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Author: 묵묵연화
‘부탁받은 일?’

‘강성준인가?’

슬비의 펜끝이 잠시 멈췄다.

지난 1년 동안 슬비는 성준이 자신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의사를 찾는 모습을 직접 봤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러다 반년 전 주치의가 희천으로 바뀐 뒤, 슬비의 청력은 조금씩 좋아졌다.

그런데 왠지 마음 한쪽이 석연치 않았다.

‘강성준과 유 선생님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나?’

‘하지만 평소 검사 받으러 올 때마다 유 선생님은 강성준에게 좋은 표정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는데...’

고개를 들고 희천을 보는 슬비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희천은 더 말하지 않았다.

“쉬는 데 방해하지 않을게요. 잘 회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문이 닫혔다.

병실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베개 옆 핸드폰이 몇 번 진동했다.

슬비가 핸드폰을 들어 훑어보니 대부분은 장여진이 보낸 메시지였다. 비행기 표를 끊었는지, 언제 호강시로 돌아오는지를 묻는 내용뿐이었다.

슬비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에 보낸 메시지가 있었고, 가장 최근 것은 아침 7시였다.

곧장 답장을 입력했다.

[엄마, 이쪽에서 갑자기 일이 생겼어. 이틀 뒤에 갈게.]

전송하자마자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가장 아래에 있던 메시지는 성준의 메신저였다.

[어젯밤 많이 다쳤어? 조금 있다가 보러 갈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갈게.]

슬비는 그 문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고개를 숙여 대화창을 열고 딱 한 줄을 입력했다.

[오지 마, 우리 그냥 헤어져.]

전송한 뒤 곧장 번호를 차단하고 삭제했다. 모든 과정이 한 번에 끝났다.

슬비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엎어 놓고 눈을 감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표정은 담담했다.

...

같은 시각, 출근길 차량 흐름 속에서 검은 세단 한 대가 앞차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띵-

중앙 콘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성준은 운전석에 앉아 한 손을 운전대에 걸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확인한 뒤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앞차의 브레이크등이 갑자기 켜졌다.

정신을 차린 성준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날카로운 제동음과 함께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안전벨트에 눌리면서 낮게 신음했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도 쏟을 뻔했다.

“야, 성준아! 뭐 해?”

심우찬이 몸을 바로 세우며 성준을 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성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며 미간을 더 깊게 접었다.

조수석의 우찬은 성준의 어릴 적 친구였다. 전날 밤 룸에도 함께 있었다.

성준의 표정을 본 우찬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슬비가 보낸 메시지야?”

성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콘솔 위로 던지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

우찬은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짐작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시트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슬비가 화난 거 탓하지 마. 어젯밤 같은 상황이면 누구라도 속상하지.”

운전대를 쥔 성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찬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슬비는 성격도 순하고 너를 너무 좋아하잖아. 이따 병원 가서 잘 달래. 꽃 사 가고 좋은 말 몇 마디 하면 끝날 일이야.”

성준은 여전히 침묵했다.

우찬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혼자 떠들었다.

“생각해 보면 슬비도 참 불쌍하지. 남자 하나 믿고 호강시에서 북명시까지 혼자 왔잖아. 아는 사람도 없고, 귀도 못 듣고, 억울해도 참아야 하고.”

“예전에 시연이가 얼마나 괴롭혔는데? 그래도 참았잖아. 왜겠어? 널 사랑하니까. 그런 여자는 달래기 어렵지 않아.”

성준이 문득 입을 열었다.

“헤어지자고 했어.”

“뭐?”

우찬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앞쪽 차량들을 보고 있던 성준의 목젖이 움직이면서 낮게 다시 말했다.

“나한테 메시지 보냈어. 헤어지자고.”

“헤어져?”

우찬은 멍하니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치지 마. 슬비가 너랑 헤어진다고? 말이 돼?”

“슬비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예전에 시연이 그렇게 괴롭혀도 네 곁을 안 떠났잖아. 이 정도 일로 헤어질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성준은 입을 닫았다.

