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이 은범을 친구목록에 추가한 이후, 시연이 처음으로 업데이트한 SNS였다. 은범은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 밤엔 태풍이 올 것 같은데, 시연이 혼자서 SYD호텔에 있다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자, 외투와 핸드폰, 차 키를 챙긴 은범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범아, 어디 가니?” 은범을 부른 사람은 그의 어머니 강수희였다. 은범은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이제 다 큰 성인이에요. 아직도 어디 갈 때마다 엄마 허락 일일이 받아야 해요?” “그런 뜻이 아니야.” 강수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날씨가 안 좋아서... 그리고 오늘 저녁에 네 아버지가 네 삼촌들 몇 분을 초대했거든...” 은범은 냉소를 지었다. “몇몇 삼촌들? 그 딸들도 함께 세트로 데려오는 자리이겠죠.” 은범이 귀국한 뒤, 가족은 그에게 이런 방식의 식사 자리를 여러 번 마련했다. 사실, 그것은 선을 보는 것이라고 해야 마땅한 자리였다. 그 아가씨들은 다 강수희가 신중하게 고른, 은범의 부모님이 원하는 며느릿감이었다. 은범은 이런 불편한 상황에 다시 놓이기 싫어 강수희에게 명확히 말했다. “엄마, 다시는 그런 자리 마련하지 마세요. 엄마가 고른 그 여자들,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말하며 그는 무심코 왼쪽 손목을 만졌다. “엄마가 다시 나를 밀어붙이기 전에, 완전히 아들을 잃게 될 준비는 되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고요!” 그 말이 끝나자 은범은 강수희 옆을 지나 현관문을 나섰다. “은범아...!” 뒤에서 강수희의 창백한 얼굴로 균형을 잃을뻔한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아들은 여전히 날 원망하고 있어!! 하지만 그때, 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사실, 예전에 은범이 시연과 만나다가 헤어지게 된 것은 바로 강수희가 둘 사이에서 계속 분란을 일으키고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연과 헤어지고 난 뒤로 은범은 강수희를 원수처럼 여기게
곧 주문한 음식들이 식탁에 가득 놓였다. 시연은 식탁 가득한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녀가 주문한 야채 듬뿍 얼큰 만둣국만 기다리고 있었다. “만둣국 나왔습니다.” 서빙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시연은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와, 냄새 진짜 좋아요.” 소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그 얼큰 만둣국을 자기 앞에 놓았다. “정말 맛있게 보여요. 식욕이 확 돋네요.” 소미는 시연이가 만둣국을 주문한 것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했지만, 시연은 그 하나만 주문했을 뿐이었다. 소미는 숟가락을 들어 만두를 하나 떠서 한입 먹었다. “존맛탱이네요!!” 그뿐만 아니라, 국물을 두 모금이나 마셨다. “유건 씨.” 소미는 고개를 들고 유건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 맛을 칭찬했다. “이렇게 외진 곳인데도 호텔의 만둣국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네.” 유건은 이마를 찌푸렸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장소미가 일부러 그런가?’ “아!” 소미가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시연을 보았다. “미안해요, 지 선생님. 제가 깜빡했네요. 이건 지 선생님이 주문한 거였는데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그릇을 시연 앞으로 다시 밀어 놓았다. “만두 한 개밖에 안 먹었고, 국물도 두 숟가락밖에 안 먹었어요. 거의 손도 안 댄 거나 마찬가지예요.” 소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혀 공격적인 표정 하나 없이 말했다. “지 선생님, 신경 안 쓰이시죠?” 시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10년이 넘었는데, 장소미는 언제나 이런 식이야!’ ‘이 모든 세월 동안 내가 입고 쓰던 것들은 언제나 장소미가 남긴 것들이거나, 버린 것들이거나, 중고품이었어!’ ‘이미 지씨 집안과 연을 끊었지만, 장소미는 여전히 이런 방식으로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군.’ ‘예전에 매번 다 참았다고 해서 이번
시연은 유건과 소미를 향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여기에서 그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볼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소파가 있는 라운지로 돌아와 가방에서 초콜릿 캔디를 꺼냈다. 누가 준 캔디였나 잠시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은범이 준 것임이 떠올랐다. ‘그날 밤, 노은범도 여자 친구와 함께 왔었지...’ 캔디는 배를 채울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에너지를 유지할 정도는 가능했다. 시연은 포장지를 뜯고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바깥에서는 비가 점점 더 세차게 내렸고, 라운지 안쪽도 사방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밤이 깊어지면서 점점 더 추워졌다. 그때, 유건과 소미가 식당에서 나와 라운지를 지나가다가 소파 한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시연을 발견했다. 유건은 발걸음을 돌려 곧장 시연에게 다가갔다. 시연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반쯤 먹다 만 초콜릿이 쥐어져 있었다. “지시연!” 유건은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 ‘이 여자, 나와 같이 식사하자는 걸 거부하더니, 이렇게 초콜릿으로 배를 채우고 있어? 말도 안 돼!’ “아!” 시연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유건과 소미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더 짜증이 났다. 그녀는 눈을 감고 두 사람을 무시하려 했다. “일어나!” 유건은 허리를 굽혀 시연의 손목을 잡았다. 시연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적극적이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다. ‘도대체 뭐 하려는 거지? 내가 장소미를 비난했다고 해서 대신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시연은 저항하지 않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이 손 놔요, 안 그러면 소리 지를 거예요. 고 대표님은 상관없겠지만, 여자 친구분은 연예계에 있으니 곤란해질 텐데요.” 그 말을 들은 소미는 유건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유건 씨?” 하지만 유건은 손을 놓지 않았다. 눈을 더 가늘게 뜨고 한층 더 어두운 표정으로 시연에게 말했다
