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0화

Author: 임공
아르바이트가 없어졌으니, 지시연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했으며, 가능한 한 빨리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시연이 예상한 바와 같이, 그녀는 실습 업무 자체로도 매우 바빴고, 시간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시연은 일주일간 틈틈이 일자리를 찾았는데, 배가 고프면 빵을 두 입 먹을 뿐이어서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그녀는 오늘도 야근하고 나서 일자리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

“시연아.”

같은 실습의인 주하은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준수 선생님께서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

시연은 멍해졌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알아?”

“모르겠어.”

주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만 채혈하러 가봐야 해. 너도 얼른 가봐.”

“그래, 알겠어.”

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날이랑 상황이 비슷한 것 같은데...’

그녀는 곧바로 오준수의 사무실로 갔다.

오준수는 전문의이자 의대 실습의의 총책임자였다.

시연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오 선생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녀를 한 번 바라본 오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약간의 의혹을 품은 채 입을 열었다.

“시연아, 병원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너더러 실습이 중지됐으니까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고 하더라.”

시연이 온몸을 떨며 눈동자를 움츠렸다.

“왜... 요?”

오준수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다, 학교 측에 물어보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만 돌아오더라고.”

총책임자이던 그는 시연이 실습의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론이든 수술 실습이든, 흠잡을 데가 없는 학생이었는데...’

오준수도 곤혹스러워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감도 안 오는 거야?”

‘제가 무슨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시연은 갑자기 심장이 꽉 조이는 듯했다.

‘틀림없이 고유건의 짓이야!’

시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병원에 말씀 좀 해주시면 안 돼요?”

오준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원 의료부면 우리 쪽의 책임 교수님도 손을 써보겠지만, 병원 행정실 측의 지시니까 나도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오준수의 사무실에서 나온 시연은 온몸에 오한을 느꼈다.

‘그래, 고유건이 그랬잖아... 내가 대가를 치르게 하는 만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만 가지는 무슨, 이거 하나로도 충분해!’

‘실습하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고, 졸업을 못 한다면... 요 몇 년 동안의 공부가 물거품이 되는 거야!’

‘그 사람이 망친 건 내 미래라고!’

‘안 돼, 고유건이 내 인생을 망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어!’

‘어떻게든 그 사람을 만나서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해!’

시연이 벌벌 떨며 핸드폰을 꺼냈고, 유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전화 받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연이 눈을 가리자,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체 왜? 운명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야?!’

‘친아빠와 새엄마 모녀는 10여 년 동안 우리 남매를 잔인하게 괴롭히고, 악의적인 일을 서슴치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사하잖아.’

‘그런데 나는 딱 한 번 복수했을 뿐인데,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진다고?’

하지만 시연은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고유건이 전화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겠냐고!’

‘그래, 방법은 고 어르신의 병실을 지키고 서 있는 거, 그거 하나뿐이야.’

고유건은 고상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해서 아무리 바빠도 매일 병원을 방문했다.

시연은 즉시 VIP 병동으로 가서 기다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병동의 아래층에 도착하자마자 주지한의 뒤를 따라 입구를 나서는 고유건을 보았다.

시연은 눈동자에 엷은 핏빛을 띠며 그의 앞으로 돌진했고, 다시 한번 조심스럽고 비열하게 입을 열었다.

“고유건 씨,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유건은 얇은 입술을 오므린 채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주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무슨 얘기?”

시연은 심장이 살짝 조여오는 것 같았다.

“사과하러 왔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뭐든 할게요.”

그녀의 자존심과 증오감은 그의 권력 앞에서 언급할 가치가 없었다.

유건이 아주 가볍게 냉소했다.

“그걸 이제야 안 거야? 그런데 어쩌지? 이미 늦었는데.”

그가 손을 들어 시연의 아래턱을 움켜쥐었다.

“나한테 도발할 용기를 냈으면, 감당할 능력도 있었어야지.”

