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현이 헬멧을 쓰고 있었기에 얼마나 당황해하고 안색이 창백해졌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다행히 오토바이가 막 출발했을 때라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반현민은 연료 탱크에 엎어졌고 헬멧이 계기판에 부딪혔다.“웩. 콜록콜록.”그리고 가슴을 부딪쳐 괴로워하면서 기침하기 시작했다.“민아, 너도 참. 앉았으면 꽉 잡아야지.”반현민이 괜찮은 걸 보고서야 강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반현민의 옷을 잡고 들어 올린 후 다시 제대로 앉혔다. 반현민이 헬멧을 바로잡으며 말했다.“난 괜찮아요.”강민아와 반우정이 들으라고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강나현이 소리를 지르자 조금 전 그녀와 충돌할 뻔했던 차도 멈춰 섰다. 운전자는 핸들을 잡고 창밖을 향해 소리쳤다.“당신이 역주행했잖아.”“내 오토바이에 애가 타고 있는 게 안 보여?”운전자는 어이가 없었다.“애를 데리고 튜닝 오토바이를 타다니. 조만간 사고 나겠네.”강나현이 운전자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반현민도 똑같이 따라 했다.그녀는 무너진 가드레일에서 힘겹게 오토바이를 빼냈다. 전조등이 부서진 걸 보고는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강민아의 우스운 꼴을 보려고 일부러 온 건데 결국에는 강민아에게 우스운 꼴을 보여주고 말았다.운전자와 다툴 기분이 아니었던 강나현은 바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쏜살같이 떠나갔다.그들이 멀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강민아의 빨라졌던 심장박동이 다시 차분해졌다.강민아가 반우정에게 말했다.“올라가서 짐 옮기자.”앞으로 반현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반현민이 강나현에게 의지하는 걸 본 순간 이미 마음속으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한동안 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호텔에서 지냈다. 계속 집을 알아보긴 했지만 세를 맡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집의 위치, 구조, 주민들의 평가 모두 고려해야 했다.강민아는 겨우 소형 아파트 한 채를 선택했다. 반우정이 앞으로 초등학교에 다니기 편하도록 그
강민아는 헤어클립으로 긴 머리를 고정했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지만 헝클어져 보이지는 않았다.캐시미어 롱원피스가 그녀의 날씬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한 손에는 가죽 서류 가방을, 다른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반하준은 그녀를 연회에 데려간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강민아가 드레스를 입었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반하준을 보고도 인사를 건네지 않고 곧장 계단을 올라갔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목적지는 같으니까.그때 뒤에서 반하준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나한테 부탁하면 내가 증권 감독 관리위원회에 성명서를 제출해 동결된 자금을 빨리 해제해달라고 할 수 있어.”그는 그녀에게 어려움이 닥친 걸 알면서도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120억 원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강민아는 집을 사기 위해 그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강민아가 대꾸하지 않자 반하준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거액을 지출했으니 사방에서 주시하고 있을 거야. 운이 좋아서 주가가 폭등하기 전에 뛰어들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증권 감독 관리위원회에서는 전형적인 사례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거든. 누군가 꼬투리를 잡아주면 실수인 걸 알면서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야.”강민아는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반하준을 돌아보았다.“그러니까 당신 라이벌이 증권 감독 관리위원회에 날 신고했다는 거지?”반하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신고하더라도 당신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근데 당신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 내가 실패하는 꼴을 보려고.”그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남을 꿰뚫어 보는 건 항상 그의 몫이었는데.강민아가 더 높은 계단에 서서 그를 심판하고 속마음을 들춰내자 반하준은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내가 말했잖아. 재벌 사모님 체험은 끝났다고. 난 너한테 120억 원을 줄 수도 있고 다시 거둬들일 수도 있어. 전부 내 기분에 달려있다는 것만 명심해.”