소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 선생님, 차라리 저랑 같은 방을 쓰는 게 어때요? 유건 씨는 밤에 처리할 업무도 있고, 게다가 남자 셋이 함께 한 방에서 자긴 어렵잖아요.” ‘그래, 이 말도 그럴듯한 말이었네.’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시연은 거절하려던 참이었지만, 소미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해요.” 시연이 내키지 않는 기색이 드러나자, 유건이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네 몸이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해.” 그 말속에는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시연에게 무리하면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점점 날씨가 추워지고 있었고, 라운지에서 밤을 지새운다면 정말로 병이 날 수도 있었다. 시연은 잠시 망설이며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밤을 참고 견뎌야 할지 고민했다. “네, 그럼 가요.” 소미는 더 다정한 태도로 말했다. “아까는 제가 지 선생님께 잘못했으니, 저에게 사과할 기회를 주세요.” 결국 시연은 동의했고, 소미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소미는 시연의 팔을 놓고, 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던졌다. “너랑 유건 씨 무슨 관계야? 너, 유건 씨와 너무 가까워지는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소미의 질문에 시연은 놀라 잠시 멈칫하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다는 거야?” 소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 진지하게 묻고 있어. 유건 씨는 신사야. 넌 단지 유건 씨를 치료하고 있는 주치의고! 유건 씨가 널 존중하는 거지. 너 착각하지 마!” “하하하.” 참지 못하고 시연은 크게 웃어버렸다. 소미는 점점 더 화를 내며 말했다.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거야?” “어머나.” 시연은 배를 잡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너 혹시, 불륜 자식 증후군이 있니? 네 엄마가 불륜녀였으니까, 너도 언젠가 네가 ‘불륜녀’가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 하하,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이고 순리라는 거구나!” “너
그러나 임신 중에는 잠이 훨씬 많이 쏟아지기 마련이라, 시연은 결국 호텔 라운지 소파 위에서 잠들고 말았다. ... 한밤중, 노은범이 SYD호텔에 도착했다. 그는 소파가 있는 로비의 라운지에서 시연을 발견했다. 시연이 올린 사진을 보며 어느 각도에서 사진이 찍혔는지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시연은 막 잠든 상태였다. 몸을 웅크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은범은 조심스럽게 시연 앞에 쪼그려 앉았다.지금 시연를 깨울지 말지 고민이 들었다. ‘그래도 깨우지 않는 쪽이 낫겠어. 그냥 안아서 방으로 데려가야겠다.’ 은범은 시연의 SNS를 보자마자 이미 빈방을 예약해 두었다. 막 안아 들자마자, 시연이 눈을 떴다. 은범은 즉시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섰고,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시연이 혹시 화를 내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때 시연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은이야...” 은범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기쁜 감정이 온몸에 휘몰아쳐 흥분된 목소리로 떨면서 대답했다. “나야, 시연아. 나 여기 있어.” “응.” 시연은 눈을 감으며 안도한 듯 그의 품에 기대었다. 은범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고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때, 시연은 갑자기 눈을 뜨며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노은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야?” 지금의 시연은 아까 은범에게 기대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경한 얼굴로 은범을 대했다. 은범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신이 돌아와서, 나에게 화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조금 전 시연이 잠에서 덜 깼을 때 나를 ‘은이야’라고 불렀어...’실은 조금 전 시연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찾고 의지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위안이었다. 은범은 시은이 자신을 ‘은이야’라는 이름으로 부른 이유가
호텔 주방. “선생님, 주문하신 재료는 모두 준비됐습니다. 더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은범은 재료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친절하게 말했다. “재료들을 잘게 다지고, 속을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반죽은 발효시켜 주세요.” 그는 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기 계신 분들, 제 톡 좀 추가해 주세요. 아내가 특별히 먹고 싶어 해서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서, 작은 성의 표시로 감사 인사 전하고 싶습니다.” “아, 무슨 말씀이세요.” 몇 명의 주방 직원들이 놀라서 톡을 추가하자마자, 은범은 주방에 있던 직원들에게 바로 각각 20만 원씩 송금했다! 주방 직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속으로 기뻐했다. 은범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앞치마를 단단히 맸다. 