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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묵묵연화
슬비는 이재를 따라 시청 별관을 나섰다.

호강시의 오후 햇빛은 눈이 시릴 만큼 환했다.

공기에는 습한 열기가 떠다녔고, 찬 기운이 가득했던 실내와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검은 세단은 길가 나무 그늘 아래 조용히 서 있었다.

이재는 뒷좌석 문을 열고 옆에서 기다렸다.

나뭇잎 사이로 샌 햇빛이 눈가에 잘게 내려앉았다.

그 자리에 선 이재는 마치 칼집에 들어 있는 칼과도 같았다.

차분했지만 언제든 빠져나와서 누군가를 베어 버릴 것 같았다.

슬비가 몸을 숙여 차에 오를 때, 이재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다는 걸 느꼈다.

무겁게 압박하진 않았지만 존재감은 강했다.

“먼저 본가로 가자. 할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셔.”

이재도 따라 차에 올랐다.

차문이 닫히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깥의 더위도 끊어졌다.

고개를 끄덕인 슬비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때 가방 속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북명시에서 걸려 온 낯선 번호였다.

슬비는 멈칫하면서, 좋지 않은 예감이 마음을 찔렀다.

‘하필 이런 때...’

이재의 시선이 가볍게 스쳤다.

슬비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같은 번호가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슬비는 입술을 꽉 깨문 뒤 손끝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슬비야!]

받자마자 성준의 초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며칠 동안 억눌린 분노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퇴원했는데 왜 집에 안 와? 어디 갔어? 내가 전화를 몇 통이나 했는지 알아?]

슬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반사적으로 옆을 봤다.

이재는 언제 시선을 거뒀는지, 고개를 숙인 채 손 안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고, 슬비를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 잔잔한 존재감 때문에 슬비는 왠지 압박감을 느꼈다.

슬비는 바로 핸드폰을 조금 멀리 떼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슬비야, 성질부리는 것도 정도껏 해!]

성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날 일은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네가 시연이를 때렸고, 우리 부모님이 며칠째 시연이한테 사과하게 하라고 난리야...]

[됐어,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하자.”

‘강시연에게 사과하라고?’

그 말이 촘촘한 바늘처럼 슬비의 손끝을 저리게 했다.

갑자기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깍-

슬비가 입을 열기 전, 옆에서 가벼운 소리가 났다.

슬비가 반사적으로 옆을 봤다.

이재가 어디선가 작은 약병을 꺼내 들고 있었다. 병에는 아무런 라벨도 없었다.

이재는 병뚜껑을 열고 하얀 알약 두세 알을 손바닥에 덜더니 보지도 않고 입에 넣었다.

턱선이 단단히 굳어지면서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 알약을 그대로 씹어 부수고 있었다.

조용한 차 안에서 알약을 씹는 소리는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 거칠고 야수 같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슬비는 멍해졌다. 전화기 너머에서 떠드는 성준마저 잠시 잊었다.

‘무슨 약을 저렇게 먹지?’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이재는 슬비를 옆눈으로 훑더니, 눈썹을 살짝 세우면서 손에 든 약병을 슬비 앞쪽으로 내밀었다.

“먹을래?”

슬비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약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어?’

전화 너머의 성준도 남자 목소리를 들은 듯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네 옆에 누구야? 지금 누구랑 있어?]

슬비는 더 떠들 틈을 주지 않았다. 곧바로 통화를 끊고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차 안은 곧장 조용해졌다. 에어컨 바람 소리와 옆자리의 남자에게서 풍기는 강한 기운만 남았다.

“남자친구?”

이재가 갑자기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아니요.”

슬비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 남자친구예요.”

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살짝 ‘음’ 하고 대답할 뿐.

말끝을 살짝 올렸는데, 슬비의 말을 믿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시선은 슬비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뭔가 살피는 기색이었다.

조금 뒤, 이재는 시선을 거두고 창밖으로 빠르게 스치는 거리 풍경을 봤다.

말투는 다시 평소처럼 잔잔했다.

“혼인신고까지 마쳤으니, 몇 가지는 미리 정해 둬야겠지.”

이재의 말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한 글자씩 차분하게 말했다.

“첫째, 계약 기간 동안 원지민 씨의 신분은 내 아내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에서 선을 지켰으면 좋겠어.”

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둘째, 하씨 집안은 원래 관계가 복잡해.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말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일에는 손대지 마. 누가 괴롭히면 나한테 말하고.”