“혹시...”

고통을 감내하던 시연은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내가 어떤 부탁을 해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래.”

그의 단호한 대답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두 사람이 눈을 마주한 채,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시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인정할게요, 전에는 내 생각이 틀렸어요. 그러니까 고유건 씨가 나를 상대하려는 것도 내 업보인 거죠.”

“하지만, 이 말을 꼭 해야겠어요.”

“고유건 씨는 한 사람의 미래, 더 나아가서는 인생 전체를 완전히 망가뜨리려 하면서도,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어요. 고유건 씨, 당신은 정말 최악이에요!”

‘정말 싫어, 지동성, 장미리, 그리고 장소미가 생각날 만큼!’

‘고유건과 장소미, 두 사람은 진짜 천생연분이야!’

순간, 시연은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듯했다.

“이혼하고 싶다고 했죠? 잘 들어요, 꿈 깨시라고요!”

그녀는 이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달아났다.

순간, 눈동자를 움츠린 고유건의 얼굴에 폭풍우가 치기 전의 어둠이 깔렸다.

‘뭐라고? 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구나!’

분노가 가슴에 쌓인 유건이 다리를 들어 길가에 놓인 쓰레기통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우당탕'하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옆에 있던 지한은 감히 나설 수 없었다.

...

시연은 기숙사에 가지 않고 진아의 집으로 달려갔다.

“진아야, 이제 나 어떡하지?”

그녀가 눈을 붉히며 실습이 중단된 사실을 알렸지만, 고유건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왜 그런 일이 생긴 거야?”

진아는 그녀를 위해 진심으로 조급해했다.

“이건... 성빈이한테도 알려야 해.”

실습이 중단된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사실, 진성빈은 진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는데, 그들과 달리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응.”

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성빈은 그저께 L시에 갔기 때문에 G시에 없었다.

진아는 곧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그제야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내가 우선 사람을 시켜서 똑똑히 알아볼게.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줘.]

“알겠어.”

전화를 끊은 진아가 시연의 손을 잡았다.

“성빈이를 믿고 기다려 보자.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응.”

시연은 점차 냉정함을 되찾았다.

요 몇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한 시연에게 이 정도 일은 버틸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진아는 시연이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할까 봐 기숙사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다음 날.

진아가 출근한 후, 시연은 정신없이 전문 서적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핸드폰이 울리며 고상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2초 동안 머뭇거리던 시연이 전화를 받았다.

“어르신...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

고상훈이 미소를 지으며 시연에게 물었다.

[시연아, 지금 어디니? 할아버지한테 좀 와보거라.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안 되겠니?]

“아니에요, 지금 바로 갈게요.”

비록 시연은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고상훈의 제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시연은 세수하고 간단히 단장한 후, 강울대학교병원 VIP 병동으로 향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476화

    “응, 좋아.”“이렇게 하면요, 내일 유건 씨 공항 갈 때 딱 하고 갈 수 있어요.”“그래. 하고 갈게.”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정성스럽게 목도리 마무리 코를 잡았다.“다 됐어요.”그리고 다시 유건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며 말했다.“예쁘든 안 예쁘든 이렇게 가야 해요. 싫다고 하면 안 돼요.”“싫을 리가 없지.”어떻게 싫을 수 있을까?“눈이 정말 많이 오네요. G시는 눈이 올까요?”“왔어. 꽤 많이.”“그래요? 그럼 조이가 아주 좋아했을 텐데... 진아랑 부 대표님이 조이랑 같이 눈사람 만들어줬겠죠?”“내가 돌아가면, 만들 거야. 이를테면 우리 세 가족 같은 거.”“좋아요.”밖에서는 눈이 조용히 쌓이고, 방에서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유건도, 시연도 말하지 않은 채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유리창 너머의 하얀 정원을 바라봤다....새벽 5시 조금 넘은 시간.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하얀 눈발의 기운만 유리창을 통해 은은히 들어왔다.방 안은 불을 켜지 않아 흐릿한 그림자만 깔렸다.유건이 먼저 눈을 떴다.옆에 잠든 시연을 내려다보고 조심스레 품에서 떼어 소파에 눕히고, 부드러운 담요를 덮어주었다.“시연...”유건은 아주 작게 이름을 불렀다.허리를 굽혀 점점 길어지는 시연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나 간다...”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유건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깨우진 않을게. 혼자 가면 돼. 굳이 나 배웅 안 해도 돼. 나는...”유건은 이별의 순간을 버티지 못할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여기서... 이대로 인사하자.”유건은 몸을 숙여 시연의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살짝 넘기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리고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시연... 잘 있어.”유건은 천천히 일어섰다.시연을 깊게, 오래 바라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크게 걸음을 내디뎠다.심지어 문소리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소파에 누운 시연은 눈을 꼭 감았지만, 떨리는 어깨를 숨길 수는 없었다. 눈물이 조용히, 눈가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475화

