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후 4시, 한남동 펜트하우스 1층 로비. 주총을 앞두고 서류를 챙기러 잠시 들른 서린의 앞에, 요란스러운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린아! 아이고, 내 며느리 서린아!”
고급 밍크코트를 걸친 진혁의 어머니, 즉 서린의 시어머니 배옥자 여사였다. 그녀는 명품 핸드백을 내팽개치고 서린의 구둣발 앞에 털썩 엎드려 바닥을 쳤다.
“서린아, 네 남편 좀 살려다오! 진혁이가 감방에서 죽게 생겼단다! 선처를 부탁하는 탄원서 한 장만 써다오!”
로비에 있던 입주민들과 보안요원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보았다. 서린은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눈빛으로 바닥에 엎드린 시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배옥자 여사님. 여기서 이러시면 체면 깎이실 텐데요.”
밤 11시, 에이펙스 리조트 최상층 프라이빗 펜트하우스. 통유리창 너머로 달빛을 머금은 50만 평의 골프 코스와 검푸른 제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거실 중앙에는 최고급 천연 잔디로 시공된 둘만의 실내 퍼팅 그린이 펼쳐져 있었다.샤워를 마친 서린은 얇은 실크 슬립만을 걸친 채 와인 잔을 들고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구진혁의 손에 이끌려 헛스윙 굴욕을 당하고, 손목이 꺾이며 피눈물을 쏟았던 그 참담했던 과거.지금은 10조 원 규모의 에이펙스를 이끄는 회장이었다. 그래도 오늘 밤 가장 오래 떠올리고 싶은 것은 계약서나 시가총액이 아니었다. 7번 홀에서 같이 걸었던 길과, 자신이 울자 난처하게 웃던 태오의 얼굴이었다.서린은 와인 잔을 창틀 옆에 내려놓았다. 낮의 7번 홀은 어둠 속에 윤곽만 남아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카메라 없는 길을 한 번 더 걷자던 태오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걷고 돌아온 뒤라, 밖을 내다보는 지금도 발끝에 잔디 감촉이 남아 있는 듯했다.그녀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누가 볼까 봐 먼저 지웠을 표정이었다. 서린은 그대로 두었다. 낮에 찍힌 사진에도 이런 얼굴이 남아 있을까. 태오가 나오면 함께 보고 싶은 사진이 많았다.서린이 퍼팅 그린 쪽으로 돌아섰다. 잘못 치면 다시 치면 됐다. 남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빗맞히거나 실패를 사과할 이유가 없었다. 낮에 그렇게 많이 웃고도 아직 더 웃을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그린 끝에 놓인 홀컵이 보였다. 서린은 퍼터를 들까 하다가 욕실 쪽을 봤다. 혼자 쳐도 됐지만, 들어가는 모습을 태오가 봐줬으면 했다. 잠깐 그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에 따로 켜둔 조명을 조금 밝게 했다.
