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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묵묵연화
이틀 뒤, 슬비의 몸에 난 상처는 대부분 가라앉았고 목소리도 돌아왔다.

그동안 성준은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대신 장여진이 호강시에서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원지민의 주민등록증이 들어 있었다.

슬비는 병실 창가에 서서 아래 도로의 차들을 바라봤다. 입가에는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

조롱 같기도 했고 체념 같기도 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희천이 들어왔다.

오늘은 하얀 가운을 입지 않았다. 짙은 회색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린 모습은 평소보다 차가움이 조금 덜하고 사람 냄새가 났다.

“퇴원 절차 끝났습니다.”

희천은 서류를 건넸다.

“가도 됩니다.”

슬비는 서류를 받아 내려다보고 낮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희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슬비의 얼굴을 보며 뭔가 말을 고르는 듯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다른 일이라도 있나요?”

“오늘 호강시로 돌아가요?”

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천은 드물게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잘됐네요!”

“네?”

슬비는 왜 희천이 그렇게 기뻐하는지 알 수가 없어 의아했다.

‘호강시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뭐가 잘됐다는 걸까?’

슬비의 의문 어린 시선을 본 희천은 손가락으로 콧등을 살짝 문지르며 헛기침했다.

“아, 그러니까... 얼른 가서 짐 챙기세요. 비행기 놓치면 안 되잖아요.”

“감사합니다.”

희천은 나간 뒤, 슬비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정리할 것도 많지 않았다.

침대 옆 서랍을 열자 벨벳 케이스 하나만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자 남자 반지가 들어 있었다. 은색의 단순한 디자인, 안쪽에는 ‘준·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뚜껑을 닫은 슬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침대 옆 쓰레기통에 던졌다.

...

슬비가 집에 돌아왔을 때, 하늘은 완전히 개어 있었다.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거실 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빛 속에서 어른거렸다.

슬비는 문가에 서서 지난 2년 동안 살았던 공간을 바라봤다.

거실 테이블에는 성준이 마시다 만 커피가 놓여 있었고, 컵 옆에는 아무렇게나 던져 둔 라이터가 있었다.

TV장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 슬비는 성준의 어깨에 기댄 채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 슬비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슬비는 시선을 거두고 침실로 들어가 옷장에서 캐리어를 끌어냈다.

짐은 많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 몇 벌, 여권, 충전기, 침대 옆 서랍에 있던 장여진과 찍은 사진.

슬비는 캐리어 지퍼를 잠그고 침실을 나왔다.

거실을 지나던 슬비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멀지 않은 진열장 위에는 호강시에서 북명시로 오는 비행기 표가 액자에 조심스럽게 넣어져 있었다.

2년 전, 슬비는 호강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성준을 따라 북명시로 왔다. 성준은 절대 후회하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슬비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천부적인 음감을 지닌 음악 전공 우등생이었고, 성준 때문에 청력을 잃었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웠을 뿐이다.

다시는 피아노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

자신이 쓴 곡을 다시 연주하지 못한다는 것.

무대 위에서 빛나던 자신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

하지만 이제는...

시선을 거둔 슬비는 캐리어를 끌어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뒤에서 닫혔다.

슬비는 돌아보지 않았다.

...

같은 시각.

병원으로 향하는 길.

성준의 미간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시연이 계속 붙잡는 바람에 몸을 뺄 수 없었다.

조금 전 슬비에게 메신저를 보내려다 차단당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야 마음이 불안해졌다.

성준은 슬비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모든 다툼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슬비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조용했다.

그 느낌이 성준을 괜히 초조하게 만들었다.

“슬비가 진짜 형을 차단했어?”

운전하던 우찬이 룸미러로 성준을 봤다.

성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우찬이 혀를 찼다.

“말이 안 되는데. 예전에도 싸운 적 많았잖아. 매번 먼저 고개 숙인 건 슬비였고.”

성준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다만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분위기가 좋지 않자, 우찬은 억지로 웃었다.

“내가 보기엔 슬비는 오래 못 버텨. 이틀쯤 지나면 혼자 마음 풀고 돌아올 걸. 슬비는 형 없이 못 살아.”

“입 닫고 운전이나 해.”

빨간불이었다.

우찬이 브레이크를 밟자 차가 천천히 멈췄다.

성준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정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턱선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차 안이 조용해졌다.

에어컨 바람 소리만 조용하게 울렸다.

그때 옆에 놓인 성준의 핸드폰이 울리면서 화면이 밝아졌다.

눈 빠른 우찬이 곧장 눈썹을 치켜세웠다. 말투에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

“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슬비가 오래 버틸 리 없다니까. 답장 왔지?”

마음이 살짝 풀린 성준이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슬비는 예전에도 성준에게 화를 낸 적이 있었지만 하루를 넘긴 적은 없었다.

늘 먼저 찾아온 것은 슬비였다.

이번에도 그래야 했다.

성준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부회장님, 새별엔터 쪽 대표 후보를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이전에 원슬비 씨와 강시연 씨가 각각 한 명씩 추천하셨는데, 어느 쪽으로 진행할까요?]

‘슬비가 보낸 메시지가 아니었어.’

성준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성준의 표정을 본 우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슬비 아니야? 이번엔 진짜 오래 버티네.”

성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 문장만 바라봤고, 눈에는 착 가라앉은 차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애초에 먼저 손을 댄 쪽은 슬비었다.

잘못은 슬비에게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성준은 며칠 동안 부모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부모 앞에서 슬비를 최대한 감싸 줬다.

그런데 슬비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쥔 성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마디가 하얗게 질질 정도였다.

그때 신호가 바뀌었다.

우찬이 차를 움직이려는데, 성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 사거리에서 차 돌려. 회사로 가.”

우찬이 놀랐다.

“병원 안 가? 슬비 안 볼 거야?”

“제법 컸네. 감히 날 차단해?”

성준은 차갑게 웃으며 핸드폰을 옆으로 던졌다.

“한번 혼나 봐야 정신을 차리지.”

우찬은 입술을 다물고 얌전히 차를 돌렸다.

그사이 성준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별엔터 대표는 진조운으로 확정해. 인사팀에서 제안서 보내.”

전화 너머에서 잠깐 말이 멈췄다.

[부회장님, 이전에 원슬비 씨가 추천한 주현석 씨가 평가 항목에서는 더 우수합니다만...]

“내가 일하는 데 설명까지 해야 하나?”

성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렇게 진행해.”

전화를 끊은 뒤, 성준은 창밖으로 빠르게 물러나는 거리 풍경을 바라봤다. 입가에는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성준도 주현석이 더 적합하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슬비가 자신이 추천한 사람이 밀려났다는 걸 알게 되면, 먼저 찾아올지 보고 싶었다.

‘강한 척해?’

‘날 차단까지 했지?’

‘내가 화가 났다는 걸 알고도... 원슬비, 네가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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