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준은 초대장에 적힌 강민아 이름을 반복해서 바라보았다.무아지경에 빠진 그는 강민아의 이름 세 글자가 그토록 낯설게 느껴졌다.정광사에서 지낸 시간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세상이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처음 이혼 서류에 서명했을 때만 해도 언젠가 강민아로부터 사업 초대장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다.“허.”반하준의 목구멍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전처가 운이 좋긴 한가 보다.이 초대장을 소지한 사람만이 양자 테크의 자율주행 대형 트럭 1단계 현장 실험을 참관할 자격이 있었고, 부신 그룹이 양자 테크의 협력사라 해도 이 초대장이 없으면 실험 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반하준은 중얼거렸다.“양자 테크 쪽에서 벌써 결과물을 만들었다고?”“강 대표님 주도하에 양자 테크 건물은 자정이 다 되도록 불이 꺼지지 않고 있어요. 듣기론 우 대표님께 도전장을 내밀어 자율주행 트럭 협업 프로젝트를 3개월 안에 끝내겠다고 장담했답니다.”“3개월 안에?”반하준은 귀를 의심했고 비서는 그가 제대로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기한은 이제 고작 두 달 남았어요.”반하준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강민아가 너무 성급하게 덤비네. 업무 경험이 하나도 없어.”엄규민이 덧붙였다.“저희 쪽 임원들도 곱게 보지만은 않습니다. 양자 테크에서 3개월 안에 무인 트럭 프로젝트를 완성하는데 강 대표님이 부신 그룹에도 재촉하고 있어서 불만이 꽤 많습니다.”반하준은 무심하게 초대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첫 실험에서 강민아가 크게 망신당할 거야.”말하며 그의 목소리가 한결 여유로워졌다.“쓴맛을 보는 것도 좋지. 그래야 자기가 이 사회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깨닫게 될 거니까.”반하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양자 테크의 첫 번째 실험 결과가 엉망일 거라고 기대했다.그때쯤이면 강민아가 그를 찾아올지도 몰랐다.만약 그녀가 애원한다면 부부였던 정을 생각해서 마지못해 도와줄지도 모른다.엄규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럴 리가요.”심은호의 눈가에 머금은 미소가 깊어졌다.“반 연구원님이 나랑 민아 씨를 떼어놓으려고 석현이를 데려오는 게 아니라 함께 만나려는 거면 당연히 너그럽게 받아주죠.”반용화는 차가운 눈빛으로 여우 같은 남자를 바라보다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남편이 될 팔자가 아닌데도 무진장 애를 쓰네.”심은호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도 서둘러 첩 자리를 노리지 않으면 첩이 될 기회도 없을 거예요.”반용화는 그를 등진 채 눈동자가 살짝 커지며 휠체어 팔걸이를 꽉 움켜쥐다가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으며 심은호를 무시했다.반용화와 반석현이 떠난 후에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정이와 함께 매운탕을 먹었다.그들이 가게를 나선 후 강민아와 정이는 차 뒷좌석에 앉고 심은호가 운전했다.강민아는 태블릿을 들고 자료를 살폈다. 차 안은 조용했고 정이도 옆에 앉아 마찬가지로 태블릿을 손에 들고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강민아가 일에 몰두한다고 생각할 때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선생님을 놀리는 심은호 씨나, 선생님 반응이나 다 귀엽네요.”심은호와 반용화가 불꽃을 튕기며 기 싸움을 해도 그녀는 말리는 대신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지금 돌이켜보면 강민아도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라 무척 재밌었다.반용화를 그렇게 상대할 사람은 심은호밖에 없을 거다. 반하준마저 반용화 앞에선 고양이 앞에 쥐가 되니까.“그쪽이 놀릴 때면 선생님이 훨씬 인간미가 있어 보여요. 한 번도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남편이 될 팔자가 아닌데도 무진장 애를 쓴다는 그의 말에 강민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심은호를 비웃으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반용화가 매운탕을 먹고 난 뒤 심은호에게 그런 평가를 할 줄 몰랐을 뿐이다.심은호도 강민아가 기쁘면 그만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다음에 선생님 만나면 내가 또 놀려볼게요.”“그래요.”강민아의 대답을 들은 뒤 심은호가 백미러로 그녀를 보자 상대는 이미 고개를 숙여
