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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말랑우유
‘한부모 가정.’

그 말을 듣자 청하의 머릿속이 잠깐 텅 비었다.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사실 선생님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 결혼이 한부모 가정과 대체 뭐가 다를까?

...

출장에서 막 돌아온 터라 방송국에는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청하는 길고 검은 머리를 낮은 포니테일로 단정하게 묶었다.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허벅지까지 슬릿이 들어간 몸에 붙는 롱스커트를 입은 채, 두꺼운 서류 뭉치를 안고 사무실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PD님, 드디어 돌아오셨어요!”

조연출 지아는 가족이라도 만난 듯 반색했다. 당장 청하를 붙잡고 울기라도 할 태세였다.

“빨리 스튜디오 좀 가 보세요. 지금 난리 났어요.”

청하의 가느다란 눈썹이 살짝 모였다.

“무슨 일인데?”

방송국은 어젯밤부터 뒤집혀 있었다.

다만 청하가 장거리 출장에서 막 돌아와 쉬고 있을 거로 생각해 누구도 선뜻 연락하지 못했다.

현재 방송국에서 새로 준비 중인 프로그램은 인터뷰 형식의 토크쇼였다.

원래 메인 진행자는 정식 아나운서 과정을 밟고 경력도 많으며 인지도까지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메인 스폰서 측에서 갑자기 진행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두 달 동안 정식 절차를 거쳐 따낸 자리를 하루아침에 빼앗긴 원래 진행자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스튜디오에서 크게 항의하며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청하가 현장에 도착하자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청하의 집에 있던 인턴 아나운서 한다미였다. 지금은 원래 진행자인 이수빈에게 멱살을 잡힌 채 호되게 질책받고 있었다.

“실력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나랑 경쟁해. 갑자기 내 자리를 빼앗는 건 무슨 짓이야? 울긴 왜 울어? 네가 피해자인 척하지 마!”

다미는 고개를 숙이고 눈시울을 붉혔다. 당황과 초조가 그대로 드러났다.

“죄송해요.”

“죄송하면 끝이야? 하필 남의 남편 건드려 놓고 여기서 불쌍한 척은 왜 해. 최소한 부끄러운 줄은 알아야지...”

“그만해.”

청하가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가 차분하게 제지했다.

“수빈아.”

수빈은 청하와 가까운 사이였다. 분한 눈으로 발을 구르며 말했다.

“언니, 한다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서 그래요!!”

“알아.”

수빈은 그 대답을 듣고 멈칫했다.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저절로 힘이 빠졌다.

곧이어 청하를 돌아봤다.

스튜디오는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청하는 다시 수빈을 다독였다.

“울지 마. 나도 다 알아.”

청하는 이 프로그램의 메인 스폰서가 SZ그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젯밤 재언이 갑자기 다미를 진행자로 바꿔 넣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SZ그룹은 업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었다. 수많은 계열사와 브랜드가 방송국과 광고 및 제작 계약을 맺고 있어, 재언의 요구를 대놓고 거절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국장조차 재언의 기분을 거스를까 조심하며 말을 들어야 할 정도였다.

재언이 누군가를 띄우기로 마음먹으면 어려울 게 없었다.

어젯밤 집을 나간 재언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빈아, 괜찮아.”

청하는 따뜻한 목소리로 수빈의 손을 잡았다.

“네 자리라면 아무도 빼앗지 못해.”

청하는 늘 조용히 말했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됐다.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은 다미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는 정말 미리 몰랐어요. 심 대표님도 어젯밤에 아무 말씀 없으셨고...”

‘어젯밤?’

주변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표정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색이 떠올랐다.

청하는 어제처럼 형식적인 친절을 보이지 않았다. 옅게 웃으며 말했다.

“한다미 씨. 정말 몰랐는지는 한다미 씨 본인과 내가 가장 잘 알겠죠. 여기서 불쌍한 척은 그만해요. 별로 보기 좋지 않으니까...”

