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대표님, 사모님 오셨으니까 더 이상 두 분 시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사모님’이라는 말이 유건의 신경을 간질였다. 순식간에 기분이 풀리며 경비원들이 한결 곱게 보였다.유건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수간호사에게서 신분증을 받아서 들며 말했다.“우리 아내 피곤하니까, 먼저 가보겠습니다.”“네, 편히 가세요.”경비원 둘은 안도한 듯 허리를 폈다.“여보.”유건은 자연스럽게 시연의 손을 잡았다. 주위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가자.”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경비팀을 나섰다. 먼저 병동에 들러 가운을 갈아입고서야, 유건과 함께 호텔로 향했다.그런데, 호텔로 오는 길 내내 유건은 마음이 불편했다.경비실을 나설 때부터 지금까지, 시연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방에 들어서자, 시연은 가방을 내려놓았다.“시연.”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와서... 기분 나쁜 거야?”“아니에요.”시연은 고개를 저었지만, 화난 얼굴도 기쁜 얼굴도 아니었다.“시연...”유건은 두 팔을 벌려 시연을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이 냄새야... 네 냄새. 며칠 못 봤더니 미치는 줄 알았어.”“그래요?”시연은 얼굴 반쯤을 유건 어깨에 파묻은 채, 낮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응, 그래.”유건은 여전히 그 순간에 취해 있었다.그런데, 시연이 품 안에서 살짝 몸을 움직였다. 밀어내는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몸짓이었다.유건은 의아해하며 팔에 힘을 조금 뺐다.그제야 시연이 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 게 보였다.유건이 바라보자, 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멍하니 뭐해요? 얼른 해요.”‘뭐... 뭐를?’유건은 눈을 깜빡였다.그리고 시연이 셔츠를 벗어 내리는 걸 보았다.순간, 유건은 깨닫고는 시연의 손을 꽉 잡았다.“이거... 뭐 하는 거야?”“뭐긴 뭐예요?”시연은 피식 웃으며 유건을 바라봤다.“알면서 묻네요? 당신 왜 온 건지,
시연은 이 병원이 낯설었다.결국 수간호사가 같이 동행해 경비팀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들려온 건 경비원의 거친 목소리였다.“거기, 지금 당신한테 말하는 거 안 보여요? 핸드폰 내놓으세요!”유건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긴 팔을 테이블 위에 걸치고,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듯 탁, 탁,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그리고 입은 굳게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 말 안 들려요?”경비원은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그러자 유건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어 경비원을 힐끗 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무시... 완벽한 무시였다.“이 사람 뭐야, 지금?”쾅!경비원은 결국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게 무슨 태도입니까?!”다른 경비원이 나섰다.“됐어, 이런 사람은 말 섞지 마. 경찰 불러! 우리 기록도 다 있어, 수상하게 배회한 데다 협조도 안 한다니!”“지금 경찰 부릅니다? 들려요, 안 들려요?!”그러자 그제야 유건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치켜 올린 입술 끝, 뾰족한 웃음.“좋죠. 얼른 불러요. 이거... 진짜 무서워서 어쩌나?”그 순간, 문 앞에 들어선 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대체... 이 사람 뭐 하는 건데...’‘유치해, 진짜 유치해.’‘이런 꼴 보기 싫어서라도 들어오기 싫었는데...’하지만 이미 늦었다.“시연!”유건이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보더니, 순식간에 의자에서 일어나 섰다.“앉으세요!”경비원이 팔을 올려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비켜요.”유건은 그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시연 쪽을 가리켰다.“보이죠? 제 아내 왔잖아요!”두 경비원은 동시에 시연 쪽을 돌아봤다.물론 시연 얼굴은 몰랐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더군다나, 옆에 선 수간호사는 병원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아, 저... 진짜였네?”“진짜 부인이었네...”‘그러니까.’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시연에게 걸어왔다.“날 데리러 왔어? 혹시 방해
