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의 매그놀리아 레인. 오래된 목련나무들이 터널을 이루는 진입로를 따라, 순백의 캐딜락 에스컬레이드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전 세계 골퍼들의 영원한 성지이자, 전설들이 숨 쉬는 꿈의 무대 마스터스 토너먼트. 차 문이 열리고, 에메랄드빛 실크 수트를 입은 백서린 회장이 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곁에는 붉은 에이펙스 엠블럼이 새겨진 재킷을 걸친 태오가 있었다. 취재가 허용된 구역을 지나자 카메라들이 두 사람 쪽으로 향했다. 태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찰칵—! 찰칵—!
- "한국 마스터스 챔피언, 마스터스 특별 초청 선수 강태오 프로와 에이펙스 홀딩스 백서린 회장이 오거스타에 공식 입성했습니다!"
외신 기자들의
마스터스 우승 뒤 에이펙스 홀딩스의 시가총액이 10조 원을 돌파했다. 경영 정상화와 기술 공급 계약, 공개된 분기 실적에 쌓인 기대 위로 우승 소식이 더해졌다. 서린은 시세 화면보다 다음 분기 전망을 오래 봤다. 선수의 우승은 회사의 매출이 아니었다. 높아진 기대를 실적으로 받아낼 일은 회사에 남았다.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와 중동 국부펀드에서 온 제안에는 스폰서십과 리조트 지분 투자가 함께 들어 있었다. 다년간 계획을 합한 규모는 1조 원대였지만 아직 들어온 돈은 아니었다. 서린은 실사가 끝난 계약과 조건 협의 중인 제안을 나눴다. 그때 비서실장이 태블릿을 들고 들어왔다.“회장님, 변호사 쪽에서 구진혁의 치료 이송 소식을 전했습니다.”화면에는 소송대리인이 정리한 짧은 메모가 있었다. 진혁이 수감 중 우승 소식을 접하고 자해한 뒤 외부 치료를 받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상세한 진료기록은 없었다. 형 집행 중의 치료 이송이며, 병원에 간다는 이유로 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법무부장관 승인에 따라 공주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시설로 이송. 수용자 처우 유지. 이후 치료 경과와 계속 입원할 필요에 따라 재평가.’“치료는 그쪽에서 판단하겠군요.”서린은 이송 사유와 치료 장소를 읽고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가 어디에 있든 다시 남편이라는 이유로 자기 삶에 들어오게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비서실장은 더 보고할 것이 있는지 기다렸다.“내 사건에 영향이 있는 소식만 전해주세요.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까지 계속 알고 싶지는 않아요.”서린이 메모를 덮고 창밖을
18번 홀 그린. 태오는 홀컵 50센티미터 옆에 멈춘 공 앞에 섰다. 갤러리 쪽에서 환호가 일었지만 퍼터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공을 넣은 뒤 인사하면 됐다.짧은 퍼트에 쓰는 시간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태오는 발을 잡고 헤드를 공 뒤에 놓았다. 캐디가 뒤로 비켜섰다. 네 라운드를 함께 걸었던 사람이 이제 마지막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딸깍— 땡그랑!공이 컵에 떨어졌다. 태오는 퍼터를 들어 관중에게 인사하고 캐디를 안았다. 등을 두드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캐디가 이제 끝났다고 말해주자 그제야 웃음이 터졌다. 더 계산할 다음 홀이 없었다.와아아아—!최종 합계 21언더파. 