1년 뒤, 쪽빛 제주 바다가 눈부시게 펼쳐진 에이펙스 프라이빗 골프 리조트 7번 홀. 바다를 배경으로 조성한 아일랜드 그린이 내려다보이는 티박스 뒤편 전망 데크 위로 순백의 버진로드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하객석과 단상은 샷을 보낼 그린보다 뒤쪽에 자리했다.전 세계 정재계 거물들과 PGA 투어 챔피언들, 그리고 수백 명의 취재진이 운집한 가운데 세기의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신랑 강태오 군과 신부 백서린 양의 입장이 있겠습니다!”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웨딩마치가 제주 앞바다에 울려 퍼졌다. 서린은 몸매를 아찔하게 드러내는 순백의 머메이드 실크 드레스를 입고, 눈부신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쓴 채 버진로드를 밟았다.그녀의 곁에는 말끔한 블랙 턱시도 차림의 태오가 듬직하게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남자의 단단한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바람이 면사포를 들어 올렸다. 태오가 속도를 늦추자 서린도 보폭을 줄였다. 빨리 단상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과 이 길을 조금 더 걷고 싶은 마음이 함께 들었다. 그녀는 면사포 끝을 정돈한 뒤 그의 팔을 다시 잡았다.“첫 라운드보다 이게 먼저네.”서린이 7번 홀을 둘러보며 말했다.“오늘은 스코어 안 적으실 거죠?”“네가 얼마나 긴장하는지부터 볼게.”태오가 웃었다. 도면에서 짚었던 곳을 결혼식장으로 고른 날이 떠올랐다.“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밤 8시, 신라호텔 영빈관. 정재계 총수들과 글로벌 스포츠 스타 수백 명이 모인 ‘에이펙스 마스터스 제패 기념 갈라 파티’.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서린은 등을 과감하게 드러낸 블랙 백리스 실크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서린의 곁에는 턱시도를 차려입은 태오가 듬직하게 서서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연회장의 화려함이 아닌, 서로의 입술을 향하고 있었다. 파티가 무르익었을 무렵, 태오가 서린의 손을 잡고 2층 프라이빗 스위트룸으로 이끌었다.달칵.문이 잠기는 순간, 태오는 서린을 문가 벽으로 밀어붙이며 거칠게 입술을 집어삼켰다.“하아…… 읏…… 태오야……!”남자의 거대한 손길이 서린의 매끄러운 등을 쓸어내려 드레스 지퍼를 내렸다. 서늘한 공기와 남자의 뜨거운 손바닥이 교차하는 순간, 서린의 전신에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태오가 서린의 골반을 들어 올려 자신의 허리에 감싸 안으며 귓가에 굵직한 숨을 토해냈다.“사모님, 오늘 꼭 여쭙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쇄골과 목덜미를 탐닉하며 속삭였다.“이제…… 저와 영원히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평생 사모님의 남편이자 전담 프로가 되고 싶습니다.”태오가 주머니에서 5캐럿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곧바로 끼워주지는 않았다. 반지를 든 채 서린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 전까지 막힘없던 말도 멎었다.
마스터스 우승 뒤 에이펙스 홀딩스의 시가총액이 10조 원을 돌파했다. 경영 정상화와 기술 공급 계약, 공개된 분기 실적에 쌓인 기대 위로 우승 소식이 더해졌다. 서린은 시세 화면보다 다음 분기 전망을 오래 봤다. 선수의 우승은 회사의 매출이 아니었다. 높아진 기대를 실적으로 받아낼 일은 회사에 남았다.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와 중동 국부펀드에서 온 제안에는 스폰서십과 리조트 지분 투자가 함께 들어 있었다. 다년간 계획을 합한 규모는 1조 원대였지만 아직 들어온 돈은 아니었다. 서린은 실사가 끝난 계약과 조건 협의 중인 제안을 나눴다. 그때 비서실장이 태블릿을 들고 들어왔다.“회장님, 변호사 쪽에서 구진혁의 치료 이송 소식을 전했습니다.”화면에는 소송대리인이 정리한 짧은 메모가 있었다. 진혁이 수감 중 우승 소식을 접하고 자해한 뒤 외부 치료를 받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상세한 진료기록은 없었다. 