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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말랑우유
청하는 18살이 되던 해, 시드니의 한 대학에 합격했다.

그 시절의 시드니는 지금보다 치안도 불안하고 물가도 비쌌다. 돈도 배경도 없는 어린 청하가 혼자 버티기에는 녹록지 않은 곳이었다.

청하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했다.

어느 날 낯선 외국인 남자 몇 명이 청하의 앞을 막아섰다. 음흉한 눈으로 청하를 훑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청하는 전에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피하려 했지만 남자들은 일부러 몸을 부딪쳤다.

쟁반 위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깨졌고, 커피까지 쏟아져 옷 앞부분이 흠뻑 젖었다.

그때는 사람이 많은 오후였다. 소란이 생기자 주변 시선이 몰렸다.

청하는 당황해 쟁반으로 젖은 옷을 가렸지만 남자들은 계속 다가왔다. 급기야 쟁반까지 빼앗으려 했다.

“여자 하나 괴롭히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남자 여럿이.”

재언이 나타났다.

청하 앞을 막아선 재언은 남자들이 쓰는 언어로 유창하게 욕설을 퍼부으며 비웃었다.

뒤이어 탁자가 넘어지고 접시까지 전부 깨졌다.

재언은 자기 돈으로 가게에 변상했다.

청하는 재언의 뒤를 따라가 돈을 갚겠다고 했지만 재언은 받지 않았다.

“여자한테 돈 받는 건 좀 그렇잖아.”

비스듬히 걸린 흐린 가로등 불빛 아래 재언의 얼굴에는 싸움으로 생긴 상처가 선명했다.

그래도 재언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다음에 또 보게 되면, 그때는 이렇게 엉망인 꼴로 만나지 말자.”

재언의 목소리가 차가운 바람 사이로 멀어졌다.

낯선 도시에서 혼자 버티던 18살의 청하는 그날 처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나중에야 청하는 재언이 당시 시드니에서 가장 주목받던 프로 복서라는 사실을 알았다. 혼자서 건장한 남자 셋을 쓰러뜨린 게 우연이 아니었다.

그 인연을 계기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람이 됐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

그 시절 재언은 청하를 진심으로 아꼈다. 가진 돈은 많지 않았지만 경기에서 우승해 받은 상금은 전부 청하에게 맡겼고 자신은 한 푼도 갖지 않았다.

친구들이 여자 친구에게 꽉 잡혀 산다고 놀리면 재언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는 부족한 것 없이 해 줘야지. 나는 남자인데 아무렇게나 살아도 돼.”

재언은 사랑에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면 누구나 알 수 있게 확실히 내색하고 좋아했다.

어디를 가든 청하를 데리고 다녔다. 아무리 주변의 예쁜 여자가 말을 걸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16년의 한 경기였다.

경기가 지나치게 거칠어졌고 상대 선수는 이기려고 반칙에 가까운 공격까지 했다.

경기 후반부의 재언은 얼굴이 퉁퉁 붓고 눈꺼풀까지 부어 경기장을 내려온 뒤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서 아무리 말려도 치료를 거부하며 청하만 찾았다.

그 상태로 30분 가까이 버틴 끝에 청하가 도착했다.

재언은 청하를 품에 끌어안자마자 유언이라도 남기듯 말을 늘어놓았다. 입안이 피투성이여서 발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침대 밑에 돈 좀 있어. 몰래 모은 건 아니고... 원래 네 선물 사 주려고 둔 거야...”

청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죽기라도 하면 그 돈을 다른 남자에게 다 써 버리겠다고 겁을 줬다.

재언은 청하의 말을 진짜로 믿었다. 뜨거운 눈으로 청하를 바라보며 손목을 꽉 쥔 채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에도 억울하다는 듯 눈을 감지 않았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한 일도 수액 바늘을 뽑고 청하를 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은 재언이 청하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젊을 때 너무 강렬한 사람을 만나면 평생을 망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때 청하는 어리석게 생각했다.

‘심재언이라면, 내 인생쯤 망쳐도 괜찮아.’

18살의 재언은 코츠월드에서 해바라기를 구해 트럭 한 대 가득 싣고 왔다. 학교 정문 앞에서 오후 내내 기다린 끝에 청하에게 고백했고, 절대 후회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청하가 19살이 되던 해,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생일을 맞았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재언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시드니 타워의 불빛이 번지는 도심을 빠져나와 달링 하버를 뒤로한 채, 청하를 태우고 블루마운틴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웬트워스 폴스 전망대에 올라 고요한 밤하늘 아래 펼쳐진 은하수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날 재언은 청하의 앞날도 저 별빛처럼 환하기를 바랐다.

어디로 향하든 찬란한 길만 이어지고, 청하가 맞이할 모든 내일이 눈부시기를...