청하가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말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존중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었다. 상대가 자신을 존중할 생각이 없다면 굳이 체면을 지켜 줄 필요도 없었다.

다미는 청하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급히 눈을 피했다.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변명했다.

“정말 아니에요. 오해하신 거예요...”

청하는 더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갔다. 핸드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오래 이어졌다. 거의 자동으로 끊기기 직전에야 통화가 연결됐다.

재언은 청하가 전화할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놀라지 않았다.

[말해.]

낮고 무심한, 늘 듣던 목소리였다.

“심 대표님.”

청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표님이 메인 스폰서라고 해도 제작 책임자인 저를 건너뛰고 프로그램 진행자를 마음대로 교체할 권한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언은 대답하지 않고 턱을 아주 조금 들었다.

곁에 있던 최민은 뜻을 알아차리고 하던 일을 내려놓은 뒤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안팎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됐다.

사무실에는 잡음 하나 남지 않았다.

“대표님 한마디 때문에 원래 진행자는 두 달 동안 정식 오디션과 심사를 거쳐 얻은 기회를 그대로 빼앗겼습니다.”

청하는 평소 업무를 논할 때와 같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사적인 일과 업무는 구분해야죠. 저는 대표님이 회사 일에서 권한을 함부로 쓰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 팀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게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청하는 늘 이런 식이었다. 사적으로 아무리 크게 다퉈도 그 감정을 일에 끌고 오지 않았다.

지금 이 전화를 건 사람도 ‘아내 윤청하’가 아니라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윤 PD’였다. SZ그룹 대표와 업무 협의를 하는 것뿐이었다.

청하가 말을 끝내고도 한동안 아무 소리가 없었다.

뒤늦게 재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감정인지 알기 어려운 묘한 말투였다.

[나를 꽤 잘 아네.]

‘당연히 알지. 모를 수가 있나? 몇 년이나 한 침대에서 잠든 사이였으니까.’

청하는 창가로 걸어갔다. 핸드폰을 든 팔이 조금 뻐근했지만 곧바로 말했다.

“한다미 씨는 아직 혼자 프로그램 하나를 이끌 역량이 없습니다. 방송이 나가도 대중에게는 결국 스폰서를 등에 업고 자리를 얻었다는 평가만 받을 겁니다.”

“SZ그룹과 저희 방송국의 계약이 원만하게 이어지길 바라신다면, 이번 결정은 이성적으로 다시 검토해 주십시오.”

‘스폰서의 힘으로 얻은 자리.’

객관적으로 봐도 인턴인 다미에게는 진행 경험이 부족했다. 새 프로그램의 메인 진행을 맡길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경력도 없고, 경쟁력도 부족했다.

[인맥을 만드는 것도 능력이야.]

재언의 무심한 목소리가 B시를 가로질러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주 희미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내 사람이 원하면, 내가 그 사람의 배경이 되어 주면 돼.]

단호한 말투였다.

편애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말이었다.

12월 말의 B시는 온통 연말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거리 곳곳의 상점에는 작은 전구와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였다.

청하는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목이 바싹 타는 것을 느꼈다.

시선을 돌리자 노트북 화면의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자신이 탄 비행기가 심한 난기류로 추락 직전까지 갔던 사고를 보도하고 있었다.

화면 속 기자는 현장 상황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청하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던 사고였다.

지금 화면으로 다시 보니 남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지만, 당시의 절망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무관심한 남편을 떠올린 청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은 아무리 숨겨도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청하는 모니터를 끄고 뜬금없이 낮게 물었다.

“그 애가 당신한테 그렇게 특별해?”

재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 뭐 하려고?]

‘내가 뭘 하겠어?’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사실 청하는 ‘한다미’라는 여자의 존재를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시드니로 두 달간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여러 소문을 들었다.

부하 직원도, 동료도, 상사도 알고 있었다. 청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이 다미가 재언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작 아내인 청하는 가장 늦게 알았다.