형 집행 중의 치료 이송이며, 병원에 간다는 이유로 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법무부장관 승인에 따라 공주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시설로 이송. 수용자 처우 유지. 이후 치료 경과와 계속 입원할 필요에 따라 재평가.’“치료는 그쪽에서 판단하겠군요.”서린은 이송 사유와 치료 장소를 읽고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가 어디에 있든 다시 남편이라는 이유로 자기 삶에 들어오게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비서실장은 더 보고할 것이 있는지 기다렸다.“내 사건에 영향이 있는 소식만 전해주세요.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까지 계속 알고 싶지는 않아요.”서린이 메모를 덮고 창밖을
18번 홀 그린. 태오는 홀컵 50센티미터 옆에 멈춘 공 앞에 섰다. 갤러리 쪽에서 환호가 일었지만 퍼터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공을 넣은 뒤 인사하면 됐다.짧은 퍼트에 쓰는 시간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태오는 발을 잡고 헤드를 공 뒤에 놓았다. 캐디가 뒤로 비켜섰다. 네 라운드를 함께 걸었던 사람이 이제 마지막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딸깍— 땡그랑!공이 컵에 떨어졌다. 태오는 퍼터를 들어 관중에게 인사하고 캐디를 안았다. 등을 두드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캐디가 이제 끝났다고 말해주자 그제야 웃음이 터졌다. 더 계산할 다음 홀이 없었다.와아아아—!최종 합계 21언더파. 종전 20언더파였던 72홀 최소타 기록을 한 타 넘어선 대회 신기록이었다. 한국인 최초의 마스터스 토너먼트 우승이기도 했다. 태오는 동반 선수와 인사를 나눈 뒤 스코어 제출 구역으로 갔다. 마커와 함께 홀별 타수를 대조하고 인증을 마쳤다. 서명한 카드를 내놓자 비로소 오늘의 스코어가 자기 손을 떠났다.***버틀러 캐빈의 방송을 마친 뒤, 클럽하우스 뒤편 야외 시상석. 디펜딩 챔피언 로버트 존슨이 그린 재킷을 들어주었다. 태오는 팔을 넣고 어깨를 맞췄다. 조금 전 실내에서 입었을 때와는 달리, 눈앞에 코스를 따라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다.재킷을 입은 태오에게 로버트가 악수를 청했다. 오늘까지 같은 우승을 두고 겨뤘던 손이었다. 태오는 그의 눈을 보고 고맙다고 답했다.카메라 너머로 서린이 보였다. 그녀는 남자가 입은 재킷을 보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자기에게 걸쳐주겠다던 약속보다, 저 옷을 입은 태오의 이름이 불리
최종 라운드 18번 홀 티박스. 태오는 전광판을 보고 캐디에게 점수를 확인했다. 20언더파, 2위와는 네 타 차였다.어제 얻은 여유를 오늘도 지키고 마지막 홀에 왔다. 네 타. 태오는 숫자를 읽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당장 한 번의 실수로 뒤집힐 차이는 아니었다. 캐디가 물병을 건네자 몇 모금 마시고 돌려줬다. 이제는 물이 넘어가는 느낌도 알 것 같았다.“티샷은 계획대로 가시겠습니까?”캐디가 물었다. 태오는 페어웨이 양쪽과 휘어지는 구간을 봤다. 익숙한 드라이버로 보낼 공간이 있었다. 안전하게 친다는 말이 반드시 낯선 클럽으로 바꾸라는 뜻은 아니었다.“연습 때 정한 쪽으로 보내죠. 더 멀리 치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갤러리 로프 앞에 서린이 있었다. 아젤리아 꽃이 핀 길 끝에서 그녀가 손을 들어 보였다. 태오도 답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묻는 중계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서린은 허리를 더 돌려야 한다던 첫 레슨을 떠올렸다. 그때는 자꾸 샷이 꺾여 성질부터 났는데, 오늘은 공도 치지 않는 손바닥에 땀이 났다. 태오가 캐디와 웃으며 이야기하자 그녀도 모자챙을 고쳐 썼다. 이번 샷도 잘 보이는 자리에 서 있었다.태오는 티 높이를 맞추고 어드레스에 들어갔다. 마지막 홀이라서 달라지는 일부터 만들지 않기로 했다. 목표를 본 뒤 공으로 돌아와 준비한 스윙을 했다.쉬이익— 콰앙!공이 페어웨이의 굽이를 지나 중앙에 떨어졌다. 총거리가 표시되자 중계진이 소리를 높였다.“340미터! 좋은 위치입니다. 이제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