강민아가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설마 나랑 이혼하기 싫은 건 아니지?”그러자 반하준이 코웃음을 쳤다.“이혼한 후에 네가 매달릴까 봐 그게 걱정이야.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네.”강민아는 그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말했다.“쓸데없는 걱정은.”드디어 이혼 도장을 찍었다. 강민아는 도장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었다.반하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준 씨, 잠깐만.”그녀의 부름에 반하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한 손을 양복바지 주머니에 넣고 돌아보면서 차갑게 웃었다.“벌써 후회해?”강민아가 말했다.“여기 남아서 정이한테 사인해줘야 해. 정이가 내 성을 따르기로 했거든.”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강민아가 접견실에서 나와 보니 육성민과 반우정이 로비에 앉아 있었다. 반하준을 본 육성민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간신히 참았다.백열 상가와 성화 상가의 상가 자리를 반하준이 또 비싼 가격으로 사들였기 때문이었다.“엄마.”반우정은 의자에서 뛰어내려 강민아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고는 반하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아저씨.”아직 이혼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늘부터 호칭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그 순간 반하준은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목구멍에 뭔가 막힌 듯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하고 답답하기만 했다.반하준이 반우정에게 말했다.“18살이 되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면 성을 되돌릴 기회가 한 번 더 있을 거야.”반우정이 반하준을 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난 엄마가 지어준 새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반하준의 안색이 급변했다.“이젠 우정이 아니야?”“네. 이젠 강윤정이에요.”반하준이 나지막이 읊조렸다.“우정이라는 이름도 괜찮지 않니? 듣기 좋은데...”반우정과 반현민의 이름은 반하준의 아버지가 일찌감치 지어놓은 것이었다.반현민의 이름에는 반씨 가문을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책임이 담겨 있었다.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하는 남자와 달리 여자의 사명은 의지
“자, 박수. 드디어 와이프한테서 벗어나 싱글이 되었어. 이혼 축하해, 오빠.”강나현이 친구들을 이끌고 반하준 이혼 축하라고 쓰인 현수막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북까지 치면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엄마, 이모 지금 뭐 하는 거예요?”반우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아저씨랑 창피한 짓을 하고 있는 중이야.”강민아는 반우정의 손을 잡고 최대한 멀리 돌아갔다. 그녀가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본 강나현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반하준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강나현에게 다가갔다.“지금 뭐 하는 거야?”강나현이 까치발을 들고 반하준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이혼을 축하해주고 있잖아.”반하준의 얼굴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조용히 좀 해. 자랑할 일도 아닌데.”하지만 강나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혼해서 너무도 기뻤다.“됐어. 가자. 내가 자리 다 예약해놓았어. 오늘 기쁜 날인데 신나게 놀아야지.”...그날 밤, 클럽 룸.강나현이 술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자, 오빠가 싱글 된 거 축하해야지. 이젠 가정이라는 족쇄를 풀고 마음껏 여자도 만나고 술도 마셔. 싱글 만세.”다른 사람들도 따라 외쳤다.“하준아, 이혼 축하해.”강나현이 어깨를 들썩이며 괴성을 지르는 모습이 정말 킹콩 같았다.소파에 앉아 있는 반하준의 얼굴이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였다. 그는 술잔을 들어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셨다.‘왜 이렇게 답답하지?’결혼 생활 7년 동안 그는 강민아를 좋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젠 이혼까지 했으니 속이 후련해야 마땅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가슴 속이 타는 듯했다.강나현은 위스키병을 들고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싱글이 된 기념으로 내가 아주 끝내주는 아가씨들로 몇 명 불렀어. 내 눈썰미를 믿어 봐. 하나같이 죽여주게 예쁠 거야.”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분위기를 띄웠다.“대박. 나도 아가씨랑 놀래.”강나현이 큰소리로 말했다.“형님이라고 부르면 아가씨 불러줄게.”그들은 강
하얀 원피스는 강민아가 당시 입을 수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이었다.강나현이 호탕한 목소리로 여자를 불렀다.“언니, 이리 와서 우리랑 같이 술 마시자.”겁에 질린 여자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저... 술 못 마셔요.”강나현은 콧방귀를 뀌고는 주위 남자들에게 물었다.“너희들은 다 이런 스타일 좋아하지? 순진해 보이는 거. 나까지도 불쌍하게 느껴지잖아.”“저런 토끼 같은 애들이 인기가 많긴 하지.”“하준이가 마음에 든 애라면 우린 건드리지 않아.”강나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언니, 무서워하지 말고 내 옆에 앉아.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여자는 강나현에게 경계를 풀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강나현이 그녀에게 술잔을 쥐여주었다.“자, 하준 오빠한테 한잔 따라줘.”여자는 강나현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반하준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반하준의 차가운 얼굴을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 대표님.”