재언 정도의 위치에 있는 남자에게 접근하려는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재언은 하필 어린 다미에게 마음을 쏟고 있었다.

외모도 배경도 특별히 눈에 띄는 편이 아니고, 아직 사회 초년생 티가 남아 있는 다미에게.

주변에서는 재언이 진짜 사랑을 만난 거라고 웃으며 떠들었다.

참 우스운 말이었다.

진짜 사랑이라... 18살의 윤청하도 한때는 심재언의 진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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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방정식   제30화

    동윤은 그제야 만족한 듯 눈을 감고 얌전히 누웠다.그렇게 청하와 재언은 다시 한 침대에 누웠다. 동윤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고, 청하는 아들의 등에 한 손을 올린 채 가볍게 토닥여 잠을 재웠다.평소보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웠다. 청하는 이제 막 잠든 아이가 깰까 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어두운 방 안에서 재언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로 다른 숨소리만 잔잔하게 뒤섞였다. 듣고 있자니 슬슬 저절로 졸음이 밀려왔다.얼마쯤 누워 있었는지도 모른 채 청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았고, 의식도 차츰 흐려졌다. 호흡은 어느새 고르게 가라앉았다.완전히 잠들기 직전, 곁에서 재언이 몸을 일으키는 듯한 기척과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재언이 방을 나갔다. 그가 자리를 뜨자 청하의 몸을 짓누르던 긴장도 금세 풀렸다. 그제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새벽 3시가 되어 재언이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와 아들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동윤은 팔다리를 사방으로 벌린 채 자고 있었고, 작은 이불은 발치까지 차 내려가 있었다.동윤이는 원래 잠버릇이 얌전한 아이가 아니었다.지난 두 달 동안 아들과 단둘이 지내며 재언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아이 옷 하나 제대로 벗겨 줄 줄 몰랐지만, 이제는 동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게 됐다.가끔 둘만 남아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재언도 새삼 깨닫곤 했다. 아이 하나를 돌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정말 어려운 일이었다.재언은 손을 뻗어 아들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고개를 들던 재언의 시선이 잠든 청하에게 머물렀다. 청하는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베개 곁에 힘없이 놓여 있었고, 희미한 달빛이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잠든 모습은 더없이 차분하고 평온해 보였다.청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은 어쩌면 ‘온화함’

  • 사랑의 방정식   제29화

    ‘안경 아빠? 앞치마 엄마?’‘대체 무슨 소리야?’재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청하를 바라봤다. 청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설명했다.“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인물들이야.”그대로 시선을 거두려던 재언은 청하의 붕대가 피에 젖은 것을 발견했다. 잠시 침묵한 뒤 담담하게 말했다.“동윤아, 가서 구급상자 가져와.”동윤이는 말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 자기 머리보다도 큰 구급상자를 품에 안고 달려왔다. 짧고 통통한 다리인데도 달리는 건 제법 빨랐다.“아빠, 여기!”재언은 구급상자를 받아 들고 청하에게 손을 내밀었다.“손.”청하는 아이 앞에서는 두 사람 사이가 지나치게 냉랭해 보이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다친 손을 내밀었다.예전에 선수 생활을 했던 탓인지 재언은 이런 작은 상처를 수도 없이 처리해 본 사람이었다. 손놀림은 익숙했고 처치도 수준급이었다.사실 전화 한 통이면 주치의가 10분 안에 올 수 있었다. 다만 재언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청하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재언은 붕대 끝을 단단히 묶었다.“됐어. 이틀 정도는 손 함부로 쓰지 마.”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동윤이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엄마, 아직 아빠한테 고맙다고 안 했잖아!”“고마워.”청하는 잠깐 말을 멈췄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해 끝내 한마디를 덧붙였다.“저기...”지나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를 들었지만 재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표정이 한층 더 무심해졌을 뿐이었다.“아니야...”평소에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만큼 바쁘던 재언이 웬일인지 그날은 한가했다. 재언이 떠나지 않으니 청하도 대놓고 나가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동윤의 성화에 못 이겨 세 사람은 거실에 앉아 올해 새로 나온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을 함께 봤다. 따뜻하면서도 아이가 배울 만한 교훈이 담긴 작품이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청하는 화면을 진지하게 보며 동윤이 이해하기