“네.”

“셋째.”

이재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슬비를 쳐다봤다.

깊은 눈빛이 슬비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표정 하나까지 새기려는 듯했다.

“사생활은 깨끗하게. 원지민 씨의 과거는 묻지 않겠어. 앞으로는 보면 안 될 사람, 들어선 안 될 말이 내 눈과 귀에 닿지 않게...”

윗사람의 명령처럼 직접적이고 단호한 말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슬비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회장님께서도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이 계약에 동의한 이상 정해 둔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회장님께서도 똑같이 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이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뜻밖의 반격이라는 듯이.

이재는 슬비를 슬쩍 바라보면서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 너무 짧은 순간이라서 마치 착각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이지.”

해야 할 말을 모두 끝내고 나자,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슬비는 창밖으로 익숙한 ‘예담만’ 단독주택 단지 도로를 보면서, 심장이 조금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하씨 집안의 최고 어르신을 만나야 했다.

호강시에서 전해지는 소문에서, 하씨 집안의 많은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그분.

...

같은 시각, 북명시.

성준은 또다시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노려봤다. 낯빛은 무쇠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세 개의 번호로 바꿔서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전원 꺼짐 안내뿐이었다.

“젠장!”

핸드폰이 벽으로 세게 날아가더니, 곧바로 화면에는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룸 안은 곧장 조용해졌다.

친구들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누군가 조심스럽게 술잔을 내밀었다.

“화 좀 풀어. 슬비 성격 몰라? 며칠 지나서 화가 풀리면 알아서 돌아올 거야.”

“그래. 그렇게 널 좋아하는데 진짜 도망가겠어?”

성준은 위스키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운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도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를 수가 않았다.

성준은 초조하게 셔츠 깃을 풀었다.

그때 누군가 핸드폰을 보다가 혀를 찼다.

“호강시 하씨 집안 그 둘째 아들, 이번 달 말에 결혼한다는데?”

“하씨 집안 둘째 아들? 거의 죽을 병이라더니 결혼은 할 수 있대?”

“액막이 결혼이라나 봐. 상대는 원 회장댁 장녀, 이름이 원... 원지민? 어, 성준아. 이 원씨 일가, 슬비랑 관계 있지 않아?”

술잔을 쥔 성준의 손이 곧바로 멈췄다.

‘원지민?’

‘슬비의 의붓언니잖아?’

“원씨 집안이 언제 하씨 집안이랑 엮였대?”

누군가 혀를 찼다.

“하씨 집안은 진짜... 호강시의 오래된 명문이잖아. 북명시의 소위 재벌이라는 집들도 그 앞에서는 벼락부자처럼 보일 정도고.”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맞아. 듣기로는 하이재가 18살 때 이미 집안 사업의 절반 이상을 넘겨받았다더라. 정계와 재계는 물론이고, 드러나지 않은 쪽까지 손이 뻗어 있다던데. 그런 사람은...”

흐려진 말끝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북명시에서는 권력과 돈이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하씨 집안은 달랐다.

그 집안은 오래전 격변기부터 호강시에 뿌리를 내린 거대한 세력이었다.

전쟁과 이주,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가지를 더 넓혀 왔고, 이재 대에 이르러서는 하늘까지 가릴 듯한 기세였다.

“성준아.”

누군가 농담하듯 말했다.

“그럼 너도 하씨 집안이랑 사돈 되는 거야? 나중에 호강시에 가면 우리 좀 봐줘야 해.”

성준은 입꼬리만 슬쩍 움직일 뿐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

그때 다른 사람이 문득 끼어들었다.

“근데 요 며칠 슬비를 못 찾았잖아. 혹시 호강시로 언니 결혼식 보러 간 거 아니야?”

그 말을 듣자 성준이 미간을 다시 찌푸렸다.

“우찬아, 슬비 항공편 좀 확인해 봐.”

“바로 알아볼게.”

30분 뒤, 우찬이 전화를 끊고 성준을 돌아봤다.

“확인했어. 슬비 오늘 호강시로 갔어.”

성준은 잔 속의 술을 흔들었다.

방금 전화에서 들렸던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르면서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잔을 들고 술을 단숨에 비웠다.

“호강시 가는 비행기 표 하나 끊어.”

‘슬비가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난 모양인데...’

‘그래도 내가 직접 데리러 가면, 그 정도면 화를 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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