그때 청하는 두 사람이 평생 그렇게 함께할 줄 알았고, 계속 같은 길을 걸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연애 3년 차에 들어서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문제가 계속 생겼다.

셀 수 없이 많은 갈등이 쌓였다.

언제부터였는지 재언의 외박이 잦아졌고 집에 돌아오는 날도 줄었다.

나중에는 일주일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일도 흔했다.

청하가 전화할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건성이고 차가웠다.

주변 친구들은 재언이 이미 질린 거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청하는 믿지 않았다. 조금도 믿고 싶지 않았다.

재언이 전화를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걸었다.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 체육관 밖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

결국 재언은 밖으로 나왔다.

재언은 냉랭한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체육관 안에서는 젊은 여자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밀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재언아, 빨리 와. 밖에서 뭐 해?”

“응.”

재언은 대충 대답한 뒤 청하를 바라봤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나 오늘은 집에 안 들어가.”

말을 마친 재언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청하는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작게 물었다.

“그럼 언제 와?”

재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몰라.”

너무 어렸다. 그때의 청하는 기다리다 보면 재언이 다시 마음을 돌릴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밤낮없이 계속 기다렸다.

그러나 재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사실을 알게 됐다.

3년 동안 함께 먹고 자며 지낸 남자 친구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청년이 아니었다.

B시 SZ그룹의 외아들이자 차기 후계자, 심재언이었다.

사실 청하는 오래전부터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 재언은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클 줄은 몰랐다. 몇 계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서로 다른 층에 사는 사람들처럼 멀었다.

재언은 처음부터 청하와 끝까지 갈 생각이 없었기에 자신의 진짜 배경을 알려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재언에게 청하는 잠깐 느낀 새로움에 불과했다. 이제는 그 새로움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그날 청하는 고향에 있는 부모에게서 연락받았다.

부모는 청하를 돌아오게 하려고 돈을 요구했고, 심지어 할아버지의 유골함까지 깨뜨렸다. 어린 시절부터 청하를 진심으로 아껴 준 사람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뿐이었다.

소식을 들은 청하는 그날 밤 고열에 시달렸다. 온몸이 떨리고 살갗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으며 몸속까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침대에서 떨어진 뒤에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있는 힘을 다 짜내 겨우 재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열두 통의 부재중 전화.

그날 밤 청하는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며 몇 번이고 자기 마음이 찢기는 걸 느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그 밤의 고통은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날이 밝아 오기 직전에야 재언의 전화가 연결됐다.

하지만 받은 사람은 낯선 여자였다.

여자가 전화기 너머로 재언에게 물었다.

[재언아, 네 여자 친구한테 전화가 계속 오는데. 받을 거야?]

[내버려둬.]

재언의 목소리는 차갑고 짜증까지 섞여 있었다.

마지막 남은 버팀목까지 부러지는 기분이었다. 핸드폰을 쥔 청하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데 눈이 따갑고 아팠다. 언제부터인지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청하는 그 뜨거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눈을 감자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만 남았다. 몸도 차가웠고 마음도 차가웠다.

그날 청하는 가장 이른 비행편을 예약해 시드니를 떠나 B시로 돌아왔다.

시드니와 이어진 모든 관계를 끊었다. 그곳에서의 일도 전부 잊기로 했다.

청하는 길고 기이한 꿈을 꾼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꿈에서 깼으니 현실로 돌아가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2년 뒤, 방송국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청하는 재언과 다시 마주쳤다.

그날의 술자리를 청하는 아직도 기억한다. 재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몇몇 기업 임원들이 청하에게 계속 술을 먹이고 뒤에서는 어떻게 데리고 갈지 상의하는데도 모르는 척했다.

그때 청하는 이미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을 만큼 취해 있었다.

몇몇 남자들이 청하를 부축한다는 핑계로 거의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차까지 불러 숙박업소로 향하려던 때,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재언과 마주쳤다.

재언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그만.”

그 한마디로 그 임원들의 계획은 멈췄다.

그 임원들이 모두 떠난 뒤 재언은 청하를 오래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윤청하.”

청하는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심 대표님, 정말 대단한 분이 되셨네요. 못 알아볼 뻔했어요.”

그날 밤 두 사람 모두 술에 취해 있었다.

청하는 재언이 자신을 안아 별실로 데려간 것까지만 기억했다.

그 뒤는 술기운 때문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의 일로 아이가 생겼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을 앞두고 임신 후반기에 들어선 청하는 입덧이 심해졌다.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혔고 음식을 보기만 해도 위산이 올라왔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있는 청하를 보던 재언은 아무 말 없이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목소리는 차가웠다.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마. 내 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일단 아이를 낳고 나면 너하고 우리 집안은 거기서 끝내.”

두 사람은 아이를 둘러싼 소문을 막고 심씨 집안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결혼했다.

재언의 태도도 명확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청하는 떠나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동윤이는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났다. 한동안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산소 치료를 받아야 했고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다.