우찬이 성준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 마. 그냥 화가 나서 성질 좀 부린 거야. 병원 가서 달래면 바로 풀릴 걸.”

잠깐 말을 멈춘 뒤, 우찬은 덧붙였다.

“게다가 슬비는 귀도 못 듣고 북명시에 의지할 사람도 없잖아. 너 말고 누구한테 기대겠어?”

성준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앞쪽 차량 사이에 머물렀고, 눈동자 깊은 곳에 뭔가 스쳐갔다.

...

30분 뒤, 차는 병원 앞에 멈췄다.

성준이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려 할 때, 붉은 그림자가 옆에서 뛰어나오면서 차문 앞을 막았다.

“오빠!”

시연이 차 밖에 서 있었다. 정성 들여 화장을 한 얼굴이었다. 넉넉한 니트에 짧은 치마를 입고, 드러난 하얀 종아리 아래 발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가련해 보이도록 꾸민 모습이었다.

“왜 나왔어?”

성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발 안 아파?”

“아파...”

시연이 입술을 깨물고 막 말을 하려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시연은 곧장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빠야! 어떡해? 또 나 혼낼 거야. 오빠가 받아 줘...”

성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핸드폰을 받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아버지...”

[성준이냐?]

전화 너머에서 잠시 말이 멎더니, 곧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연이는? 다친 곳은 어떠냐?]

성준은 아버지가 벌써 소식을 들었다는 사실에 입술을 다물었다.

“괜찮아요. 피부만 조금 긁혔고 심하지 않습니다.”

[심하지 않다니 됐다.]

강제선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어젯밤 일 들었다. 슬비가 시연이를 밀고, 뺨까지 두 대 때렸다지?]

성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 그런 게 아닙니다.”

[나는 과정은 따지지 않는다.]

강제선이 말을 잘랐다.

[시연이는 네 동생이야. 오 회장이 예전에 내 목숨을 구해 줬고, 시연이는 그 집의 하나뿐인 딸이다. 시연이를 괴롭히지 못하게 해라.]

아버지가 또 같은 말을 꺼내자 성준의 눈썹이 접혔다. 얼굴에는 짜증이 떠올랐다.

[또, 시연이가 어렵게 돌아왔는데 자꾸 데리고 돌아다니지 말고 집으로 데려와라. 나랑 네 엄마도 시연이를 보고 싶어 한다.]

성준이 막 뭐라고 하려는 사이에 전화는 이미 끊어졌다.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면서 성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시연이 성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빠, 나한테 화내지 마. 내가 잘못했어...”

성준이 계속 굳은 표정을 짓고 있자, 시연은 얼른 세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앞으로는 오빠 말 잘 들을게. 오빠가 하라는 대로 전부 할게.”

성준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다시는 슬비 괴롭히지 마. 슬비는 네 미래의 올케야.”

입을 삐죽거리던 시연은 곧 웃으면서 성준의 팔을 붙잡고 말을 돌렸다.

“아빠랑 엄마가 나 보고 싶어 한다며? 우리 집에 가자.”

성준은 병원 쪽을 한 번 바라봤다. 방금 슬비가 보낸 이별 메시지가 떠올랐다.

‘됐어. 잠깐 이대로 내버려 두자.’

‘그래야 제멋대로 화내는 버릇도 고치겠지.’

성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핸드폰을 시연에게 돌려줬다.

“가자.”

시연은 눈을 반짝이면서 얌전히 성준을 따라 차에 올랐다.

차문이 닫혔다.

성준은 고개를 숙여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지가 급히 찾으셔서 늦게 갈게. 잘 쉬고 있어.]