    유건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말했다.“그동안, 많이 힘들었지?”[나한테 그런 말은 하지 마...]“아니야.”유건은 진심으로 고마웠다.하지만 또다시 지하에게 부탁해야 했다.“이틀만 더. 딱 이틀만 더 고생해 줘.”[또 기다리라고?]“응. 아직... 할아버지 유골함을 기다리고 있어.”그 말을 들은 순간, 지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건이 그 일을 위해 CA국까지 갔었다.그런데 빈손으로 돌아올 순 없지 않은가.[알겠다.]지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 돌아오고 나서 뭔가 이상하게 되어 있더라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그건 당연하지.”전화를 끊자, 유건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고상훈의 유골함을 위해 온 게 맞지만, 지금 유건의 마음은 복잡했다.고장민이 유골함을 어디 숨겨뒀는지 몰라서 경찰과 레오의 사람들은 계속 찾고 있었다.유건 마음속엔 아주 불효한 생각마저 스쳤다.‘조금만... 조금만 더 늦게 찾아도 괜찮아.’그렇게 되면 시연과 함께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니까.이 꿈 같은 유토피아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으니까. ...승하는 경찰서에서 유건을 만나고 난 뒤 바로 죄를 인정했다.이제 고장민은 꼼짝없이 끝이었다.그리고 마침내, 레오의 부하들은 고상훈의 유골함을 찾아냈다.부드러운 천으로 덮어 조심스레 들고 와 유건 앞에 내밀었다.“고맙습니다.”유건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서 들었다.며칠, 몇 주 동안 조여 있던 마음이 그제야 제자리로 내려앉았다.“할아버지, 제가... 모시러 왔어요.”유건의 바로 뒤에서 시연은 조용히 눈시울을 적셨다.부명주는 딸의 팔짱을 살짝 끼며 낮게 속삭였다.“듣자 하니, 고장민 침대 밑에서 나왔다더라.”“네...?”시연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어쩐지 지금까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고장민과 그 집안은... 정상이 아니었다.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수준이었다.그래도 이제 모두 끝났다.하지만 시연은 유건을 보며 마음이 먹먹했다.‘이 사태가 끝났다고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474화