재언은 출산 뒤 바로 관계를 끝내려 했지만, 재언의 어머니 장혜리는 갓난아이에게서 엄마를 떼어 놓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집안 이미지가 망가진다며 이혼을 막았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이어진 결혼이 지금까지 온 것이었다.

지난 3년의 결혼생활을 돌아봐도 재언이 집에 들어온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늘 한밤중에 들어왔다가 해가 뜨면 나갔다.

그동안 바깥에서는 온갖 험한 말이 돌았다.

청하가 아이를 앞세워 재언에게 결혼을 강요했다거나, 재벌가에 들어가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으며, 돈이나 밝히는 여자라는 소리였다.

재언은 그런 소문을 막지 않았다. 청하에게 마음이 없으니 청하가 어떤 말을 듣든 관심도 없었다.

예전의 청하는 사람 마음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사랑하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몰랐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재언에게 사랑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랑이 전부 다른 사람에게 향했을 뿐이었다.

청하가 거의 쏟아부은 7년의 시간은 재언과 한다미가 함께한 두 달보다도 못했다.

...

청하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심 대표님, 제가 따로 뭘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말씀드려야겠네요. 사업에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대표님 개인 취향 때문에 계속 제작 인력을 바꾸시면 업계에서 SZ그룹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이득이고 손해인지 잘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재언은 전화기 너머에서 느리게 담배 연기를 내뿜는 듯했다.

비웃는 기색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시드니에 두 달 다녀오더니 제법 세졌네. 왜, 새로 기댈 사람이라도 생겨서 나를 빨리 버리고 싶은 건가?]

청하는 몇 초간 말이 없다가 앞의 질문에만 답했다.

“작은 일 때문에 더 큰 걸 잃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재언이 바쁜 건지, 평소와 달리 더 따지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무심하고 건성인 대답만 돌아왔다.

[생각해 볼게.]

그게 재언의 답이었다.

“네.”

청하는 짧게 답한 뒤 블라인드를 내렸다.

창밖의 빛이 완전히 가려지자 사무실 안이 어둡고 답답해졌다.

잠깐 말을 멈췄던 청하가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 얘기 좀 해. 동윤이 오늘 아침에도 아빠가 언제 키즈카페 데려가 주느냐고 계속 물었어. 앞으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쉽게 하지 마. 아이들은 어른의 말을 진짜로 믿으니까.”

재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청하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

출근 시간대의 B시는 복잡했다.

SZ그룹 본사 고층에서 내려다보면 여러 갈래로 얽힌 도로 위를 차량이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차 한 대 한 대는 점처럼 작아 보였다.

재언은 통유리창 앞에 서서 양손을 바지 주머니 가장자리에 걸치고 있었다.

흰 셔츠 소매 위로 둘러진 검은 암밴드가 차갑고 오만한 인상을 더했다.

느긋하게 시선을 거둔 재언이 최민을 불렀다.

“그 사람이 말한 대로 처리해.”

최민은 조금 망설였다.

“말씀하신 분이 오전에 오셨던 한다미 씨입니까, 아니면 방금 전화하신...”

“내 아내가 둘이야?”

재언의 목소리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최민이 곧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청하가 시드니에서 두 달 동안 뭘 했는지도 알아봐.”

지시받은 최민은 바로 움직였다.

재언은 몸을 돌리다 책상 위 서류 더미에 시선이 머물렀다.

청하가 내민 이혼합의서는 서류철 사이에 끼워 둔 채, 제대로 펼쳐 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재언은 문득 합의서를 꺼내 들었다.

첫 장을 펼치자 맨 위 서명란에 또렷한 필체로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아내, 윤청하.

문득 예전의 청하가 떠올랐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글씨를 쓰면 재언은 남자처럼 시원시원한 필체라고 놀리곤 했다.

지금 다시 보니 정말 거침이 없었다.

획마다 망설임이 없었다.

한 번에 써 내려간 서명이었다.