주방 직원들은 기꺼이 은범을 도와 만둣국에 넣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 몇 분 전, 유건 역시 주방에 전화를 걸어 만둣국을 주문했다. 그는 시연이 제대로 먹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시연이 배가 고프면, 배 속에 있는 아기까지도 잠을 잘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방에서는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만둣국을 만드는 셰프가 퇴근했습니다.]유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임신하고 나서 지시연 입맛이 까다로워졌는데...’ ‘방금도 주문한 만둣국을 못 먹고 빵 한 조각만 먹었잖아...’그저 한 그릇의 만둣국인데, 자신이 시연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유건은 화가 치밀었다. “형!” 정기환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건에게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 만둣국 만들 줄 알아요.” ‘응?’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가자!” 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민환까지 끌고 다짜고짜 주방으로 향했다. “형님,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주방, 만둣국 만들러.” 유건 일행이 주방에 도착했을 때, 은범이 막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시연은 부드러운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은범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젯밤 시연이 잠들기 전 그는 거실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은범이 들어왔다. “깼어?” 그는 미소 지으며 손에 든 도시락 상자를 내려놓았다. “세수하고 와서 아침 먹자.” “응, 알았어.” 간단히 씻고 나서 가볍게 아침을 먹은 뒤, 두 사람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범은 먼저 차를 가지러 갔다. 문 앞에서 은범은 차를 세우고 말했다. “내리지 않아도 돼. 나 혼자 갈게.” “그래.” 멀지 않은 곳에서, 유건 일행도 내려오고 있었다. 정기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유건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형수님 아니에요? 겨우 찾았네요! 밤새도록 형수님이 도대체 어디 계시는지만 고민했어요!” 유건도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시연이 가방을 메고 차에 올라탔다. 창문 너머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운전석에 남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유건의 눈동자는 깊게 어두워졌고, 차가운 기운이 시연을 감쌌다. ‘내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밤새 저 여자를 걱정했는데!!!’ ‘지시연, 너 정말 대단하구나! 새로운 만나 남자도 벤틀리 콘티넨털을 타다니!’ ‘허.’“형, 내가 형수님 불러올게...” “됐어, 그만 해!” 민환이 동생 기환의 목덜미를 잡고는 눈치를 보며 유건을 살폈다. 그런데 유건은 말하지 않고 갑자기 돌아서서 걸어가 버렸다. ... 차 안에서, 은범은 시연에게 담요를 건넸다. “덮어, 추울 거야.” “응.” 시연은 담요를 받아 들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네 취향 맞아? 너 원래 이런 스타일 아니잖아.” 이렇게 여성스러운 무늬는 오히려 시연의 취향과 맞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시연은 은범이 이미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거 네 여자 친구 거지?” 말하고 나니 시연도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가 마치 은범의 여자 친구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장소미는 이 근처에서 광고 촬영을 하고 있었고, 유건은 촬영장을 방문하다가 마침 시간이 남아 그녀와 함께 쇼핑하러 이곳에 오게 되었다. “오랜만에 쇼핑하네요. 신상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유건이 쇼핑에 별로 흥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이렇게 함께 나와준 것만으로도 소미는 고마워했다. 소미는 그의 손을 놓고 고개를 들어 유건을 보며 말했다. “유건 씨, 저기 가서 앉아서 기다려요. 제가 금방 갈게요.” “그래.” 유건은 별로 흥미 없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아는 속으로 놀랐다. ‘원래 고유건이 우리 시연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여자 친구가 있었구나. 더구나 그 여자 친구가 장소미였다니!’ ‘고유건 눈이 정말 멀었군!’ “어?” 소미의 시선이 진아가 보고 있던 드레스에 멈췄다. 진아가 조금 전에 예쁘다고 했던 바로 그 드레스였다. “와, 정말 예쁘다.” 그녀는 그 드레스를 꺼내 들고 유건에게 보였다. “유건 씨, 어때? 저 이거 한번 입어볼게요.” “응.” 유건은 멀리서 소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미는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유건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그 순간 그의 시야에 한 여인의 날씬하고 키 큰 모습이 들어왔다. 시연이었다. 키가 170cm에 가까운 시연은 날씬한 몸매에 캐러멜 색상의 긴 드레스를 입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우아한 실루엣을 자랑했다. 어깨는 살짝 드러났고, 민낯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소녀다운 생기 넘치는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유건은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내인 지시연은 타고난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정말 예쁘세요.” 직원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모델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세요!” 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과찬이세요.” “우와!” 진아는 두 손을 모아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시연, 너 정말 너무 예뻐!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