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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묵묵연화
슬비가 불안해하는 사이, 하이재는 시선을 거두고 가죽 시트에 몸을 깊게 기댔다.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

“타.”

슬비는 조금 안도하며 허리를 숙여 차 안으로 들어갔다.

차문을 닫자 습하고 더운 호강시의 오후 공기도 차단됐다.

검은 세단은 부드럽게 출발해서 공항 고속도로 흐름에 합류했다.

창밖으로 표지판이 빠르게 지나갔다.

원씨 저택으로 가는 방향도 아니고, 하씨 집안 본가로 향하는 길도 아니었다.

슬비는 2년 동안 호강시에 오지 않았지만 이 큰길의 방향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슬비는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하이재는 눈을 감고 기대어 있었다. 스쳐 지나는 빛과 그림자 속에서 옆모습은 더 날카롭게 보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실크 셔츠의 깃이 살짝 오르내렸고, 깊게 파인 쇄골 안쪽으로 아주 살짝 흉터가 보일 듯 말 듯했다.

“회장님...”

슬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이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청 민원실.”

슬비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혼인신고 하러.”

이재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가운데 팔걸이에 팔을 느슨하게 올렸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고, 드러난 손목에는 뼈마디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서늘할 정도로 흰 피부 아래로 푸른 혈관이 희미하게 비쳤다.

“부모님이 말 안 했어?”

이재의 말투는 평평했다.

“하씨 집안과 원씨 집안의 결혼은 이달 말로 잡혀 있고, 혼인신고 서류도 미리 준비돼 있어. 오늘 가서 서명만 하면 돼.”

슬비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대리 결혼은 이틀 전 갑자기 정한 일이었다. 떠밀리듯 온 터라 세부 사항을 알 리 없었다.

하지만 호강시에 내리자마자 시청으로 끌려갈 줄은 정말 몰랐다.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슬비는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저는 막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이재의 어둡고 깊은 시선이 슬비에게 머물렀다. 남자가 입술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 그냥 계약결혼이야.”

슬비는 멈칫했다.

이재는 시선을 돌렸다. 차창으로 흘러드는 빛 속에서 옆모습은 단단하고 차가웠다.

“우리 할머니 몸이 좋지 않으셔. 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어 하셔.”

이재가 말했다.

“기간은 1년. 서로 원하는 걸 얻는 조건.”

슬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결국 이 결혼은 거래였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뭔가요?”

이재가 다시 슬비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긴 눈동자는 한층 깊어 보였고, 그 안에는 잔뜩 긴장한 슬비의 모습이 작게 비쳐 있었다.

그 순간, 슬비는 그 시선에 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숨통이 가늘게 막히는 듯했다.

“하이재의 아내 역할을 잘하면 돼.”

말이 멎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가죽 시트를 가볍게 두드리자 ‘톡톡’ 소리가 났다.

“매달 생활비로 1억 원. 계약 기간이 끝나면 ‘예담만’ 단독주택 단지에 있는 집 한 채도 추가로 넘겨주지.”

이재의 시선이 슬비의 다문 입술을 스쳤다.

“원씨 집안의 문제도 내가 정리해 줄게.”

거절하기 어려울 만큼 좋은 조건이었다.

슬비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조용히 있었다.

“계약 기간 동안...”

슬비는 눈을 들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부부로서 해야 할... 그런 일도 해야 하나요?”

질문을 꺼낸 슬비의 옆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눈 아래로 드리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이재의 시선이 곧장 슬비의 얼굴에 머물렀다.

긴장으로 붉어진 귓끝, 살짝 깨문 아랫입술.

그리고 얇은 상의 브이넥 아래로 드러난 하얀 쇄골까지.

그의 시선이 잠시 거기에 머물렀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면서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나도 정상적인 남자라서.”

슬비는 순간 멍해졌다. 그 말뜻을 알아차린 순간, 귓불에 번진 붉은 기운이 목덜미까지 내려갔다.

“감당할 수 있겠어?”

슬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신 시집가겠다고 대답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이 물러날 길은 없었다.

“네...”

슬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

검은 세단은 해광대교를 지나갔다.

호강시의 높은 건물들이 창밖에서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차는 결국 회색 대리석 건물 앞에 멈췄다.

슬비가 고개를 들었다.

호강시청 별관.

호강시에서 가장 오래된 혼인신고 접수 기관 중 하나로, 언덕 위에 자리해 도심의 번화한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 건물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제복을 입은 직원 2, 3명만 조용히 서 있었다.