종전 20언더파였던 72홀 최소타 기록을 한 타 넘어선 대회 신기록이었다. 한국인 최초의 마스터스 토너먼트 우승이기도 했다. 태오는 동반 선수와 인사를 나눈 뒤 스코어 제출 구역으로 갔다. 마커와 함께 홀별 타수를 대조하고 인증을 마쳤다. 서명한 카드를 내놓자 비로소 오늘의 스코어가 자기 손을 떠났다.***버틀러 캐빈의 방송을 마친 뒤, 클럽하우스 뒤편 야외 시상석. 디펜딩 챔피언 로버트 존슨이 그린 재킷을 들어주었다. 태오는 팔을 넣고 어깨를 맞췄다. 조금 전 실내에서 입었을 때와는 달리, 눈앞에 코스를 따라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다.재킷을 입은 태오에게 로버트가 악수를 청했다. 오늘까지 같은 우승을 두고 겨뤘던 손이었다. 태오는 그의 눈을 보고 고맙다고 답했다.카메라 너머로 서린이 보였다. 그녀는 남자가 입은 재킷을 보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자기에게 걸쳐주겠다던 약속보다, 저 옷을 입은 태오의 이름이 불리
최종 라운드 18번 홀 티박스. 태오는 전광판을 보고 캐디에게 점수를 확인했다. 20언더파, 2위와는 네 타 차였다.어제 얻은 여유를 오늘도 지키고 마지막 홀에 왔다. 네 타. 태오는 숫자를 읽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당장 한 번의 실수로 뒤집힐 차이는 아니었다. 캐디가 물병을 건네자 몇 모금 마시고 돌려줬다. 이제는 물이 넘어가는 느낌도 알 것 같았다.“티샷은 계획대로 가시겠습니까?”캐디가 물었다. 태오는 페어웨이 양쪽과 휘어지는 구간을 봤다. 익숙한 드라이버로 보낼 공간이 있었다. 안전하게 친다는 말이 반드시 낯선 클럽으로 바꾸라는 뜻은 아니었다.“연습 때 정한 쪽으로 보내죠. 더 멀리 치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갤러리 로프 앞에 서린이 있었다. 아젤리아 꽃이 핀 길 끝에서 그녀가 손을 들어 보였다. 태오도 답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묻는 중계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서린은 허리를 더 돌려야 한다던 첫 레슨을 떠올렸다. 그때는 자꾸 샷이 꺾여 성질부터 났는데, 오늘은 공도 치지 않는 손바닥에 땀이 났다. 태오가 캐디와 웃으며 이야기하자 그녀도 모자챙을 고쳐 썼다. 이번 샷도 잘 보이는 자리에 서 있었다.태오는 티 높이를 맞추고 어드레스에 들어갔다. 마지막 홀이라서 달라지는 일부터 만들지 않기로 했다. 목표를 본 뒤 공으로 돌아와 준비한 스윙을 했다.쉬이익— 콰앙!공이 페어웨이의 굽이를 지나 중앙에 떨어졌다. 총거리가 표시되자 중계진이 소리를 높였다.“340미터! 좋은 위치입니다. 이제 남
마스터스 토너먼트 3라운드, 악명 높은 ‘아멘 코너(Amen Corner)’. 유리알 그린과 예측 불가능한 돌풍으로 수많은 메이저 챔피언들의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 12번 홀 파3.레이스 크리크(Rae's Creek)를 건너 앞쪽 벙커 뒤로 이어진 좁은 그린, 핀은 오른쪽 가장자리 가까이에 꽂혀 있었다. 세계 랭킹 1위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로버트 존슨의 볼이 바람에 밀려 크릭 물속으로 풍덩 처박혔다.“공이 크릭에 빠졌습니다! 로버트 존슨, 이 홀에서 타수를 잃을 위기입니다!”탄식이 잦아든 뒤 태오가 티박스에 올랐다. 14언더파, 이 홀에 들어오기 전까지 한 타 차 선두였다. 캐디가 9번 아이언을 꺼내 들었다. 앞선 공을 밀어낸 바람이 깃발을 계속 흔들고 있었다.“오른쪽 핀보다는 그린 중앙으로 가시죠. 물을 넘긴 뒤 멈출 공간부터 확보해야겠습니다.”태오가 로프 앞줄의 서린을 찾았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고 작게 웃었지만 스윙을 흉내 내지는 않았다. 서린도 방금 물에 빠진 공을 봤다. 