수술은 다음 날 아침, 첫 번째 스케줄로 잡혔다.오늘은 토요일.아침 일찍, 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바쁜 거 알면서도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정확히 뭐가 걱정되는 건지, 본인도 잘 몰랐다.‘이럴 바엔 그냥 가볼까?’마침 조이는 어젯밤 고상훈이 본가로 데려갔고, 그도 오늘은 별다른 약속이 없었다.결심이 서자마자, 유건은 곧장 차고로 내려가 차를 몰고 L시로 향했다.그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외래 진료 시간이었고, 병동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유건은 시연에게 문자를 남긴 채,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가끔씩 차에서 내려 담배를 한 대씩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오전 10시.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오후 2시.유건은 핸드폰 화면은 여전히 말끔했다.‘답장이 없네.’배도 슬슬 고파졌다.‘일단 뭐라도 먹고 오자.’손에 쥔 담배를 비벼 끄며, 차로 돌아가려던 찰나.“저기요.”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경비 두 명이 다가와 서 있었다.“무슨 일이죠?”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경비원 두 명은 한 명은 왼쪽, 한 명은 오른쪽으로 다가와 유건을 에워쌌다.“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그리고 운전면허증도요.”‘뭐야, 이건 또...’유건은 잠깐 멍해졌다.“저를 조사하는 겁니까?”“아침부터 몇 시간째 주차장 주변을 맴도시고, 차에서 내렸다 탔다 반복하시고... 혹시 뭔가 관찰하신 거 아닙니까?”‘관찰? 은밀하게?’유건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오해입니다. 아무도 관찰 안 했고요. 제 아내가 여기 근무 중입니다. 기다리는 중이에요.”두 경비원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내분, 어느 과세요? 의사세요, 간호사세요?”“제 아내는...”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시연은 이 병원 직원이 아니어서 이름을 말해도 알아들을지 의문이었다.그 찰나의 머뭇거림이, 경비원의 눈에는 더 수상하게 비쳤다.“신분증 빨리 보여주세요!”“알겠습니다.”유건은 어
그날 밤, 시연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뒤척이고, 또 뒤척였다.‘이러다 내일 일 못 하겠는데.’결국 시연은 포기한 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방에서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작은 알약 하나를 손바닥에 떨어뜨렸다.이어서 물 한 모금에 꿀꺽 삼킨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약효가 서서히 올라왔고, 마침내 그녀는 머릿속이 몽롱해지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아침.시연은 핸드폰 벨소리에 깨었다.알람이 아닌 전화였다.“여보세요.”손 더듬어 핸드폰을 잡아 귀에 댄 시연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나른하고 낮았다.그 너머로 들려온 건 유건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일어났어?]“쳇...”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평소에도 잠을 설친 다음 날은 유독 예민해지는 편이었다.“아닌데요? 좀만 더 늦게 깨웠으면, 내가 감동했을지도 몰라요.”[내가 깨운 거야?]유건은 시계를 힐끔 보며 말했다.[이제 일어날 시간 아니야? 평소에도 이쯤 일어나잖아.]“이쯤이면 아직 아니죠!”시연은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10분은 더 잘 수 있었거든요!”잠깐 말이 막힌 유건은 이내 곧 사과했다.[내 잘못이네. 그럼 다시 자볼래?]“뭘 자요? 이미 깼는데요.”시연은 중얼거리며 이불을 끌어안았다.“에휴, 이제 마음도 식었어요.”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역시 사람은 나이 들면 잠이 없나 봐요.”유건은 순간 말이 막혔다.‘나, 나이가 들었다고?’‘최근에 시연이 앞에서 한참 열정적으로 증명했는데, 그게 안 통한 건가?’그래도 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전화를 받았고, 심지어 툴툴대며 투정을 부렸다는 건, 적어도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유건은 목소리가 더 부드러워졌다.[오늘도 많이 바빠?]“모르겠어요.”이제 좀 정신이 든 시연이 말했다.“오전엔 확실히 바쁠 거고, 검사 결과 보고 나서야 계획이 나올 거예요.”[응.]서로는 더 할 말은 없을 것 같았다.시연도 슬슬 전화를 끊으려는 눈치였다.그 순간.[시연.]전