    시연은 결국 참지 못했다.“푸하하...”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나 놀리는 거야?”유건도 웃으며, 시연을 꼭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나 많이 냄새나?”“네, 맞아요!”“맞아?”“하하하...”유건 품 안에서 시연은 아무리 몸을 비틀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잘못했어요... 하하...”“이제 그런 말 안 할 거야?”“안, 안 해요... 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하하하...”한바탕 웃고 떠든 후, 결국 유건도 자기 체취에 눈썹을 찡그렸다.그러고는 얌전히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했다. 다시 내려왔을 때, 다이닝룸에는 향긋한 냄새가 퍼져 있었다.가사도우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시연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씻고 왔어요?”시연은 정좌한 채 맞은편을 가리켰다.“앉아요.”유건이 자리에 앉아 보니, 앞에는 파스타 한 접시와 보르시 수프.시연 앞에도 같은 메뉴였고, 그 두 사람 사이엔 큼지막한 양다리 구이가 놓여 있었다.“상 엄청 푸짐한데?”“그럼요.”시연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얼른 먹어봐요. 맛있는지.”“응.”유건은 별생각 없이 포크로 면을 한 입 먹고, 수프도 한 숟가락 떴다.“어때요?”시연이 기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좋은데...”그제야 유건은 문득 생각이 미치며, 믿기지 않는 듯 시연을 바라봤다.“이거... 네가 한 거야?”“히힛.”시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네.”“대단한데.”유건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솜씨 좋아졌네.”“그럼요.”시연은 턱을 자랑스럽게 들고 말했다.“지난 며칠 동안 유건 씨 따라다니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거, 괜히 한 일이 아니었어요. 저 똑똑해요. 전에는 그냥 안 배운 것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못 배우는 게 어디 있어요?” “그래?”유건은 웃음을 참으며, 가운데의 양다리 구이를 가리켰다.“이것도 네가 했어?”“네에...”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약간 죄지은 얼굴이 되었다.“크흠, 손질하고 양념한 건 아주머니가 하셨어요...”“아, 그러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473화

    순간, 승하가 손을 들어 뺨을 감싸 쥐었다.“아...”승하가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젠장! 고장민이랑 심화연, 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아...”유건은 울고 있는 승하를 보며, 예전에 승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승하는 다시 고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피를 잇는 자식으로서 인정받고 싶어 했다.그리고 그날, 유건 어머니의 묘비 앞에 홀로 서서 절을 올리던 그 모습까지...창백하게 질린 승하의 얼굴을 보며 유건의 마음속에서 무거운 의문들이 쌓여갔다.결국 입을 열었다.“네 몸... 왜 그래?”“응?”승하가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들었다.“나 말이야?”아직 눈물 자국도 마르지 않은 얼굴로, 승하가 웃었다.“봤어? 나 말이야, 곧 죽어. 고장민이랑 심화연이 사람 짓을 안 한 벌, 다 나한테 떨어졌지. 하하하...”유건은 시선을 거두고 뒤돌았다.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답답했다.이제 유건은 떠나도 됐다.레오가 불러온 변호사가 이미 모든 서류를 처리해 놨고, 기사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렇게 문을 나서는데, 거기 또 한 사람이 있었다.바로 고장민이었다.“유건아!”유건은 차갑게 눈을 들어, 자신에게 달려오는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그렇다. 노인이었다.며칠 보지 않았을 뿐인데, 고장민은 눈에 띄게, 놀랍도록 급격히 늙어 있었다.유건 앞에 선 고장민은 어디에다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서 어색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이었다.“그... 너, 너... 잘 있었냐?”유건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당신이라면, 들어가서 고승하 안 만날 거야. 당신 안 보면, 고승하가 며칠은 더 버틸지도 모르잖아.”그 말만 남기고, 유건은 더 말하지 않았다.뒤돌아 걸었다.고장민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 섰고, 그 한순간 사이에 또 열 살은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왜 이렇게 안 오지?”별채 안에서, 부명주는 시연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시연은 아침부터 연락받았다.오늘 유건이 돌아온다고.하지만 어느덧 거의 정오였다.마침내 검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472화