전송 버튼을 누른 성준은 곧바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메시지가 전송되지 않았다는 표시가 떠오른 것도 모른 채.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사랑에 미친 남편 조련법   제194화

    슬비는 얼굴을 붉힌 채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급히 떨쳐내고 아래층으로 향했다.계단 모퉁이를 돌자, 도우가 이재 앞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뭔가 보고하고 있었다.그런데 도우의 옷차림이 이상했다.슬비는 걸음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오늘 도우는 눈에 확 띄는 분홍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왁스를 발랐고 셔츠 단추도 위에서 두 개 정도 풀어서, 화보 속 재벌가 도련님처럼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슬비가 도우를 알게 된 뒤로는 사계절 내내 짙은색 정장만 입은 모습밖에 본 적이 없었다. 넥타이도 검정, 회색, 남색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화려한 색의 옷을 입은 건 처음이었다.슬비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틀림없이 도우의 얼굴이었다.계단 쪽 기척을 들은 이재가 고개를 돌렸다.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슬비를 보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서 허리를 감쌌다. “잘 잤어?”슬비는 아직 정신이 없어서 이재의 손이 허리께를 은근히 문지르는 것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다. “몸은 이제 안 뻐근하지?”그제야 정신을 차린 슬비가 이재를 노려봤다.요 며칠 이재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연고를 매일 밤 자기 전에 발라줬다.연고만 얌전히 발라주면 좋으련만, 조금 문지르다 보면 손이 자꾸 엉뚱한 곳으로 움직였고 결국 또 다른 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그래도 효과만큼은 확실했다.다음 날 아침이면 뻐근함이 절반 이상 사라졌고, 걸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는 일도 없었다.그렇다고 이재가 매일 그렇게 굴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회장님, 차 준비됐습니다.”현관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슬비는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굳었다.‘도우 씨가 둘이야?’‘이게 뭐지?’옷만 완전히 다르지 않았다면, 정말 눈앞이 둘로 겹쳐 보이는 줄 알았을 것이다.“정신 차려.”이재가 웃으며 슬비 눈앞에서 손을 흔든 뒤 분홍 셔츠를 입은 남자를 가리켰다.“도한이야. 도우의 쌍둥이 동생. 맡긴 일을 끝내고 막 돌아왔어.”도한이 환하게 웃으며 가지런한 이를 드러

  • 사랑에 미친 남편 조련법   제193화

    장여진과 원국한은 다시 서로를 바라봤다.이제는 둘 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돈을 뜯어내는 것도 아니고, 몸을 노린 것도 아니었다.이 정도면 부잣집 딸만 골라 접근하는 사기꾼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다만 도한이라는 남자가 정말 공작가의 자제라면, 이름이 지나치게 평범하다는 게 이상했다.도한... 어딘가 동네에서 흔히 들을 법한 이름이라 영국 귀족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그렇다고 사기꾼이라기에는 돈도 몸도 건드리지 않았어. 대체 뭘 노린다는 건가?’원국한이 한동안 생각하다 물었다. “정략결혼 상대가 누군지는 물어봤어?”지민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물어봤어. 자기도 모른대. 집안에서 정한 거래. 아빠, 나 영국 가서 도한이 찾을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원국한이 얼굴을 찌푸렸다. “거길 왜 가? 본인이 집안에서 정략결혼을 시킨다고 했다며. 네가 쫓아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지민이 다급하게 외쳤다. “도한은 내가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잖아! 집안 말을 거스를 수 없어서 그런 거야!”“그럼 기다려. 본인이 정리하고 돌아오면 그때 얘기해.”지민이 발을 굴렀다.“못 기다려! 다른 여자랑 결혼해버리면 어떡해? 내가 가서 다시 데려올 거야!”원국한은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눌렀다. “일단 며칠 집에 있어. 좀 진정하고.”“싫어! 지금 바로 비행기표 살 거야! 도한이 찾으러 갈래!”원국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민아! 그만 좀 해!”지민은 그 소리에 놀라서 잠시 굳었다가 곧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아빠 나한테 소리쳤어... 나 헤어져서 힘든데 아빠까지 왜 그래...”장여진이 급히 분위기를 달랬다. “됐어, 됐어. 아빠가 화낸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래. 며칠 집에 있으면서 엄마 아빠랑 좀 지내자. 얼굴 못 본 지 얼마나 됐는데.”지민은 훌쩍이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장여진은 딸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훑어봤다. “살 빠졌네. 밖에서 제대로 못 먹었지? 주방에 보양식 해두라고 할 테니까 이따 많