정말 조금의 미련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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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방정식   제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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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방정식   제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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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현은 마지못해 짧게 대답을 한 뒤, 동료 몇 사람에게 이끌려 자리를 떴다.청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멀어지는 용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가족 간의 정, 사랑, 우정. 살아오는 내내 청하에게 늘 부족했던 것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별다를 것 없는 삶이었고, 굳이 꺼내 말할 만한 것도 많지 않았다.그래도 다행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났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비좁은 대기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재언은 청하의 입가에 남은 웃음을 바라봤다.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말투는 유난히 건조했다.“네 손 데었을 때 바로 내가 데리고 가서 흐르는 물에 손부터 식혀 줬고, 의료진도 내가 불렀고, 치료비도 내가 냈는데. 서용현 PD가 대체 뭘 안심한다는 거지?”청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귀에 익게 들어 온 냉랭한 말투였다.“심 대표님 말씀은... 제가 비용을 정산해 드려야 한다는 뜻인가요?”부드럽고 담담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날이 서 있었다. 재언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이 여자 눈에는 내가 그렇게 돈이나 밝히는 쪼잔한 사람으로 보이나?’청하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말다툼할 생각조차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준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준환은 왕진 가방을 정리하며 물었다.“너희 둘, 대체 무슨 일이야?”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들어와.”문이 살짝 열리며 한다미가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대표님, 룸에 음식 새로 차려 놨어요. 아까 거의 못 드셨잖아요. 지금이라도 조금 더 드시겠어요?”재언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아까 마음 한구석을 아주 미세하게 건드렸던 감정이, 대체 누구의 발걸음이 되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인지 재언 자신도 알 수 없었다.준환은 멀어지는 한다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의 일

  • 사랑의 방정식   제26화

    지난 몇 년 동안 청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용현은 직접 봤고, 청하가 어떤 사람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39도가 넘는 고열에도 조정실에 앉아 촬영 화면을 끝까지 확인하고 편집했다. 사람 봐 가며 함부로 대하는 기업인들에게 술을 억지로 받아 마시다가 위경련이 와 나무 아래에서 토하고 그대로 쪼그려 잠든 적도 있었다. 다음 날에는 또 동윤이를 돌봐야 했는데, 심씨 집안에서 일하는 시터는 아이가 모기에 몇 군데 물렸다는 이유로 청하가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탓했다.그때도 용현은 청하 바로 뒤에서 모든 걸 봤다. 그리고 남편인 재언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왜 모든 걸 여자 혼자 감당해야 했던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이제야 나타난 재언은 정작 다른 여자를 지키고 있었다.재언의 시선이 용현에게 향했다. 도전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본 재언이 눈썹을 아주 조금 들었다. 주변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우리 청하 선배?”“그만해!”두 사람이 말을 잇기 전에 청하가 먼저 끊었다.“내가 뜨거운 물 가까이에 있던 것도 잘못이니까 한다미 씨 책임만은 아니고.”청하는 평온한 표정으로 다미에게 거리감 있게 말했다.“게다가 심재언 대표도 곁에 있는데 누가 한다미 씨한테 뭘 하겠어? 그러니까 안심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다미는 청하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 처음 봤다. 늘 말로든 분위기로든 자신이 밀렸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속이 시원해졌다.‘나보다 능력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 뭐 해?’‘결국 심 대표님은 내 편이잖아.’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미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옆의 준환은 여자들 사이의 신경전에 관심이 없었다. 청하의 손을 잡아 다시 치료를 이어 갔다.청하는 피부가 희고 손도 부드러웠다. 흉터가 남으면 아까울 정도였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준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조금 빨리 해 주실 수 있어요?”“그러면 많이 아플 겁니다.”화상 치료는 섬세하게 해야 했다. 서두르면 피부

  • 사랑의 방정식   제25화

    최민은 표정이 굳어 바로 자리를 떠났다.자리에 남은 용현은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따라가지 않았다.청하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재언이 방향을 잡아 이끌자 오히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몇 걸음 만에 세면대로 도착했다.차가운 흐르는 물이 손등에 닿자 불에 덴 듯 따갑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내가 할게.”청하는 재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재언은 놓지 않고 오히려 손목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태도도 부드럽지 않았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움직이지 마.”청하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너무 아파 더 실랑이할 힘도 없었다.도시의 욕실과 달리 공간은 좁고 답답했다. 누런 조명은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키가 큰 재언은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청하의 손목을 잡아 수도꼭지 아래 흐르는 물에 갖다 댔다. 찬물로 계속 열을 식히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급히 따라온 다미는 바로 그 모습을 보게 됐다.오랫동안 부부로 살아온 두 사람은 어딘가 닮은 분위기가 있었다. 가까이 붙어 서 있는 모습은 뜻밖에 친밀해 보였다.다미는 문을 짚은 채 시선을 굳혔다.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촬영지가 외진 곳이라 의사가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최민이 운전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달리라고 했지만 한 시간 뒤에야 도착했다.아는 얼굴을 본 청하는 예의상 인사했다.“진 선생님, 오랜만이에요.”손등의 화상은 이미 흐르는 찬물로 응급 처치를 한 상태였다. 진준환은 대충 살펴본 뒤 시선을 거두고 의료 가방을 열었다. 늘 그렇듯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가능하다면 저는 제수씨를 병원 밖에서는 평생 안 보고 싶습니다.”청하는 자조하듯 웃었다.“미안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또 이런 모습만 보여 드리네요.”“됐어.”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재언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널 여기까지 부른 건, 둘이 수다 떨라고 한 게 아니야.”준환은 무표정하게 재언을 한 번 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청하의 상처를 치료했다. 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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