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다음 날 오후, 청담동의 최고급 프라이빗 라운지 카페. 통유리벽 너머로 쏟아지는 화사한 햇살 아래, 서린은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넘기며 사모펀드 관련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때, 요란스러운 킬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짓이기며 다가왔다.
“어머, 백서린 씨? 여기서 다 보네.”
민채리였다.
화려한 명품 로고가 박힌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고 수천만 원짜리 에르메스 백을 든 그녀가 서린의 맞은편 의자를 거칠게 빼고 앉았다. 서린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예의를 밥 말아 먹었나 보네. 남의 자리에 허락도 없이 앉는 꼴이 딱 네 수준 그대로야.”
채리의 얼굴이 순간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입술이 많이 트셨네? 어머, 목덜미에 그 붉은 자국은 뭐야? 진혁 씨가 남긴 건 아닐 테고.”
채리의 시선이 서린의 목덜미에 남은 희미한 붉은 흔적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젯밤 태오가 남긴 치명적인 입맞춤의 잔해였다. 하지만 서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서린은 펼쳐놓은 서류를 채리가 읽을 수 없도록 뒤집었다. 자신의 목덜미에 쏠린 관심을 돌릴 이야기는 있었다.
“민채리. 구진혁이 스폰 계약서에 사인하게 해준 성수동 아파트, 네 명의로 등기했다고 정말 네 집인 줄 아니?”
채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뭐?”
“등기 명의만 네 이름이지, 전세권은 진우홀딩스 법인 명의더구나. 넌 그 인간이 기분 내킬 때 던져주는 푼돈이나 받아먹는 임시 거주자에 불과해.”
서린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덮으며 탁자 위로 탁 내던졌다.
“그 인간, 지금 회사 부동산 PF 대출이 막히자 너한테 사준 명품 가방이랑 다이아 시계까지 전부 법인 자산으로 묶어둘 생각이야. 버려질 날이 코앞인데, 주제도 모르고 내 앞에서 꼬리를 쳐?”
채리의 손이 가방 손잡이로 갔다.
채리는 가방 손잡이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렸다. 방금까지 자랑처럼 내세우던 로고가 서린이 말한 법인 자산이라는 말에 가려졌다. 진혁이 사줬다는 사실만 믿고 있던 물건들이었고, 되돌려 달라는 말을 들을 경우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서린의 서류철을 훔쳐보다가 시선을 급히 거두었다.
그녀는 따져 묻고 싶었지만, 무엇부터 확인해야 할지도 몰랐다. 계약서를 꼼꼼히 읽지 않은 일이 처음으로 걸렸다.
“거짓말하지 마……! 진혁 씨가 나한테 얼마나 지극정성인데!”
“지극정성?”
서린이 피식, 메마른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그 인간이랑 7년을 살았어. 쓸모가 다하면 내 뱃속의 아이 유산 증명서까지 투자자들에게 팔아먹던 파렴치한 놈이야. 네깟 인플루언서 하나 토사구팽하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울걸?”
서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채리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똑똑히 기억해 둬. 구진혁 밑에서 씹히다 버려지는 껌이 될지, 아니면 내 밑에서 살길을 찾을지. 결정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채리는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잔을 들려던 손이 뜨거운 표면에 닿고 나서야 그녀가 짧게 소리를 냈다. 서린은 출입문 앞에서 멈췄다. 오늘 당장 채리가 자신의 말을 믿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앗……!”
“어설프게 건드리지 마. 넌 내 상대조차 안 되니까.”
서린은 걸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쏘아붙이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민채리, 네가 살고 싶다면 조만간 내 연락을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구진혁의 비자금 장부와 차명 골프 회원권 내역, 네 손으로 가져오게 될 테니까.”
“내가 왜 그딴 짓을 해? 난 진혁 씨를 사랑해!”
채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 손님이 돌아보자 그녀는 뒷말을 삼켰다. 진혁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려다 오히려 사적인 사정부터 드러낸 셈이었다.
“사랑? 그 남자가 감방에 안 가려고 너부터 버릴 때도 그 말이 나오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서린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휴대폰 화면을 켜자, 구진혁으로부터 온 형식적인 문자가 와 있었다.
[홍콩 출장 출발한다. 집에서 얌전히 있어.]
서린은 그 문자를 보자마자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곧바로 태오의 번호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구진혁 오늘 오후 4시 비행기로 홍콩 출국합니다. 오늘 밤 11시, 한남동 펜트하우스 지하 실내 연습장으로 오세요.]
단 5초 만에 도착한 태오의 답장.
[문 열어두세요. 오늘 밤은 밤새도록 스윙만 시킬 생각 없으니까.]
서린은 답장을 읽고 차창 너머 카페 입구를 돌아보았다. 채리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오늘 건넨 말이 먹혔는지는 진혁을 만나보면 알게 될 것이다. 조수석에 올려두었던 업무 서류를 가방에 넣고 안전벨트를 맸다. 밤 11시에는 직접 문을 열어야 했다.