여자가 술을 따르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반하준의 분노가 확 폭발했다.‘민아 아니잖아. 하얀 원피스를 보고 대체 뭘 기대했던 거지?’“꺼져.”반하준이 술잔을 엎은 바람에 술이 여자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졌고 곧이어 비명이 들려왔다.룸 안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그 누구도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었다.강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등을 토닥였다.“아이고, 울지 마. 언니가 우니까 내 마음이 다 아프네. 같이 나가자.”강나현은 여자를 데리고 룸을 나선 후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룸을 나서자 여자도 조금씩 진정되는 듯했다.“데리고 나와줘서 고마워요.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을 거예요. 그나저나 반 대표님 너무 무서워요. 전 김예나라고 하는데 이름이 뭐예요?”강나현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호감이 가득했다.복도에 드리워진 어두운 조명 덕에 강나현의 두 눈에 비친 감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뭐야? 나랑 친
강나현의 말에 김예나는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반응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했다.강나현이 떠나고 10여 분 후 김예나는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아픈 몸을 이끌고 화장실에서 나왔다.깔끔한 정장을 입은 심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별다른 표정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김예나는 손에 쥔 메모리 카드를 그에게 건넸다.“절 알아보지 못했어요.”멍투성이가 된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저 여자를 꼭 지옥에 보낼 겁니다. 유하의 복수를 하고 말 거예요.”심은호는 메모리 카드를 받아 들고 차갑게 돌아섰다. 그러자 김예나가 그를 불러 세웠다.“궁금한 게 있는데요. 변호사님은 왜 갑자기 절 도와주시는 거죠? 전에 제가 아무리 부탁해도 이 사건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잖아요.”심은호는 손가락 끝으로 작은 메모리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한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요.”...검은색 마이바흐가 반씨 저택의 차고로 들어섰다.강나현은 손을 뻗어 반하준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반하준은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팔을 빼냈다.“오빠, 내가 잡아줄게.”“괜찮아.”그는 쉰 목소리로 말하고는 옆쪽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강나현이 황급히 뒤따라 내렸다.“아휴, 조심 좀 해. 그렇게 많이 마셔 놓고.”강나현이 따라가 반하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렸다.그는 집 안으로 들어간 후 소파에 앉아 미간을 문질렀다. 이렇게 머리가 아플 정도로 술을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레몬 물 줘.”반하준이 허공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나현이 막 들어오던 터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응? 뭐라고?”그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민아가 집을 나간 지 벌써 한 달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강민아가 없는 집을 적응하지 못했다.도우미들 또한 강민아가 없는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심지어 연진숙과 반현민까지 점점 더 불만을 쏟아냈다.반하준은 배를 움켜쥐고 미간을 찌푸린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강나현은 반하준이 내뿜는 싸늘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의 얼굴에 살기마저 담겨 있는 듯했다.“왜 그래? 언니가 또 무슨 기분 나쁜 소리라도 했어?”반하준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세 글자를 내뱉었다.“심은호!”강나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왜.”심은호의 빈정거리는 웃음소리가 반하준의 귀에 꽂혔다.“너 지금 민아 방에 있어?”반하준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강나현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반하준을 쳐다보았고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랑 민아가 오늘에 이혼했는데 벌써 신나서 호텔에서 밤을 보내?”지금 이 순간 반하준은 분노한 수컷 사자를 방불케 했다. 그와 달리 심은호는 느긋하기만 했다.“민아 씨가 내 호텔에 묵고 있거든. 한밤중에 내 손님이 방해받도록 내버려 둘 수 없지. 그리고...”심은호는 잠깐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이혼했는데도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내야 해?”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주먹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튀어나올 듯했다.“심은호, 예전부터 민아한테 마음이 있었지? 전에 내 아이 생일 때 해외에서 비행기를 12시간 타고 날아온 이유가 혹시 강민아 때문이야?”매번 심은호와 만날 때마다 강민아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가 초대한 핑계로 민아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거였어.’반하준은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남의 아내를 탐내다니. 심은호, 너 아주 저질이구나.”그러자 심은호가 코웃음을 쳤다.“넌 무슨 자격으로 날 비난하는 거지?”“민아 한때는 내 아내였으니까.”“하지만 진심을 저버린 사람은 나중에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돼 있어.”반하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위를 움켜쥐는 것처럼 아팠고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나왔다.그의 창백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반하준, 제발 그만해. 민아 씨 잠 좀 편히 자게 내버려 둬.”말을