사람을 비워 둔 모양이었다.

이재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슬비가 직접 문을 열려고 할 때, 차문이 밖에서 열렸다.

문밖에 선 이재가 한 손을 차문에 얹은 채 슬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후 햇빛이 하이재의 뒤에서 비치면서 몸에 얇은 금빛 아우라를 둘렀다.

역광 속에 눈썹과 눈매는 그림자에 잠겼지만, 오히려 그 눈빛은 더 깊어 보였다.

슬비는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숙이고 차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자, 한 손이 슬비의 옆을 살짝 막아 주었다.

손끝은 닿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보호막처럼 솔비의 옆에 둘렀다.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웠다.

이재에게서 시더우드 향기와 옅은 담배 냄새가 함께 흘러왔다.

차갑고도 선명한 향기가... 슬비의 숨결 안으로 파고들었다.

“감사합니다.”

하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거두고 몸을 옆으로 틀어 슬비가 앞서 걷도록 했다.

“회장님.”

시청 별관 입구에서 중년 남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어두운 정장 차림에 가슴에는 혼인신고 담당자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전부 준비됐습니다.”

이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담담했다.

넓은 홀에는 냉기가 강했다.

책상 위에는 이미 서류가 놓여 있었고, 펜 두 자루가 벨벳 받침 위에 나란히 있었다.

슬비의 시선이 책상 위의 혼인신고서에 닿았다.

양식 속 ‘원지민’ 세 글자가 유난히 눈에 찔렸다.

담당자는 두 장의 서류를 밀어주며 서명란을 짚었다.

“정보를 확인하신 뒤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이재는 펜을 들었다. 펜끝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췄다가 곧 다시 내려갔다.

서명은 망설임 없이 날카롭고 단정했다.

종이를 베어 낼 마지막 획을 마치자, 불빛 아래 잉크가 차갑게 번쩍였다.

슬비 차례였다.

슬비는 펜을 받았다. 손끝은 차가웠다.

펜대에는 하이재의 손에서 남은 온기가 있었다. 미묘하게 뜨거웠다.

슬비는 고개를 숙이고 ‘원지민’라는 이름을 적었다.

서명은 조금 느렸다. 마지막 획을 쓸 때는 살짝 떨리기도 했다.

담당자는 서류를 받아 들고 키보드를 두드려 자료를 불러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 원지민의 주민등록증 사진이 떴다.

슬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담당자의 눈썹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곧이어 시선은 화면과 슬비의 얼굴 사이를 오갔다.

방 안의 분위기가 굳어졌다.

긴장한 슬비가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손바닥에 깊이 박혔다.

‘끝났어!’

‘이렇게 허술한 거짓말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하씨 집안이 어떤 집안이고, 하이재가 어떤 사람인데...’

대신 시집가는 이런 조잡한 수작은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들통날 것이다.

‘어떡하지?’

‘원씨 집안의 마지막 살길을 내가 끊어 버린다면, 하이재의 분노는...’

톡톡-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슬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재는 여전히 의자에 몸을 기댄 채였다.

자세는 오히려 한층 더 느긋해 보였다.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 이재가 담당자를 귀찮다는 듯 훑어보았다.

이재의 눈빛은 속을 알 수 없이 깊었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 있지 않았다.

잔물결 하나 없는 깊은 바다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압박감이 가라앉아 있었다.

담당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면서 하려던 말은 그대로 목 안에 걸려 버렸다.

호강시에서 하씨 집안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하씨 집안 둘째 아들, 하이재를 거스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슬비가 이재와 함께 온 이상, 담당자 역시 크게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요즘은 성형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원지민 씨 얼굴이 예전과 달라졌을 수도 있지.’

이재가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담당자는 더는 시간을 끌지 못했다.

마우스를 몇 번 빠르게 클릭한 뒤, 책상 한쪽에 놓인 도장을 집어 들었다.

탁!

혼인신고서 한쪽에 접수 도장이 선명하게 찍혔다.

“두 분, 축하드립니다.”

담당자는 접수증을 두 손으로 건네며 공손히 웃었다.

“신고는 정상적으로 접수되었습니다. 처리 결과는 며칠 뒤에 확인하시면 됩니다.”

슬비는 아직 도장 잉크 냄새가 희미하게 남은 접수증을 멍하니 받아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질 줄 알았던 위기를 이렇게 조용히 넘어갔다고?’

‘이건... 운이 너무 좋은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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