태오는 그린에 올라 자기 공의 위치를 확인했다. 홀컵 옆 2미터. 페어웨이에서 볼 때보다 짧았지만, 그 공에 붙은 타수까지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마커를 놓고 공을 집어 든 사이 데이비드 조가 그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세 번째 샷으로 올린 그의 공은 태오의 공보다 홀에서 멀리 있었다. 먼저 버디 퍼트를 할 차례였다.데이비드는 라인을 읽은 뒤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다. 퍼터를 떠난 공이 완만한 경사를 타고 굴러 홀 안으로 떨어졌다.“데이비드 조, 버디! 20언더파로 경기를 마칩니다!”갤러리의 박수 속에서 그가 공을 꺼냈다. 태오도 짧게 손뼉을 쳤다. 전광판에 같은 숫자가 나란히 붙었다. 캐디가 한 걸음 다가왔고 태오는 퍼터 그립을 고쳐 잡았다. 데이비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자신의 공이 남아 있었다.“두 번 안에 마무리하면 됩니다.”캐디가 조용히 말했다. 태오는 그 계산을 알고 있었다. 2온을 해뒀으니 한 번에 넣으면 이글, 두 번에 넣어도 버디였다. 넣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첫 공을 너무 멀리 보내지만 않으면 됐다.태오는 홀컵 뒤편으로 돌아가 경사를 봤다. 공이 우측으로 조금 휘어질 라인이었다. 강하게 밀어 곧장 넣는 방법을 떠올리다가 다시 지웠다. 방금 우드로 얻은 기회를 퍼터로 과시할 필요는 없었다.“어느 쪽 보십니까?”캐디가 물었다. 태오는 자신이 읽은 지점을 짚었다. 캐디의 답과 비교한 뒤 공을 내려놓았다.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컵을 조금 지나갈 정도의 속도였다. 놓쳐도 다음 공을 자기 거리 안에 남기고 싶었다.
제주 한라 마스터스 CC 18번 홀 파5. 태오는 마지막 티박스에 오르기 전 스코어보드를 확인했다. 자신의 이름 옆에는 20언더파, 데이비드 조의 이름 옆에는 19언더파가 적혀 있었다.어제 다섯 타였던 차이가 하나만 남았다. 태오가 오늘 세 타를 줄이는 동안 데이비드는 일곱 타를 줄였다. 태오는 바뀐 숫자를 한 번 더 읽었다. 옆에서 장갑을 고쳐 끼는 데이비드의 표정에는 마지막 홀에서도 따라붙겠다는 기색이 선명했다.“전장 580미터, 18번 홀입니다. 우측 현무암 해저드를 피하는 티샷이 중요합니다!”해설이 이어졌다. 전국 시청률이 28%를 넘었다는 이야기는 태오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캐디에게 드라이버를 받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봤다.갤러리 로프 앞줄에 서린이 있었다. 태오가 잠깐 웃자 그녀도 답했다. 그녀의 모자챙 아래로 눈이 마주쳤다. 캐디가 말을 걸 때까지 붙들고 있고 싶은 얼굴이었다. 태오는 아쉬움을 삼키고 손에 쥔 드라이버의 그립을 다시 고쳐 잡았다.콰아앙—!첫 공이 페어웨이 중앙으로 날았다. 330미터 지점에 멎은 것을 확인한 태오가 드라이버를 건넸다. 이제 남은 거리는 250미터였다. 마지막 티샷을 잘 보냈다는 안도보다 그 자리에서 어떤 공을 칠지가 먼저 떠올랐다.캐디가 그린 앞쪽을 가리켰다.“앞뒤로 바다입니다. 끊어서 3온으로 가시죠. 페어웨이에서 다음 공을 치면 됩니다.”태오는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끊어갈 지점과 그린까지의 경로를 차례로 봤다. 안전하게 보낸 뒤 짧은 샷을 붙이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샷과 퍼트까지 저절로 성공하는
최종 라운드 출발 1시간 전, 클럽하우스 챔피언 전용 VIP 락커룸. 육중한 원목 문이 닫히며 바깥의 떠들썩한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태오는 붉은색 에이펙스 경기복을 입은 채 라커 앞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달칵.비밀 키로 문을 열고 들어선 서린이 문을 걸어 잠갔다. 서린의 매혹적인 향수 향기가 좁은 락커룸을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태오가 뒤를 돌아보자, 서린이 남자의 가슴팍으로 다가와 경기복 옷깃을 단정하게 여며주었다.서린이 옷깃을 정리하자 태오가 물었다.“어제보다 더 긴장하셨습니까?”“네가 출발하면 기다리는 일밖에 못 하니까.”태오는 괜찮다고 장담하는 대신 가볍게 웃었다. 서린은 마지막 단추를 매만지고 손을 내렸다. 그의 긴장까지 없애주려 들지는 않았다.오늘은 두 사람 모두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다만 태오는 그 결과를 치러 나가는 사람이었다.“사모님.”“오늘 마지막 18개 홀이야, 태오야.”서린의 손가락이 남자의 목덜미를 쓸어 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태오의 커다란 손이 서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라커 벽으로 거칠게 밀착시켰다.쿵.남자의 거대한 몸에 갇힌 서린의 호흡이 순식간에 가빠졌다.“사모님, 오늘 우승하면 카메라 앞에서도 사모님께 먼저 가고 싶습니다. 우리 관계를 숨기지 않고요. 괜찮으십니까?”