반하준이 경멸스럽게 콧방귀를 뀌면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다.그는 샤워를 하고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강나현이 졸린 눈을 비비면서 미닫이문에 기대어 서 있는 걸 보았다.그녀는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며 복근을 은근히 과시했다.“오빠, 빨리 깼네.”순간 멈칫한 반하준은 머리를 닦던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젖은 슬리퍼를 갈아신는 것도 잊은 채 강민아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는 침대의 이불을 들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강민아가 방 안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끼익.옷장을 열어보니 고급 맞춤복이 가득 걸려 있었다.강민아는 반우정과 함께 집을 나갈 때 캐리어 하나만 들고 나갔다. 그 캐리어 안에는 평소 반우정에게 사 줬던 옷들이 들어 있었다.반씨 가문 사람들 모두 지난 7년 동안 강민아를 홀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강민아에게 이렇게 많은 고급 맞춤복과 명품 가방, 그리고 값비싼 보석들이 있지 않은가.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반씨 가문의 명의로 구매한 것들이었고 반하준과 연진숙의 명의로 등록되어 있었다. 강민아가 마음대로 가져가면 절도가 되는 것이었다.심지어 그녀마저도 반씨 가문을 빛내기 위해 거금을 들여 사 온 존재였다.반하준의 행동에 강나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오빠, 왜 그래?”옷장 앞에 있던 반하준은 갑자기 돌아서서 강민아의 잠옷을 입은 강나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어젯밤에 민아 방에서 잤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이름을 저렇게 다정하게 불러?’강나현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응. 오빠가 너무 아파해서 혼자 놔두고 갈 수가 없었어. 어차피 민아 언니 방이 비어 있으니까 하룻밤 자면서 오빠를 챙겨주려고 그랬지.”그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졌다. 강나현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목소리마저 떨렸다.“설마 민아 언니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그녀가 다급하게 캐물었다.“오빠, 민아 언니랑 이혼한 거 후회해?”“무슨 헛소리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
심은호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과 갈비뼈가 아팠다.지금 강민아에게 온몸을 맡기듯 기대어 있는 저 남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다.그런데 지금 오염된 브로치를 손에 들고 강민아에게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해도 해도 너무했다.“강민아, 저놈한테 속지 마!”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지른 반하준은 입안에 온통 피 맛만 감돌았다.그는 복부를 감싼 채 개미 수만 마리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바라보며 강민아의 동공은 이미 싸늘해졌다.“심은호 씨 몸에 묻은 레드 와인, 당신이 쏟았지?”묻는 게 아닌 반하준의 짓을 단정하는 어투였다.반하준은 입술을 달싹이며 목구멍에서 진동하는 피 맛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실수로 그런 거야.”심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약한 꽃으로 둔갑했다.“그래요. 반하준은 실수로 그런 거니까 나 때문에 화내지 마요.”반하준은 심은호의 그런 모습에 이가 갈렸다.‘저 개자식은 연기를 왜 저렇게 잘해?’남들 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민아야, 저 자식이 일부러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아까 날 때리는 거 못 봤지? 내 갈비뼈와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어! 콜록콜록.”반하준의 가슴속에는 차마 내뱉지 못한 뜨거운 열기가 여러 가닥으로 뭉쳐서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기침할 때마다 온몸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있는 공작새 모양의 브로치를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살짝 붉게 물든 코끝으로 훌쩍이며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그러더니 자신의 소매로 브로치 표면을 살살 닦으며 브로치에 묻은 와인 얼룩을 닦아내려 애썼다.반하준은 감시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봤다.젠장!그는 심은호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강나현에게 감시카메라를 끄라고 시켰다.카메라가 켜져 있었다면 강민아가 심은호의 본색
“삼촌, 다 됐어요?”육성민은 체육관 밖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막대기로 타서 재가 돼버린 낙엽을 헤집고 있었다.그는 단열 장갑을 끼고 호일로 감싼 고구마를 불에서 꺼냈다.육성민이 호일을 뜯어내자 뿜어져 나오는 꿀고구마 향에 정이의 입안에는 금세 군침이 돌았다.“빨리 줘요!”정이가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육성민이 말했다.“뜨거워.”그는 쌓아놓은 벽돌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숟가락을 생수로 헹군 뒤 정이에게 건넸다.정이는 숟가락으로 고구마를 파서 호호 불었다.서둘러 한입 베어 물던 아이의 두 눈이 휘어지며 통통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정이가 유난히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육성민의 눈가에도 흐뭇함이 가득했다....강승 테크. 인수식이 끝나고 뒤풀이가 진행될 때, 심은호가 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마주 오던 반하준과 부딪혔다.