이 바람에서 어느 클럽이 나은지 답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태오는 먼저 캐디가 제안한 중앙 목표를 눈에 담았다. 한 타를 잃은 상대가 있다고 자신도 핀을 공격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다음 홀에 서는 쪽을 택했다.“9번보다 8번으로 낮게 보내겠습니다. 목표는 그대로 중앙입니다.”캐디가 깃발과 타깃을 번갈아 본 뒤 클럽을 바꿔주었다. 태오는 힘을 더하는 대신 정한 높이로 지나갈 스윙을 준비했다.8번 아이언 헤드를 공 뒤에 놓았다. 홀컵을 직접 겨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의 매그놀리아 레인. 오래된 목련나무들이 터널을 이루는 진입로를 따라, 순백의 캐딜락 에스컬레이드가 미끄러져 들어왔다.전 세계 골퍼들의 영원한 성지이자, 전설들이 숨 쉬는 꿈의 무대 마스터스 토너먼트. 차 문이 열리고, 에메랄드빛 실크 수트를 입은 백서린 회장이 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곁에는 붉은 에이펙스 엠블럼이 새겨진 재킷을 걸친 태오가 있었다. 취재가 허용된 구역을 지나자 카메라들이 두 사람 쪽으로 향했다. 태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찰칵—! 찰칵—!- "한국 마스터스 챔피언, 마스터스 특별 초청 선수 강태오 프로와 에이펙스 홀딩스 백서린 회장이 오거스타에 공식 입성했습니다!"외신 기자들의 열띤 취재 열기 속에서, 태오는 서린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남자의 단단한 손길이 서린의 골반을 스치며 은밀한 전율을 남겼다.“사모님, 저 푸른 페어웨이가 보이십니까?”태오가 낮게 속삭였다.“필드를 떠났을 때는 다시 티박스에 서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여기까지 오니…… 첫 홀부터 머릿속에서 치고 있군요.”서린의 입술 끝이 매혹적인 호를 그렸다.“당신이 실력으로 뚫고 올라온 거야, 태오야.”태오는 답을 하려다 코스 쪽을 다시 봤다. 서린은 그 방향을 함께 바라봤다. 처음 이 장소에 온 그가 자신보다 페어웨이를 오래 보는 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 미국으로 출발하는 날. 김포공항 에이펙스 전용기 격납고에서 비서실장이 출국 서류와 함께 보관해둔 금박 봉투를 건넸다. 태오에게 온 마스터스 초청장이었다.“회장님, 오거스타에서 온 초청장 원본도 챙겼습니다. 강 프로님께 전해주십시오.”[The Masters Tournament Official Invitation: Pro Kang Tae-oh]마스터스 주최 측이 보내온 특별 초청이었다. 국내 우승만으로 자동 출전권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태오의 징계 기록이 정정된 뒤 복귀 성적과 경기 자료가 전달됐고, 주최 측의 초청 결정이 왔다. 서린은 봉투에 적힌 선수 이름을 읽으며 웃었다. 후원사가 아니라 출전자로 그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그때, 비행기 트랩 위에서 태오가 걸어 내려왔다. 선글라스를 벗은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에 깊은 신뢰와 사랑이 서려 있었다.“사모님, 이제 세계로 나갈 시간입니다.”남자가 손을 내밀었다.서린은 망설임 없이 남자의 크고 단단한 손을 맞잡았다.서린이 초청장을 태오에게 건넸다.“당신 이름으로 온 거야. 직접 봐.”태오는 계단에 오르려던 발을 멈추고 봉투를 열었다. 징계 통보서가 아니라 경기에 와달라는 편지였다. 그는 출전자로 적힌 자기 이름을 읽은 뒤에야 서린을 보고 웃었다.태오가 편지를 봉투에 넣고 서린과 함께 트랩을 올랐다. 출발 전부터 내내 웃고 있는 것이 스스로도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