  • 사랑의 방정식   제28화

    점심 무렵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오후 촬영은 예정대로 이어졌다.청하의 손은 사실 크게 다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국장이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일주일 동안 집에서 쉬기로 했다.“국장님, 저 정말 괜찮아요.”“윤 PD, 이번에는 내 말 들어. 이참에 집에서 푹 쉬면서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말고.”국장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방송국에는 네 편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한다미가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지는 못해.”‘내 편? 참 따뜻한 말인데...’청하는 미소를 띠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청하가 떠난 뒤, 국장은 웃음을 거두고 조연출을 불렀다.“그 한다미라는 친구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굳이 내가 가르쳐 줄 필요 없겠지?”조연출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뜻을 알아챘다.“국장님, 설마 일부러 띄워 줬다가 스스로 무너지게 하시려는 겁니까?”“누가 일부러 무너뜨린대.”국장이 미간을 찌푸렸다.“방송국에서 줄 수 있는 기회와 지원은 제대로 줄 거야. 그걸 한다미가 받아낼 실력이 있는지는 본인 몫이지. 못 버티고 사라진다 해도 우리 방송국 책임은 아니잖아.”조연출은 뜻을 완전히 알아듣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국장님, 더 말씀 안 하셔도 알겠습니다.”국장은 길게 숨을 내쉬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재언을 정면으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라도 다미가 현실의 벽을 직접 부딪쳐 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청하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윤도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다. 이번에는 재언이 직접 데려온 모양이었다. 아이는 현관에 들어서기도 전에 목소리부터 들려왔다.“엄마! 엄마! 오늘은 왜 동윤이 데리러 안 왔어?”재언이 턱짓으로 안방 쪽을 가리키자, 동윤이는 곧장 안방으로 뛰어갔다.청하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자마자 작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지고 입술도 삐죽 튀어나왔다.“엄마, 왜 다쳤어? 많이 아파?”집에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아이가 있으니, 아픈

  • 사랑의 방정식   제27화

    용현은 마지못해 짧게 대답을 한 뒤, 동료 몇 사람에게 이끌려 자리를 떴다.청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멀어지는 용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가족 간의 정, 사랑, 우정. 살아오는 내내 청하에게 늘 부족했던 것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별다를 것 없는 삶이었고, 굳이 꺼내 말할 만한 것도 많지 않았다.그래도 다행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났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비좁은 대기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재언은 청하의 입가에 남은 웃음을 바라봤다.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말투는 유난히 건조했다.“네 손 데었을 때 바로 내가 데리고 가서 흐르는 물에 손부터 식혀 줬고, 의료진도 내가 불렀고, 치료비도 내가 냈는데. 서용현 PD가 대체 뭘 안심한다는 거지?”청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귀에 익게 들어 온 냉랭한 말투였다.“심 대표님 말씀은... 제가 비용을 정산해 드려야 한다는 뜻인가요?”부드럽고 담담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날이 서 있었다. 재언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이 여자 눈에는 내가 그렇게 돈이나 밝히는 쪼잔한 사람으로 보이나?’청하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말다툼할 생각조차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준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준환은 왕진 가방을 정리하며 물었다.“너희 둘, 대체 무슨 일이야?”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들어와.”문이 살짝 열리며 한다미가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대표님, 룸에 음식 새로 차려 놨어요. 아까 거의 못 드셨잖아요. 지금이라도 조금 더 드시겠어요?”재언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아까 마음 한구석을 아주 미세하게 건드렸던 감정이, 대체 누구의 발걸음이 되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인지 재언 자신도 알 수 없었다.준환은 멀어지는 한다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의 일