반하준은 한발 물러서고, 심은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장이 와인으로 얼룩진 게 보였다.장밋빛 붉은 액체가 강민아가 조금 전 선물한 공작 브로치 위로 쏟아졌다.반하준은 자신의 걸작에 감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눈이 없어? 자꾸 안하무인으로 굴면 다음에 더러워지는 건 옷뿐만이 아닐 거야.”반하준은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휙 돌려 잔을 아래로 뒤집었다. 남은 레드 와인이 전부 심은호의 신발 끝으로 쏟아졌다.그는 비웃으며 말했다.“복도 카메라는 고장 났지만 민아한테 찾아가 울면서 일러바쳐도 돼. 너 연약한 척 잘하잖아. 어디 계속해 봐. 미리 말하는데 민아는 단순히 호기심에 널 갖고 노는 거야. 하루 종일 자기 뒤에 숨어서 징징거리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반하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은호는 주먹을 휘둘렀다!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반하준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자기 손을 쓸 줄 몰랐던 반하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손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그대로 심은호의 주먹에 맞고 말았다.그 탓에 반하준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심은호의 공개 고백에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반하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번개와 천둥이 몰아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심은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모습은 부드러운 얼굴선과 높은 콧대, 깊은 눈매를 자랑하며 마치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천장에서 비추는 조명이 그의 눈가를 비추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바라보았다.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순간, 호수처럼 맑은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강민아를 향해 쌓아온 감정이 가득했다.강민아의 숨결 하나하나가 뜨거웠고, 남자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감쌌다.마치 용암이 발밑에 흐르듯 빠르게 위로 올라오는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쥐었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긴장하지 마요.”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강민아를 달랬다.“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미안해요.” 심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말했다.“계속 말해요. 듣기 좋으니까.”강민아의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은호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두 눈이 반짝이며 마음을 다잡은 그가 마이크를 마주한 채 아래에 있는 반하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심은호에게만 있었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민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겁니다. 결혼하든, 누군가를 떠나든 무엇을 하든지 늘 뒤에서 지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나타날 겁니다. 전 앞으로도 여전히 민아 씨의 모든 결정을 지지합니다. 태산 그룹에서 정식으로 강승 테크를 인수했으니 두 회사는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겁니다.”반하준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며 손등에는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갑자기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처럼 동시에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마치 그의
“설마 심은호가 부사장이 반씨 가문 사모님일 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겠지?”“왜 그렇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나 했더니, 남의 아내를 탐낸 거였어?”가십거리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설마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어쩐지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나더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시그널 주고받은 거 아니야?”“설마 반 대표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강민아와 이혼한 건가? 세상에!”다들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격적인 소문에 재벌가 인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심은호가 그의 평판을 망칠 작정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심은호를 끌고 갈 것이다!‘심은호,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감히 내 여자를 노렸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지유빈은 반하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아 씨 말로는 대표님께서 적극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데요. 왜 이혼하고 나서는 강민아 씨가 누굴 만나는지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강민아는 반하준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반하준은 지유빈을 우습게 여겼다.“기자로서 아직도 모르겠어? 심은호가 내 아내를 오랫동안 탐냈다고! 5년 전부터 내 아내를 지켜봤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왜 계속 아내라고 말하는 거죠? 