대회 3라운드 무빙데이.제주 특유의 거센 돌풍과 함께 굵은 비바람이 코스를 덮쳤다. 선수들이 잇따라 더블보기를 범하며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태오는 17번 홀까지 단독 선두(16언더파)를 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18번 홀 파5, 마지막 고비가 찾아왔다.태오의 세 번째 샷이 돌풍에 휘말려 그린 옆 깊은 항아리 벙커 턱 러프에 처박힌 것이다.“핀까지 25미터, 심한 내리막 경사에 라이가 최악입니다. 파 세이브조차 어려워 보입니다!”해설진이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과거 구진혁의 돈을 받고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라이벌 프로들이 갤러리 틈에서 비열한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저 상처투성이 몸으로 저 라이를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아?’태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서린이 보였다. 그녀는 우산을 한쪽으로 기울이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가 레슨을 하며 수도 없이 고쳐주던 동작이었다. 태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발밑의 공을 봤다.‘사모님, 허리를 더 돌리셔야 합니다.’청담동 밀실에서 태오가 서린에게 가르쳤던, 그리고 어젯밤 침실에서 서린이 태오에게 가르쳐주었던 바로 그 회전의 비밀.‘손목을 쓰지 말고, 하체의 회전력으로 볼을 띄워.’태오는 60도 웨지를 눕혀 잡았다. 젖은 풀에 헤드가 걸리지 않도록 연습 동작을 해본 뒤, 발을 옮겨 자세를 정했다. 공을 띄울 곳과 떨어뜨릴 곳을 차례로 보고 나서 어드레스에 들어갔다. 바람이 몰아쳐도 서두르지 않았다.착&
가을의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는 제주 한라 마스터스 CC 1번 홀 티박스. 수천 명의 구름 갤러리들과 수십 대의 중계 카메라가 티마크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에이펙스 골프단 소속, 강태오 프로를 소개합니다!”장내 아나운서의 묵직한 음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와아아아—!3년 만의 공식 무대.올 블랙 골프웨어에 에이펙스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캡모자를 눌러쓴 강태오가 당당하게 티박스에 올랐다. 자기 이름이 불리자 태오는 장갑 낀 손으로 드라이버를 고쳐 쥐었다. 태오의 시선이 갤러리 로프 맨 앞줄에 머물렀다.순백의 실크 정장을 입고 우아하게 서 있는 에이펙스 홀딩스 백서린 회장. 서린의 붉은 입술이 태오를 향해 소리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당신의 필드야. 전부 찢어버려.’태오가 티에 공을 올렸다. 첫 연습 스윙은 조금 빨랐다. 그는 바로 공을 치지 않고 한 번 더 몸을 풀었다. 손에 익은 순서대로 돌아오자 호흡도 고르게 맞았다. 서린이 서 있는 쪽으로 기울던 관심이 비로소 눈앞의 공에 모였다.하체가 견고하게 땅을 움켜쥐고, 코어가 코일처럼 팽팽하게 감겨 올라갔다.쉬이이익— 콰아아앙—!지축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드라이버 헤드가 볼을 강타했다. 하얀 탄도가 제주 하늘을 총알처럼 가르며 솟구쳐 올랐다. 중계진의 비명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320미터! 캐리로만 300미터를 넘겨 1번 홀 그린
사흘 뒤, 제주도 서귀포의 최고급 프라이빗 골프 리조트. 에메랄드빛 제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18번 홀 그린 위로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내일부터 나흘간 펼쳐질 ‘한국 마스터스 챔피언십’ 공식 연습 라운딩이 끝난 시각.공식 연습이 끝나고 태오가 돌아왔다. 서린은 잘 쳤느냐고 묻다가, 그가 방금 지나온 그린을 다시 보는 걸 알아차렸다.“마지막 홀 마음에 걸려?”“퍼트 속도를 한 번 더 기억해두려고요.”서린은 재촉하지 않고 함께 잔디를 봤다. 내일부터 그가 겨룰 곳이었다.***독채 풀빌라 마스터룸에서는 은은한 아로마 향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태오는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흰 수건만을 두른 채, 거실 퍼팅 매트 위에 서 있었다. 남자의 단단한 등 근육과 떡 벌어진 어깨 위로 물방울이 보석처럼 반짝였다.달칵.실크 슬립 원피스를 걸친 서린이 다가와 남자의 등 뒤에 부드럽게 밀착했다. 서린의 매끄러운 뺨이 태오의 견갑골에 닿으며 뜨거운 체온을 전했다.“태오야.”“네, 사모님.”태오가 뒤돌아서며 서린의 잘록한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았다. 남자의 거대한 흉통에 서린의 부드러운 가슴이 빈틈없이 짓눌렸다.“내일 드디어 1라운드야. 떨려?”태오가 웃다가 잠깐 생각했다. 연습 라운드에서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내일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