반용화는 눈앞에 손대지 않은 컵을 내밀었고 심은호는 손에 든 컵을 내려놓으며 웃었다.“고맙지만 이제 필요 없어요.”반용화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남의 컵으로 마시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심은호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가 더욱 환하게 피어났다.“선생님, 오해에요. 전 그냥 민아 씨가 쓰던 컵이 좋은 것뿐이에요.”강민아는 심은호가 고양이처럼 남이 마신 물컵으로 물을 마시는 모습에 몰래 웃다가 그의 말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금세 화끈거렸다.왜 심은호는 반용화 앞에서도 거침없이 말하는 걸까.“저기...”심은호에게 한마디 하려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전 심하게 사레에 들린 탓에 남자의 눈은 붉어지고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니 차마 구박할 수가 없었다.“선생님 앞에서 그러지 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네, 알겠어요.”그는 다가와 강민아와의 거리를 좁히며 반용화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선생님처럼 고리타분한 사람은 우리 장난을 이해 못 하니까요.”반용화는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듯 냉정하게 그녀를 타일렀다.“민아야, 싫으면 거절해도 돼.”심은호는 분홍색으로 물든 볼을 손으로 받치며 반용화에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거절하지 않으면 좋다는 뜻인가요?”강민아는 번뜩 정신이 들며 온몸에 열기가 느껴졌다. 반용화가 서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흘겨보는데 상대가 덧붙였다.“선생님은 꼭 우리를 환하게 비추는 조명 같네요.”“심은호 씨.”강민아가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왜 선생님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거예요?”심은호가 반용화의 차갑고 잘생긴 얼굴을 슬쩍 보았다.“민아 씨는 모르지만 반 연구원님은 잘 아실 거예요.”반용화가 물티슈로 입을 닦았다.“난 다 먹었어. 심은호 소유욕이 워낙 강하니까 더 방해하지 않을게.”말하며 반용화가 반석현을 돌아보았다.“석현
반용화가 시선을 내리며 한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선생님, 식사하셨어요?”“아직.”“그럼 같이 매운탕 먹을래요?”강민아가 물어보자 반용화는 심은호를 돌아보더니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좋지.”심은호의 입꼬리가 들썩거리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까만 동공이 커지며 반용화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았다.동행한 수행원들은 반용화가 식당에서 식사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복 경호원 중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경호원은 그릇을 들고 먼저 냄비에서 국물 두 그릇을 떠낸 뒤 화학 시약을 이용해 음식에 대한 독성 검사를 한 후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 반용화에게 정중하게 말했다.“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식사하셔도 됩니다.”휠체어를 타고 있던 반용화는 강민아의 오른쪽 테이블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강민아와 심은호는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반용화가 음식을 먹기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이미 다 익은 음식을 떠서 반용화의 그릇에 담아주었다.“선생님, 드세요.”“고마워.”반용화의 목소리는 온화했고 강민아에게 굳이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민아야, 나물 좀 건져줘.”강민아가 서둘러 움직이자 심은호가 참지 못하고 경고를 날렸다.“사람 부려 먹는 게 아주 자연스럽네요.”그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제가 반 연구원님을 모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그러자 강민아가 말했다.“안에 앉아서 음식 집는 게 불편할 거예요. 내가 할게요.”심은호는 어쩔 수 없이 차갑게 반용화를 노려보았다.“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매운탕 먹겠다고 한 것 같은데.”강민아는 심은호와 반용화가 서로 잘 맞지 않는 것을 알고 심은호 그릇에 음식을 떠주었다.“빨리 먹어요. 말하지 말고.”심은호는 콧방귀를 뀌더니 턱을 괴며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말이 많다는 거예요? 아님 나를 달래주는 건가?”강민아가 놀리듯 말했다.“심은호 씨는 워낙 말을 잘하니까요.”“입으로 말하는 것 말고도 할