그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대표님 혼자인 것 같은데요.”거대한 스피커가 반하준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듯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오장육부에 고통을 선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강민아가 이혼한 뒤 지유빈은 기자로서 업무 때문에 줄곧 강민아를 지켜봤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동안 지유빈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반하준의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단순히 강민아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시하고 싶었지만 지유빈의 말에 궁지로 몰린 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가 구세주처럼
심은호가 헤어지겠다는 말에 반하준은 악랄한 눈빛을 드러냈다.비록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놓고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심은호, 이미 말했으면 지켜야지.”반하준은 심은호에게 강민아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었다.“난 심은호 씨랑 헤어질 생각 없어.”강민아가 말하며 심은호의 큰 손을 감싸더니 반하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당신이 우리 사이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심은호 씨와 안 헤어져.”반하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심장이 저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듯했다.“민아 씨...”심은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자 강민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두 집안 인수식에서 소란을 피운 건 이 사람이에요. 나가도 그쪽이 아니라 반하준이 나가야 한다고요!”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렸고, 반하준은 누군가 몽둥이로 세게 내리치듯 심장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심은호는 강민아의 말에 위로받았는지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민아 씨는 나한테 참 잘해주네요.”강민아의 단호한 말 한마디면 그는 만족할 것 같았다.강민아가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내 남자 친구니까요.”“강민아!”보다 못한 반하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여기 있는데!’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했다.“민아 씨, 아직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심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반하준이 우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병원 시스템을 해킹해 내 진료기록을 훔쳐 갔어요. 내가 병원에 다니는 걸 알고 병이라도 있을까 봐 내 진료기록으로 나한테 헤어지라고 협박했어요!”강민아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심은호에게 반하준이 한 어리석은 짓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지금 심은호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십거리를 직감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심은호의
강나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나 저 사람 알아! 강승 직원이야!”그녀는 연설문이 바뀐 것이 반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연설문을 바꾼 사람이 복도에서 반하준과 단둘이 만나는 게 보였다.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강나현은 표정이 확 바뀌며 말문이 막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반하준을 돌아보았다.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게 정말 반하준과 관련이 있을 줄이야.하지만 반하준이 했다기엔 너무 저급한 수작이 아닌가.강승의 직원을 시켜서 연설문을 바꾼 것도 모자라 감히 회사 안에서 직원과 따로 만나다니.그런 짓을 하면서도 반하준은 카메라를 피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강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반하준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다 들키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치 대형 스크린에서 강승 직원과 공모한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강민아는 시치미를 떼는 반하준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그럼 저 직원에게 반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보죠.”카메라에 찍힌 직원은 당황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에 띄게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부사장님, 반 대표님이 저한테 시켰어요! 저한테 2천만원 줬는데 이 돈 다 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경악하며 말했다.“정말 반하준이 한 짓이야? 심은호를 노리는 건가?”“심은호와 강민아가 만나니까 전남편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근데 너무 비열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폭로 당한 반하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너한테 들킬 줄 알았어. 그냥 네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걸 알고도 아무 말 안 하길래 난 네가...”반하준은 말을 꺼내며 입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그는 수치심도 모르는 듯 이렇게 물었다.“그래, 내가 시켰어. 그게 뭐? 강민아, 심은호 때문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