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해가 되자 민하윤은 세뱃돈을 받느라 손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하도진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돈을 세는 아내를 바라봤다.하도진은 돈에 눈이 반짝이는 민하윤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돈이 그렇게 좋아?”하지만 민하윤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설날인데 괜히 하도진과 말다툼할 생각은 없었다.평소에는 어른들이 주는 돈을 선뜻 받기도 애매했지만 명절만큼은 마음 편히 세뱃돈을 받을 수 있었다.게다가 올해는 두 아이 덕분에 유난히 세뱃돈 봉투가 많았다.하나같이 두툼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예 통 크게 주주와 연이 앞으로 각각 통장까지 하나씩 만들어 줬다.하도진이 혀를 차며 말했다.“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네. 침까지 흘리겠어. 난 당신이 이렇게 돈 좋아하는 사람인 줄은 예전엔 몰랐는데...”민하윤은 놀림을 받아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실실 웃으며 말했다.“이게 말로만 듣던 돈 세다가 손 아픈 기분인가 봐요.”하도진은 침대에 앉아 아무 봉투나 두어 개 집어 안을 훑어봤다.축하 문구는 거의 비슷했다.하회주, 하명연 어린이의 건강한 성장과 행복, 새해의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이 가득했다.하도진이 두툼한 봉투 두 개를 집어 민하윤 앞에서 일부러 흔들었다.“근데 이거 당신한테 준 거 맞아? 아무리 봐도 우리 두 아들의 세뱃돈 같은데...”민하윤은 바로 눈을 흘기며 봉투를 낚아챘다.“뭘 몰라서 그래요. 제가 잠깐 대신 보관해 주는 거예요. 대신 보관이라고요. 설마 제가 몰래 써 버리기라도 하겠어요?”하도진은 피식 웃더니 눈을 반쯤 가늘게 뜨고 팔을 베개 삼아 침대에 드러누웠다.민하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돈부터 감쌌다.“어라, 거기 눕지 마요. 일어나요.”하도진은 눈꺼풀만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그렇게 돈을 좋아하면서 내가 준 카드는 왜 한 번도 안 써? 내가 사 준 가방이랑 옷, 보석은 왜 밖에 하고 나간 적도 없지?”민하윤은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내렸고 작게 중얼거렸다.“너무
모임 장소는 어른들이 모두 좋아하는 명원식 요리 전문점으로 정했다.구준오가 서른 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원탁이 놓인 룸을 예약했고 각 집안 어른의 입맛과 먹지 못하는 음식까지 미리 확인해 메뉴도 주문해 두었다.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했고 가장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송지훈과 구이현, 꾸꾸 세 식구였다.송지훈은 이제 누가 봐도 능숙한 아빠였고 어딜 가든 아들 일은 전부 자신이 챙겼다.송지훈이 유모차를 밀고 들어오자 구이현은 행복한 얼굴로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몇 달 된 아기는 한창 뽀얗고 통통해서 가장 귀여울 때였다.어른들은 너도나도 꾸꾸를 안아 보겠다며 나섰다.송씨 가문과 구씨 가문 어른들은 아직 사돈이 된 게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구이현의 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서로 양보하며 한차례 실랑이까지 벌였다.“외할머니가 안아 볼게요.”“아니에요. 친할머니가 안을게요.”송씨 가문의 어른들은 손자가 엄마 성을 따라 구씨가 된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애초에 구씨 가문에 미안한 마음이 있던 터라 아이의 이름이 구경운으로 정해진 뒤에도 오히려 송지훈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이현이에게 평생 잘해.”구이현은 어린 나이에 자기들의 가문으로 시집와서 이렇게 건강하고 통통한 손자까지 낳아 주었으니 엄마 성을 따르는 것쯤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반대로 구씨 가문은 처음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금지옥엽 키운 딸이 열 살도 넘게 차이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앞날이 창창했던 발레리나의 길까지 내려놓고 일찍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렸으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하지만 사람은 오래 지켜봐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는 법이었다.송지훈은 나이가 좀 많다는 것만 빼면 흠잡을 곳이 없었다.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성격도 반듯했다.무엇보다 구이현의 까다로운 성격과 철없는 투정까지 조건 없이 받아 줬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잘해 줬다.송지훈은 어른들에게 효도했고 아내를 존중했다.심지어 꾸꾸의 출생 신고를