    유건은 말없이 승하를 바라보았다.‘뭐가... 그렇게 싫다는 거지?’“싫다고. 내 부모!”승하는 수갑 찬 두 손을 들어 올리더니, 금속이 쾅 하고 책상에 부딪힐 만큼 세게 내려쳤다.핏기 하나 없는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지며,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증오가 그대로 드러났다.“너희, 상상이나 해봤어?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들이랑... 얼마나 오랫동안 억지로 살아야 했는지!” 그 말에 유건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내려앉았다.‘그 둘... 고장민, 심화연.’유건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이상해?”승하는 유건의 눈빛을 읽은 듯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난 운이 없는 거지, 대가리가 없는 게 아니야. 너도 싫어하고, 할아버지도 버린 인간들인데... 내가 어떻게 좋아하겠어?”승하는 한순간 숨을 고르고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안 가고 싶었어. 고장민이랑 심화연 따라가고 싶지 않았어. 나한텐 할아버지도 있었고, 날 사랑하던 엄마도 있었고, 똑똑한 동생도 있었는데...”승하는 고개를 떨궜다.“근데 선택지가 없었어. 할아버지는 날 버렸고, 엄마는 날 미워했어. 그런 내가... 어디로 가겠냐?”유건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가슴 깊이, 묘한 무언가가 밀려왔다.“도망친 적 있어.”승하가 고개를 들어 유건을 보았다.눈동자가 이상하게 반짝거렸다.“한 번이 아니야. 여러 번. 진짜 여러 번. 근데 어린 내가... 어디까지 가겠어? 고장민이랑 심화연한테서 벗어나면, 나는 살 수가 없었어. 하, 웃기지?”승하는 자신을 비웃듯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러니까 도망쳐도 결국 돌아가는 거야. 싫어 죽겠는데, 붙어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한테.”이어지는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엄마가 죽고, 그 둘 옆에 있어야 했던 매일이... 다 지옥이었어. 매일, 매순간...”유건의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승하는 갑자기 이를 꽉 물며 말했다.“심화연은 죽어 마땅해.”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친언니 남편이랑 몰래 붙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1471화

    유건의 손바닥이 시연의 양 볼을 부드럽게 감싸 올렸다.입가까지 차올랐던 말들이 너무 많아, 막상 내뱉으려니 몇 마디밖에 남지 않았다.“잘 있어. 이틀이면... 금방 돌아올 거야.”“네.”시연은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였다.“나... 유건 씨 목도리 뜨고 있을 거예요.”유건의 눈매가 금방 풀리며 웃음이 번졌다.“토마토색이랑 같은 빨간색, 나 진짜 좋아해. 내가 돌아오면... 그 목도리 바로 쓸 수 있을까?” “음...”시연은 잠깐 망설이며 말했다.“최대한 노력해 볼게요.”입술을 꼭 깨물고 난 뒤, 유건은 시연의 볼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나 간다.”“네...”시연은 애써 밝게 대답했지만, 그 아쉬움은 숨길 수 없었다.“걱정하지 마라.”레오가 조용히 말했다.“이미 다 조치해 놨어. 제임스가 고 대표 괴롭히는 일 없게 내가 보증할게.”시연은 유건이 작은 별채를 나서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문이 닫히는 순간, 별채는 마치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그날 밤.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시연은 잠이 오지 않았다.레오가 보증했다고 해도 유건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마음이 가라앉을 리 없었다.결국 시연은 포기하고, 무릎 위에 실뭉치를 올려놓고 밤새 목도리를 뜨기 시작했다.한 코, 한 코.실을 넣고, 빼고, 또 넣고.‘이렇게라도 해야 불안이 좀 사라지는 것 같아.’...경찰서.조사는 순조로웠다.이틀 밤낮의 취조 끝에 기환의 진술과 경찰의 조사로 승하의 죄는 거의 확정적이었다.문제는 승하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들숨과 날숨조차 미동이 없고, 마치 오래된 쇠문처럼 마음을 닫아 버렸다. 그러던 중, 밖에서 누군가 들어와 제임스에게 속삭였다.“제임스 경무관님, 레오 회장님 쪽에서 묻습니다. 고 대표님... 돌려보내도 되냐고요.”제임스가 ‘가능합니다’라고 말하려고 할 때, 승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날 듯 몸부림쳤다.“누구라고?”수갑으로 의자에 고정돼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제임스에게 달려들 기세였다.“너 말고.”제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