강민아의 품에 숨어 있던 반석현은 반용화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상대방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반용화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강민아는 품에 안긴 반석현을 향해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석현아, 이제 괜찮아? 아빠 왔으니까 아빠 따라 먼저 가도 돼.”반석현은 강민아에게 휴대폰으로 쓴 글을 보여주었다.[난 정이랑 매운탕 먹고 싶어요.]강민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나지막이 물었다.“할 수 있어? 아니면 룸으로 가도 돼. 천천히 적응하는 동안 옆에 있어 줄게. 너무 한꺼번에 하지 않아도 돼.”반석현은 휴대폰에 빠르게 타이핑했다.[나 자신한테도 기회를 주고 싶어요.]“좋아!”강민아가 대답하자 반석현은 잠시 강민아의 품에서 벗어나 자리로 돌아갔다.강민아는 정이에게 말했다.“석현이가 너랑 같이 매운탕 먹고 싶다네.”정이도 기뻐하며 다시 반석현 곁으로 갔고 강민아는 그제야 반용화에게 물었다.“선생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안채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용화 씨는 그쪽이 석현이를 이런 곳에 데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온 거예요.”그러면서 반용화에게 말했다.“석현이 데려가요. 애가 아직 이런 환경에 적응 못해요.”반용화의 차가운 눈빛이 안채린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석현이랑 거리를 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 말 안 들을 거면 당장 국내를 떠나.”반용화의 말에 안채린의 숨이 턱턱 막혔다.강민아는 안채린과 반용화를 살펴보았다. 안채린에게 적대감은 없어 보이는데 왜 반석현과 거리를 두라는 걸까.안채린은 자신과 반석현이 혈연관계라고 말했는데 대체 둘은 무슨 사이일까.진찬규가 안채린의 편을 들었다.“반 연구원님, 왜 안채린 씨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어요? 대체 뭘 잘못했다고.”반용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내 앞에서 당장 꺼져!”안채린은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언니한테 날 지켜준다고 약속했잖아요!”터무니없이 내뱉은 그녀의 말에도 반용화의 얼굴은 천 년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강민아가 그를 품에 안은 것이었다.그녀는 반석현을 자신의 품에 기대게 하며 따뜻한 손바닥으로 반석현의 뒤통수를 감쌌다.“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네 잘못이 아니야. 석현이랑 매운탕 먹을 수 있어서 나랑 정이, 은호 아저씨도 다 기뻤어. 이겐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야.”반석현의 몸은 심하게 떨렸지만 강민아의 체취에 휩싸여 숨이 차고 헐떡거리던 것이 서서히 진정되었다.작은 손으로 강민아의 허리 쪽 천을 잡은 아이는 강민아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이런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강민아는 경찰에게 말했다.“저 여자가 아이를 데려가고 내 딸을 때리려고 했는데 내 딸이 막았어요.”장기명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민아 씨,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은데요.”경찰관이 안채린에게 물었다.“이 아이와 어떤 관계입니까?”“전...”안채린의 말문이 막히자 강민아가 안채린에게 물었다.“석현이 가족이라면서요? 경찰이 왔으니까 석현이 가족이라는 증거를 보여줘요.”안채린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반석현과의 관계를 증명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가족이라고 말한 것만으로 이미 반용화의 심기를 건드린 행동이었다.“그럼 그쪽은 석현이와 어떤 사이인데요? 경찰에게 석현이 보호자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요?”안채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강민아를 노려보자 경찰이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사이죠?”“이 아이는 제 딸 친구예요.”경찰이 다그쳐 물었다.“이 아이 보호자는요? 보호자에게 연락할 수 있나요?”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죠.”휴대폰을 꺼내 반용화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정이의 외침이 들렸다.“아저씨!”강민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휠체어를 탄 반용화가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하늘 같은 남자가 북적거리는 매운탕 가게에 들어오니 이곳과 조금은 동떨어져 보였다.주위 손님들은 눈을 크게 뜬 채 반용화를 살펴보았고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