  • 사랑의 방정식   제26화

    지난 몇 년 동안 청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용현은 직접 봤고, 청하가 어떤 사람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39도가 넘는 고열에도 조정실에 앉아 촬영 화면을 끝까지 확인하고 편집했다. 사람 봐 가며 함부로 대하는 기업인들에게 술을 억지로 받아 마시다가 위경련이 와 나무 아래에서 토하고 그대로 쪼그려 잠든 적도 있었다. 다음 날에는 또 동윤이를 돌봐야 했는데, 심씨 집안에서 일하는 시터는 아이가 모기에 몇 군데 물렸다는 이유로 청하가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탓했다.그때도 용현은 청하 바로 뒤에서 모든 걸 봤다. 그리고 남편인 재언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왜 모든 걸 여자 혼자 감당해야 했던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이제야 나타난 재언은 정작 다른 여자를 지키고 있었다.재언의 시선이 용현에게 향했다. 도전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본 재언이 눈썹을 아주 조금 들었다. 주변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우리 청하 선배?”“그만해!”두 사람이 말을 잇기 전에 청하가 먼저 끊었다.“내가 뜨거운 물 가까이에 있던 것도 잘못이니까 한다미 씨 책임만은 아니고.”청하는 평온한 표정으로 다미에게 거리감 있게 말했다.“게다가 심재언 대표도 곁에 있는데 누가 한다미 씨한테 뭘 하겠어? 그러니까 안심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다미는 청하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 처음 봤다. 늘 말로든 분위기로든 자신이 밀렸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속이 시원해졌다.‘나보다 능력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 뭐 해?’‘결국 심 대표님은 내 편이잖아.’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미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옆의 준환은 여자들 사이의 신경전에 관심이 없었다. 청하의 손을 잡아 다시 치료를 이어 갔다.청하는 피부가 희고 손도 부드러웠다. 흉터가 남으면 아까울 정도였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준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조금 빨리 해 주실 수 있어요?”“그러면 많이 아플 겁니다.”화상 치료는 섬세하게 해야 했다. 서두르면 피부

  • 사랑의 방정식   제25화

    최민은 표정이 굳어 바로 자리를 떠났다.자리에 남은 용현은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따라가지 않았다.청하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재언이 방향을 잡아 이끌자 오히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몇 걸음 만에 세면대로 도착했다.차가운 흐르는 물이 손등에 닿자 불에 덴 듯 따갑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내가 할게.”청하는 재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재언은 놓지 않고 오히려 손목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태도도 부드럽지 않았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움직이지 마.”청하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너무 아파 더 실랑이할 힘도 없었다.도시의 욕실과 달리 공간은 좁고 답답했다. 누런 조명은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키가 큰 재언은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청하의 손목을 잡아 수도꼭지 아래 흐르는 물에 갖다 댔다. 찬물로 계속 열을 식히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급히 따라온 다미는 바로 그 모습을 보게 됐다.오랫동안 부부로 살아온 두 사람은 어딘가 닮은 분위기가 있었다. 가까이 붙어 서 있는 모습은 뜻밖에 친밀해 보였다.다미는 문을 짚은 채 시선을 굳혔다.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촬영지가 외진 곳이라 의사가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최민이 운전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달리라고 했지만 한 시간 뒤에야 도착했다.아는 얼굴을 본 청하는 예의상 인사했다.“진 선생님, 오랜만이에요.”손등의 화상은 이미 흐르는 찬물로 응급 처치를 한 상태였다. 진준환은 대충 살펴본 뒤 시선을 거두고 의료 가방을 열었다. 늘 그렇듯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가능하다면 저는 제수씨를 병원 밖에서는 평생 안 보고 싶습니다.”청하는 자조하듯 웃었다.“미안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또 이런 모습만 보여 드리네요.”“됐어.”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재언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널 여기까지 부른 건, 둘이 수다 떨라고 한 게 아니야.”준환은 무표정하게 재언을 한 번 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청하의 상처를 치료했다. 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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