하도진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본가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런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주주와 연이는 요즘 할 줄 아는 말이 점점 많아졌다.두 아이는 작은 머리를 맞댄 채 거실에 쪼그려 앉아 증조할아버지가 새로 들인 앵무새를 구경하고 있었다.“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앵무새는 초록빛이 감도는 화려한 깃털을 가졌고 부리 주변에는 선명한 붉은빛이 돌았다.앵무새는 반짝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제법 사람 흉내를 내 말도 따라 했다.연이는 깔깔 웃으며 따라 외쳤다.“새야, 안녕.”그러다 뒤를 돌아봤다가 아빠가 한쪽 무릎을 꿇고 엄마의 신발을 벗겨 주는 걸 발견했다.연이는 곧장 쪼르르 달려가 민하윤의 손을 잡고 새장을 가리키며 자랑했다.“새! 새!”민하윤은 아들을 안아 올려 볼에 뽀뽀하고는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새?”“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앵무새가 새장 안 횃대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사람만 보면 영리하게 외쳤다.“안녕하세요!”하지만 두 아이의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몇 분 놀더니 금세 앵무새를 거실에 내버려두고 가사 도우미에게 딸기를 씻어 달라고 졸랐다.저녁 식탁에서는 김옥자가 두 아이의 생일 이야기를 꺼냈다.나이가 들수록 집안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게 좋다며 이번에는 호텔에서 제대로 생일잔치를 열자고 했다.민하윤은 어른의 호의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 생각을 말릴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때 하도진이 갑자기 식탁 아래로 손을 뻗어 민하윤의 왼손을 잡았다.민하윤은 살짝 당황해 하도진을 흘겨보며 손을 빼려고 했다.하지만 하도진은 턱을 아주 조금 들어 김옥자 쪽을 한번 바라봤다.의미는 너무나 분명했다.민하윤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곧바로 알아차렸고 더는 손을 빼지 않고 하도진이 잡은 채로 내버려뒀다.그때 하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 애들이 아직 얼마나 됐다고 벌써 호텔까지 잡아서 생일잔치를 해요? 별로 상관도 없는 사람들 잔뜩 불러 놓고 괜히 번거롭기만 하잖아요.”말투
10분 뒤, 이남주는 자기 몫으로 받은 선물 상자를 안고 민하윤의 사무실로 들어왔다.“저 새해 연휴 끝나고 일주일 휴가 냈어요. 본가에 좀 다녀오려고요.”그러면서 과일 상자를 내려놓았다.“이 과일들 품질 꽤 괜찮던데... 부장님이 가져가서 두 아들한테 주세요.”민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텔레파시인가...’그때 이남주가 물었다.“그런데 왜 저를 부르셨어요?”민하윤은 멋쩍게 웃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이남주는 한참을 웃더니 허리까지 제대로 펴지 못했다.“저는 예전에 쌍둥이 부모들이 왜 그러는지 진짜 이해 못 했거든요.”“똑같이 생긴 애가 둘이나 있는데 굳이 똑같은 옷, 똑같은 신발을 사 주잖아요. 남들이 구별할까 봐 그러는 줄 알았어요.”이남주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덧붙였다.“이제는 좀 알 것 같네요.”민하윤은 말하자면 눈물 없이는 못 듣는다는 얼굴로 연신 고맙다고 했다.“그러면 사양 안 하고 받을게요. 고마워요.”...하도진은 민하윤을 데리러 은행 근처까지 와 있었다.잠시 뒤 민하윤에게 전화가 왔다.차를 좀 더 가까이 세우고 직접 건물 안으로 들어와 달라는 부탁이었다.하도진은 바로 빈정거리듯 말했다.“애틋한 선배가 떠났으니 이제야 나도 사람들 앞에 내놓을 생각이야?”예상대로 전화기 너머에서 민하윤의 욕 한마디가 날아왔다.민하윤은 전화를 끊고 과일 상자 몇 개를 어떻게 엘리베이터까지 옮길지 고민했다.그때 서용우가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그는 눈치도 빨라 곧바로 과일 상자를 들어 엘리베이터 안까지 옮겨 줬다.민하윤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근황을 물었다.젊고 밝은 성격의 서용우는 조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부장님, 저 지난주에 고객팀 팀장으로 승진했어요. 월급도 15퍼센트 올랐고요.”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서용우는 과일 상자를 밖까지 옮겨 준 뒤 택시까지 불러 주려고 했다.“괜찮아요. 저를... 데리러 온 사람이 있어서요.”민하윤이