  • 사랑에 미친 남편 조련법   제192화

    슬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재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모기만한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만 말해요!”이재는 웃음을 터뜨리며 슬비를 식탁 옆까지 안고 갔다. 의자에 내려놓은 뒤 돌아서서 죽을 떠왔다.그 뒤로 사흘 동안 슬비는 집 밖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나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몸이 따라주지 못했다.이재는 겉으로 보면 차분하고 절제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번 선을 넘고 나니 처음 단맛을 본 사람처럼 끝을 몰랐다.낮에 이재는 그나마 좀 자제했다. 슬비가 피곤해하면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하지만 밤만 되면 이재가 달라졌다. 슬비가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울먹인 뒤에야 겨우 놓아줬다.첫날 밤에 이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당연히 지키지 않았다.둘째 날에 이재는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장담했다. 또 지키지 않았다.셋째 날이 되자 슬비도 배웠다. 이재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기로 했다.그런데 이재가 ‘진짜 마지막이야’라고 말할 때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눈빛도 깊어서 거절하기가 어려웠다.슬비는 또 믿었다.또 속았다.넷째 날 아침, 슬비는 허리를 짚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 속 쇄골에 새로 남은 키스마크를 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이제야 알았다. 소문이라는 건 정말 사람 잡는 물건이라는 걸.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인생을 망칠 뻔했다.‘앞으로 하이재가 마지막이라고 하는 말을 또 믿으면 내가 성을 갈겠어.’...이른 아침부터 원씨 본가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누군가 초인종을 요란하게 눌렀다.가사도우미가 얼른 뛰어가서 문을 열었다. 문이 조금 열리자, 밖에 있던 사람이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원국한과 장여진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가 소리에 놀라서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아빠!”지민이 눈이 새빨개진 채 뛰어 들어왔다. 마스카라는 번져서 눈가가 검게 얼룩졌고 모습은 몹시 지쳐 보였다.“지민아?”원국한이 급히 일어났다. 딸의 몰골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이게 무슨 꼴이야? 누

  • 사랑에 미친 남편 조련법   제191화

    슬비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쇄골 아래로 붉은 키스마크가 점점이 남아서 멀쩡한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숨을 크게 들이마신 슬비는 얼른 이불을 끌어와서 몸을 감쌌다. 귓불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어젯밤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차가운 통유리창 앞에 몸이 닿았을 때,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 뒤로 이재가 가까이 붙었다. 귓가를 스치는 거친 숨결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아직도 내가 못 한다고 생각해?”슬비는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 아예 누에고치처럼 온몸을 꽁꽁 감싸고 싶었다.‘창피해 죽겠어.’한참 이불 속에서 버틴 뒤에야 슬비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발이 카펫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휘청하면서 넘어질 뻔했다.슬비는 급히 협탁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두 다리가 뼈라도 빠진 듯이 흐물거렸다. 걸을 때마다 힘없이 떨렸다.벽을 짚은 채 한 걸음씩 욕실로 향했다. 움직일 때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묵직한 뻐근함이 올라와서 어젯밤의 일을 자꾸 떠올리게 했다.세면대 앞에 선 슬비는 거울 속 모습을 보고 자기 얼굴을 못 알아볼 뻔했다.뺨은 붉게 상기되었고 입술은 살짝 부어 있었다. 눈가에도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비를 맞고 난 뒤 더 짙어진 꽃처럼 유난히 화사해 보였다.가장 난감한 건 목이었다. 귓불 아래부터 쇄골까지 붉은 흔적이 촘촘해서 가릴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슬비는 입술을 깨물면서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을 두 손에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차가운 물방울이 턱 끝으로 흘렀지만 달아오른 뺨은 쉽게 식지 않았다.다 씻고 난 뒤, 드레스룸을 한참 뒤져서야 목이 높은 흰색 니트를 찾아냈다. 쇄골까지 딱 가려주는 옷이었다.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확인한 뒤, 키스마크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이재는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막 씻고 나온 듯 조금 젖은 앞머리가 눈썹 위로 느슨하게 내려와 있었다. 평소의 차가운 분

