”그
“언니! 앞에 있는 오빠가 언니에게 전하라고 했어요.”성유리가 지하철역을 나서자 한 소녀가 말을 걸었다.“누가?”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물었다.하지만 소녀는 성유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성유리에게 앞으로 가면 알게 될 거라고만 말했다.결국 성유리는 소녀가 가리킨 방향대로 걸어갔다.그런데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이 꽃 한 송이를 건넸고 역시 앞의 사람이 주었다고 말했다.성유리의 마음속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원래는 그냥 가려고 했지만 앞에는 몇십 명이 꽃을 들고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모두 기대에 찬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계속 걸어갔다. 아마 박한빈이 이런 일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하며.최근 박한빈은 알리에게 자극을 받은 듯 보였다. 며칠 전에는 성유리를 억지로 결혼사진을 새로 찍게 하더니 수제 팔찌까지 만들어주었고 이번에는 또 이런 일까지 벌였다.다른 것들은 괜찮았다. 크게 소란스럽지도 않았고 아는 사람은 몇 명에 불과했지만 오늘은 달랐다.길을 걸어온 동안, 성유리는 이미 백 명이 넘는 사람을 봤고 주변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촬영하고 있었다.성유리의 머리는 점점 더 새하얘졌고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 그만하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장미 꽃잎으로 만든 아치형 문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그리고 그 앞에는 알리가 서 있었다....“야!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오늘 나한테 이런 망신을 줘?”알리는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에릭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분노로 코가 휘어질 지경이었고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에릭은 알리에게 여자들은 극단적인 로맨스와 서프라이즈를 좋아한다고 하며 지난번 술 취해 고백한 건 절대 성공할 수 없었을 거라며 조언해 줬다.그러면서 알리에게 다시 계획을 세우라고 했었다. 인터넷에서 가장 유행하는 꽃을 보내고 고백하는 방법으로 성유리가 감동받게 하라고.순진한 알리는 정말로 에릭의 말을 믿고 그대로 실행했다.결과는 성유리가 알리를 본 순간, 마치 유령을 본
“응.”“그럼 그 여자... 안 찾을 거야?”에릭은 옷을 짐 가방에 던져 넣으며 대답했는데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응. 안 찾을 거야.”너무도 담담한 에릭의 모습에 알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에릭은 뭔가 떠오른 듯 그를 쳐다보았다.“오늘 밤 로얀이랑 저녁 약속이 있는데 시간 있으면 오던가.”“난 뭐 하러 가?”알리는 에릭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사람한테 나를 조롱할 기회라도 주겠다는 거야?”“로얀의 아내도 올 거야.”“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말했잖아, 내가 얼마 전에 호르몬 때문에 눈이 멀었던 거라고. 오늘은 확실히 성유리라는 여자를 알게 됐어. 이제 더 이상 그 여자 안 좋아해!”알리는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밤이 되자 결국 에릭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자존심까지 걸었지만 그날 식사 장소에 성유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알리는 극심한 실망감을 느꼈다.박한빈은 먼저 도착해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왔어?”그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알리는 박한빈이 오늘 벌어질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러니 지금 박한빈이 자신을 조롱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알리는 즉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치켜들어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에릭은 알리를 빠르게 제어시켰다.“오늘 일은 내가 얘한테 시킨 거야. 사실 그냥 네 아내한테 장난을 치려고 했을 뿐이야.”“알아.”박한빈은 자연스럽게 에릭의 말을 받아들였다.“걱정 마. 나는 신경 안 쓰니까.”두 사람의 대화에 알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에릭은 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박한빈에게 다시 말했다.“나 라온시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 예약했어.”“오? 언제 가는데?”“내일.”“내일... 아마 나는 너를 데려다줄 시간이 없을 것 같아.”“괜찮아, 나 혼자 갈게.”대화가 끝나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술잔을 들어 올려 살짝 부딪혔다. 그들의
“유리가 그날 단호하게 거절한 이유는 사실 나랑 네 사이에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야.”“유리는 나랑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나를 잘 알잖아. 그래서 내가 주변에 두고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어. 웃긴 이야기지만 사실 유리가 나보다 너라는 친구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게다가 친구일 뿐 아니라 우리는 긴밀한 파트너 관계이기도 하고.”“유리는 이 일로 우리가 적이 될까 봐 걱정했어. 내가 그로 인해 더 많은 걸 잃을까 봐... 그렇지만 아라 씨는 유리에게 거절당한 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어.”“왜냐하면 유리는 아라 씨랑 네가 맞지 않는 걸 알고 있었고 아라 씨가 그 결혼에 들어가게 된다면 어떤 압박을 받을지 잘 이해했거든.”“어쩌면 유리 자신도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래서 그 며칠 동안 유리도 그렇게 행복해하지 않았어.”“내가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해. 나는 유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유리는 나 때문에 아라 씨 부탁을 거절한 거잖아. 그럼 나는 유리를 대신해서 아라 씨를 도와주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알기로 그게 바로 유리가 보고 싶어 했던 모습이고.”박한빈은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내뱉었고 그동안 에릭은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에릭은 박한빈의 말을 비웃었을 것이고 그들의 서로에게 희생하는 관계가 역겨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에릭은 그냥 조용히 있었다.박한빈이 한 행동에 대한 분노도, 원망도 다 사라졌다. 이 순간, 그는 박한빈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예전의 에릭에게 여자는 단지 기분 전환용 존재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정신적으로 투자하는 것보다, 그냥 돈을 주는 게 훨씬 더 간단했고 그렇게만 해도 수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그리고 그들은 에릭이 원하는 ‘감정’도 주었지만 에릭은 그것이 모두 가짜라는 걸 알았다.애릭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가난한 사람이라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