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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묵묵연화
그때 슬비는 막 북명국제공항에 도착한 참이었다. 슬비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선배.”

전화 너머에서 주현석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난감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슬비야, 방금 강명그룹 계열사 새별엔터에서 연락이 왔어. 대표 자리는 진조운으로 확정됐대.]

슬비는 걸음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캐리어를 끌고 앞으로 걸었다.

“그래요?”

현석은 슬비의 반응이 너무 담담해서 놀란 듯했다. 잠시 후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뭐야? 내 편 들어주는 말도 한마디 안 해? 네가 추천한 사람이 이렇게 밀려났는데도 화도 안 나?]

슬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선배, 이 일로 저한테 따지려고 전화한 거예요?”

[내가 그렇게 한가하진 않아.]

현석의 웃음이 사라지고 말투가 진지해졌다.

[강성준에게 알려주라고 전화한 거야. 진조운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슬비의 발걸음이 다시 느려졌다.

[예전 회사에서 자기 밑에 있던 신인 여배우를 괴롭혔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 여배우는 데뷔한 지 얼마 안 됐고 배경도 없어서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했지.]

[결국 그 여배우는 우울증이 심해져서 스스로 투신했어.]

현석의 목소리는 낮았다. 혐오가 섞인 말투였다.

[평소 같았으면 진조운 같은 쓰레기는 내 귀에 들어올 자격도 없었어. 후배 체면을 세워주려고 같이 이름을 올렸을 뿐인데, 네 남친이 이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네.]

슬비는 눈을 내리깔았다. 진조운에 관한 일은 슬비도 들은 적이 있었다.

성준에게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성준은 진조운을 골랐다.

슬비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알았어요, 선배.”

현석은 슬비의 말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왜 그래? 너랑 강성준...]

“헤어졌어요.”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곧 현석이 웃었다.

[잘했어.]

슬비는 잠시 멈칫했다.

[강성준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넌 좋은 남자를 만나야지.]

슬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머리 위로 공항 안내 방송이 울렸다. 탑승객에게 게이트로 이동하라는 안내였다.

[공항이야?]

“네. 호강시로 가요.”

[그래. 그럼 방해 안 할게. 나중에 이야기하자.]

“네.”

전화를 끊은 뒤, 슬비는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 로비에 서서 통유리 너머 활주로를 바라봤다. 살짝 웃음이 나왔다.

‘선배의 말이 맞아.’

‘강성준은 정말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아쉽게도 슬비는 그 사실을 깨닫는 데 2년이나 허비했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장여진이 보낸 메시지였다.

[슬비야, 엄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어볼게. 정말 대신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거니? 엄마도 너를 억지로 밀고 싶지는 않아...]

슬비는 그 문장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잠시 멈췄다.

[네, 확실해요.]

답장은 거의 곧바로 왔다.

[그럼 이게 하씨 집안의 그 둘째 도련님 하이재의 번호야. 먼저 연락해 보고... 조금이라도 가까워져 봐.]

슬비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번호를 복사하고 검색했다.

톡에 뜬 프로필은 완전히 새카만 사진이었다. 닉네임도 단순히 ‘H’ 한 글자뿐이었다.

프로필 사진도, 배경화면도 온통 새카맸다.

계정의 메시지는 물론, 아무런 정보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슬비는 이 계정을 하이재가 실제로 쓰는지조차 의심했다.

친구 추가를 누른 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하씨 집안의 차남 하이재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역시 꺼린다고 했다.

그에게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줄을 섰지만, 비서실 연락처 하나 알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말이 돌았다.

슬비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호강시로 향하는 승객 여러분께 안내를 드립니다. 탑승이 시작되었으니...”

로비에 탑승 안내가 울렸다. 슬비는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로 향했다.

비행기에 오른 뒤, 슬비는 좌석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봤다.

이 도시는 사랑에 대한 수많은 기대를 슬비에게 심어 준 곳이었다.

슬비는 이곳이 자신의 미래의 집이 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니... 슬비 혼자 품은 착각이었다.

정신을 차린 슬비는 핸드폰을 꺼내 비행기 모드를 켜려고 했다.

그때 메신저 알림 하나가 화면에 떴다.

[H님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대화를 시작해 보세요.]

슬비는 멍한 얼굴로 수락 시간을 바라봤다.

‘바로 받았다고?’

프로필을 다시 열고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하이재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잘못 누른 건가?’

‘아니면 핸드폰이 비서에게 있나?’

‘됐어. 설마 계속 날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겠지.’

슬비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

그날 오후 3시, 호강국제공항 로비.

슬비가 막 입국장을 빠져나왔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호강시 번호의 낯선 전화였다.

슬비는 전화를 받았다.

[원지민 씨.]

전화 속 남자는 조용하고 공손한 목소리였다.

[저는 하이재 회장님의 운전기사 주도우입니다. 회장님께서 원지민 씨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차는 3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비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이재?’

‘하이재가 어떻게 내가 호강시에 돌아온 걸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슬비는 캐리어를 끌고 3번 출구로 향했다.

길가에는 검은색 고급 세단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매끄러운 차체에 짙은 선팅이 된 창문에서는 조용하지만 확실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슬비가 나오자 운전기사 도우가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도우는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공손했지만 지나치게 굽히지도 않는 태도였다.

“짐 주십시오.”

도우는 캐리어를 받아 들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문이 열리자 맑은 시더 향기와 옅은 담배 냄새가 함께 밀려왔다.

슬비는 허리를 숙이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어두운 뒷좌석에 한 남자가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검은 실크 셔츠의 단추는 두 개가 풀려 있었고, 단단하고 하얀 목선이 드러나 있었다.

정장 차림에 긴 다리를 느슨하게 꼰 채 좌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리를 들은 듯 남자가 무심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닿자 슬비는 숨을 멈췄다.

지나치게 잘생긴 눈이었다.

깊은 쌍꺼풀에 길고 얇게 뻗은 눈매, 움푹한 눈가에 높게 솟은 눈썹뼈, 짙은 먹빛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까지 더해진 얼굴에는 사람을 쉽게 곁에 두지 않는 차갑고 건조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슬비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씨 집안 둘째 아들, 하이재.

“원... 지민 씨?”

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끝을 살짝 올린 말투는 왠지 장난기를 품은 듯했다.

슬비는 가슴이 철렁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하이재의 시선이 슬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불편해진 슬비가 눈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이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민등록증 있어?”

슬비는 멍해졌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요.”

말을 끝내고 나서야 대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는데 주민등록증부터 묻는다고?’

이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내 신분을 확인하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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