백누리가 공항에서 엉망으로 울어 화장까지 번진 사진은 무려 일주일 동안 연예 뉴스 메인을 장식했다.소속사 홍보팀 직원들이 어떻게든 기사를 내리려고 애썼지만 끝내 실패했다.나은지는 새로 계약한 남자 배우를 데리고 지벤의 레드카펫 행사에 다녀온 참이었다.돌아오자마자 연예 뉴스 실시간 검색어에 떡하니 걸려 있는 기사를 보고 얼굴이 일그러질 만큼 화가 났다.백누리를 처음부터 지금 자리까지 끌어올린 사람이 바로 나은지였다.가장 힘들었던 시절, 백누리는 웹드라마에서 이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단역밖에 맡지 못했다.한 달 내내 촬영장에서 고생하고 받은 돈이 고작 70만 원이었다.그마저도 작품이 공개되고 나니 무능한 제작자가 편집을 엉망으로 해 백누리의 장면은 몇 컷밖에 남지 않았다.데뷔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버텨 왔다.그동안 겪은 일들은 남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았다.나은지가 백누리를 아끼는 만큼 지금의 분노도 컸다.방바닥에는 구겨진 휴지가 잔뜩 널려 있었다.나은지는 그 한가운데 서서 백누리의 코앞을 가리키며 쏘아붙였다.“너 미쳤어? 인생의 첫 여우주연상을 받는 날에 시상식에서 도망쳐서 공항까지 가더니 화장이 다 번지도록 울고 그 꼴을 행인들한테 찍혀 인터넷에 올라가게 해?”“내가 네 경쟁 배우들이었으면 자다가도 웃다가 깨겠어. 넌 지금 네 커리어를 스스로 박살 내고 있는 거야!”“장 감독님한테도 제대로 찍혔고 업계 사람들한테는 웃음거리까지 됐어!”나은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일하기 싫으면 그냥 말해. 스무 살 넘은 어린 애들이 네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줄 서 있어.”“경쟁 배우들은 네가 한 번만 삐끗하길 기다렸다가 네 명품 광고 다 뺏어 가려고 난리라고!”백누리는 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얼굴을 파묻고 있었고 퉁퉁 부은 눈가에는 물기가 번들거렸다.지금의 백누리는 깨져 버린 도자기 인형처럼 위태로워 보였다.말도 없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평소 같았으면 벌써 실실 웃으며 나은지
“네.”임형섭은 모르는 척 짧게 대답했지만 시선은 계속 엘리베이터 쪽을 향하고 있었다.백누리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하윤이한테도 인사하고 가실래요? 제가 전화할게요. 조금만 늦게 비행기를 타시면...”하지만 임형섭은 고개를 저으며 백누리가 전화를 걸려는 걸 막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막상 얼굴을 볼 용기는 없네요. 보면... 못 떠날 것 같아서요.”백누리는 코를 훌쩍이고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다른 사람을 좋아해 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보셨어요?”임형섭은 대답을 피했고 그저 웃으며 가방을 메고 돌아섰다.탑승구로 들어가기 전, 임형섭은 백누리가 있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백누리도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손을 흔들어 답했다.야위고 훤칠한 뒷모습이 터미널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백누리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백누리는 울면서 민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왜 안 왔어? 왜 배웅하러 안 왔어...”백누리는 울먹이며 따지듯 말했다.“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데...”민하윤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울음과 원망 섞인 목소리를 듣기만 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백누리는 결국 전화를 끊더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엉엉 울었다.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휴대전화를 들어 백누리를 찍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카메라를 가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하도진은 인삼 생강차를 끓여 민하윤 앞에 가져다 놓으며 물었다.“무슨 생각 하는 거야?”민하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리고 먼저 다가가 하도진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넓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자 속눈썹 끝에 맺혀 있던 눈물이 셔츠를 서서히 적셨다.하도진은 놀라 급히 뒤를 돌아보려 했다.하지만 민하윤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하도진의 어깨를 꽉 붙잡고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무슨 일인데?”민하윤의 몸이 희미하게 떨렸다.민하윤은 계속 고개만 저으며 입술을 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