  • 사랑에 미친 남편 조련법   제190화

    슬비가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통유리창 가까이 닿았다. 눈앞에는 어두운 밤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야경이 아니었다.오히려 짙고 고요했다.바다는 먹빛처럼 어두웠고 멀리 작은 어선의 불빛 몇 개만 깜빡였다. 검은 벨벳 위에 흩뿌린 보석 조각과도 같았다.통유리창으로 쏟아진 달빛이 슬비의 몸을 은빛으로 감쌌다.뺨이 차가운 유리에 닿자, 내쉰 숨결이 유리 위에 얇은 김을 만들었다.유리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비쳤다. 흐트러지고 겹쳐져서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당신...”멈춰 달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생각과 다르게 떨렸다....몇 시간이 지난 뒤, 슬비는 이불 속에 푹 파묻힌 채 붉어진 귓바퀴만 조금 내놓고 있었다.이재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고개를 돌려서 이불 밖으로 나온 작은 귀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이불을 조금 아래로 끌어내렸다.슬비의 얼굴이 드러났다. 삶은 새우처럼 온통 새빨갰다.“왜요?” 슬비가 노려봤다. 목소리에는 한바탕 울고 난 뒤의 쉰 기운이 남아 있었다.‘아까 그렇게까지 그만해 달라고 했는데...’‘‘여보’라고 부르라고 해서 불렀고, ‘오빠’라고 부르라고 해서 불렀는데...’‘평소라면 입에 담지도 못할 민망한 호칭까지 전부 했는데...’‘그런데도 이 인간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어!’‘나쁜놈이야!! 진짜 너무해!!’‘입으로는 계속 나를 ‘여보’, ‘자기야’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달래놓고.’‘정작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이재가 조용히 웃었다. “답답할까 봐.”슬비는 이제 머리도 몸도 몽롱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고 싶었다.이재는 슬비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가 없었다. 몸을 조금 일으켜 내려다보니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길고 검은 속눈썹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날개를 접고 쉬는 검은 두 마리의 나비 같았다.이재는 희미하

  • 사랑에 미친 남편 조련법   제189화

    이재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슬비의 손바닥 아래에서 이재의 심장이 갑자기 빨라졌다. 쿵- 쿵- 자신의 심장보다도 더 빠르게 뛰었다.“네가 지금 뭘 하는 건지는 알아?” 목소리는 거칠게 잠겨 있었다.슬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팔을 풀지도 않았다.고개를 내린 채 속눈썹만 가볍게 떨렸다. 감추려고 해도 긴장과 당황이 그대로 드러났다.이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꼭 감은 채 짧게 숨을 고르는 모습은 마치 큰 결정을 앞둔 사람과도 같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동안 붙잡고 있던 절제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이재가 입을 맞추자 슬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지금까지의 가벼운 키스와는 달랐다. 깊고 거칠었다. 오래 눌러온 갈망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쏟아진 듯 슬비를 놓아주지 않았다.숨이 막힐 만큼 격한 키스가 이어졌다. 슬비는 두 손으로 이재의 가슴을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당신...”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 때마다 이재의 입술이 다시 말을 삼켰다.도망치려고 해도 팔이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어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생각은 점점 흐려졌다. 따뜻한 물속에 오래 잠겨 있는 듯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허리께에 닿은 이재의 손은 뜨거웠다. 얇은 드레스 천 너머인데도 피부가 델 것처럼 열기가 선명했다.불이 꺼졌다.커튼 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바닥 위에 은빛 길처럼 길게 누웠다.시트가 사각거리면서 이불이 뒤엉켰다.창밖에는 짙은 달빛이 머물렀고, 방 안의 밤은 길게 이어졌다....슬비는 언제 이재에게 안겨서 욕실로 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몸은 솜처럼 축 늘어져서 손 하나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욕조 안에 몸을 담그자 따뜻한 물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수증기가 피어올라서 시야가 흐릿했다.이재는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수건으로 슬비의 머리카락을 닦아주고 있었다. 손길은 아주 느리고 부드러웠다.슬비가 몰래 이재를 올려다봤다.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고 관자놀이를 따라 물방울이 흘렀다. 느긋하고 만족스러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