유건은 완전히 허를 찔린 상태였다.‘젠장, 순간 진짜 끝난 줄 알았잖아.’방 안에 시연이 보이지 않는 그 순간, 유건의 세계는 두 번째로 무너지는 듯했다.마수경이 급히 CCTV를 확인하고 와서 보고했다.“고 대표님, 지 선생님 다섯 시 조금 넘어서 나가셨어요.”“알았어.”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관자놀이를 눌렀다.‘어딜 간 거야... 왜 한마디도 없었지...’...한편, 시연은 L시에 도착했다.병원 측에서 차량을 보내주었고,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첫 회진과 진료를 마치고 보니, 예상대로 검사가 충분하지 않았다.시연은 상세한 진료 의견을 남기고 추가 검사를 지시했다.그 결과가 나와야 비로소 본격적인 치료 방향을 잡을 수 있을 터였다.모든 걸 정리하고 나니, 그제야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쌓여 있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진아의 연락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나머지는 전부, 유건이었다.아침부터 시작된 부재중 전화들, 그리고 이어진 문자들.[어디 간 거야?][왜 전화 안 받아? 바쁜 거야? 지금 통화 어려워?][점심은 챙겨 먹었어?][...]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지만, 마음에 일렁임은 없었다.‘그런데, 왜일까?’하나하나, 가슴에 박히는 바늘 같았다.‘역시... 변함없이 다정하네.’하지만, 그게 너무 싫었다.싫고, 싫어서 더 숨이 막혔다.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시연은 결국 핸드폰을 들어 유건의 번호를 눌렀다.두 번도 울리기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연?]낮고 부드럽지만, 급한 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이제 끝났어?]“네.”시연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미안해요. 갑작스레 출장이 잡혀서 L시에 왔어요. 당신도 바쁜 거 같아서 일 끝나고 말해줘야지 했는데... 그만 깜빡했네요.”‘이게 깜빡할 수 있는 일이야?’메시지 하나면 끝날 일을, 하지 않았다.유건은 입 안이 쓰게 말라붙었다.‘정말이라면, 난 네
시연은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하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진동이 멎고, 화면이 꺼졌다.잠시 숨을 고르던 시연은 그대로 핸드폰을 꺼버리고, 침대 협탁 위에 화면을 엎어두었다....그 시각, 유건은 핸드폰을 쥐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샤워 중인가, 아니면 벌써 잠들었나...’다시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자는 걸 깨울까 봐 손을 멈췄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대신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형님.”주지한이 다가왔다.“다 준비됐습니다. 회의 들어가시죠.”“응. 가자.”유건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일에 집중하러 발걸음을 옮겼다....다음 날 아침.시연은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 전원을 켰다. 곧장 어젯밤 온 메시지가 알림창에 떴다.[전화했는데 안 받네. 자는 것 같아서 더 안 걸었어. 일하러 간다. 잘 자, 좋은 꿈 꿔.]시연은 그 문장을 가만히 읽었다. 눈동자는 잔잔했고, 표정은 무심했다.다만, 입가가 잠깐, 아주 미세하게 경련처럼 일그러졌다.결국, 답장은 하지 않았다.오늘 시연은 L시로 가야 하는 날이었다.그녀는 평소보다 이르게 집을 나섰다.마수경도, 도경미도 아직 자는 시간.이번 출장은 혼자였다.필요하다면 그쪽 병원에서, 혹은 강울대에서 따로 보조 인력을 보내줄 예정이었다.고속철도에 몸을 싣고, 시연은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그리고 아이 마스크를 쓰고, 잠시 눈을 붙였다.‘너무 일찍 일어났으니까, 더 자둬야겠다.’...같은 시각, 유건은 밤샘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문득 시연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들려오는 건 차가운 기계음.[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음...?”유건은 잠깐 시간을 확인했다.‘아직 안 깼나?’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전화 꺼져 있네. 지금 집 가는 중이야. 이따 아침 같이 먹자. 영복루에서 게살 만두 샀어, 너랑 조이가 좋아하는 거.]하지만 메시지는 읽히지 않았다.답장도 오지 않았다.유건은 핸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