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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조십일
차미주는 꿈속에서 헤매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문을 연 순간 유현진이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숙박 좀 할 수 있을까?”

차미주는 그녀에게 아이스 콜라 한 병 건넸다. 유현진이 콜라를 건네받자 그녀는 불쑥 제 머리를 툭 쳤다.

“내 정신 좀 봐. 너 탄산음료 안 마시지? 우유 갖다 줄게.”

“아니야, 괜찮아.”

유현진은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못 마시는 게 어디 있어?”

전에는 임신 준비 때문에 술과 담배, 음료 및 자극적인 것들을 싹 다 멀리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은 이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

‘임신 준비? 그딴 건 무능한 강한서더러 하라고 해!’

“너 정말 강한서 씨랑 이혼할 생각이야?”

차미주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으며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응.”

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또 송민영이랑 만나.”

차미주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그 여잔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애초에 결혼할 때도 찾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3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나타나? 세상에 남자가 없대? 아니 왜 유부남을 물고 늘어지는 거냐고? 강한서 그 자식도 한심해. 놀다 버린 장난감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

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

차미주는 마른기침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너 지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넌 그냥 빠지려고? 왜 그런 비겁한 인간들을 봐줘? 끝까지 맞서 싸우란 말이야! 그 여자가 온갖 청순한 척을 다 떨잖아. 사람들 앞에서 그 가면을 확 벗겨버려! 청순은 개뿔, 유부남이나 만나는 뻔뻔스러운 년인 주제에!”

“그래서? 내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 남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여운 여자로 남아?”

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결혼은 이미 실패야. 떠날 때까지 비참하게 굴고 싶지 않아. 마지막 남은 체면은 지켜줘야지.”

“그건 너한테 너무 불공평하잖아!”

불만 가득한 차미주의 표정을 바라보며 유현진이 너그럽게 웃었다.

“사실 나름대로 괜찮았어. 결혼한 요 몇 년간 강한서도 나한테 할 만큼 해줬어. 이 액세서리며 가방이며, 예전 같으면 어디 만져보기나 했겠어? 앞으론 다 내 것이 아니겠지. 생각해보니 좀 아쉽네.”

차미주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현진은 그해 문과 1등과 연기 과목 1등으로 T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예쁘고 연기 내공도 있어 매년 과 수석이었고 그야말로 압도적인 인물이었다.

교수님들도 그녀가 앞날이 무궁무진하다고 말씀했었다.

다만 졸업 후 곧바로 결혼했고 강씨 가문의 연유로 배우의 길을 가지 않았다. 만약 연기자의 길을 걸었더라면 그녀는 진작 스타 덤에 올라 가방과 액세서리가 차고 넘쳤을 것이다.

“그럼 이젠 어떡할 건데?”

“일단 며칠 푹 쉬고 싶어. 살 곳부터 찾고 ‘정상에서’의 더빙을 의논해보려고.”

차미주가 웃으며 물었다.

“백스테이지에서 무대 앞으로 나올 생각은 안 해봤어?”

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3년 동안 카메라 앞에 서지 못해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단지 카메라 앞에 서지 못했을 뿐 네 전공을 포기한 건 아니잖아. 더빙만으로 천만 명의 팬덤이 쌓였어. 더빙도 감정이입이 중요해. 지금 대사 기본기를 못 넘은 배우들도 인기가 어마어마한데 너 정도 미모에 연기력이라면 두려울 게 뭐가 있어? 엄청 유명해지진 못하더라도 밥벌이는 가뿐히 할 수 있을걸.”

하긴, 배우의 길에 오르진 않았지만 그녀는 현재 더빙계에 발을 디디고 먹고 살 만큼 충분히 잘 벌기에 시도하는 셈 치고 한번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연기를 좋아하지만 결혼 때문에 자신의 취미를 포기했다. 이번 생에 가장 어리석은 결정이지만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고 차미주가 쉴 새 없이 하품을 해대자 그제야 유현진이 그녀를 침실로 돌려보냈다.

소파에 누운 유현진은 잠을 못 이룰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세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자지도 못하고 갑작스러운 휴대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비몽사몽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가정부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사모님, 대표님의 하늘색 셔츠를 어디에 두셨어요?”

유현진은 어렴풋이 생각하며 말했다.

“2층 드레스룸의 동쪽 방향, 왼쪽부터 두 번째 칸에 있어요.”

가정부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다 찾아봤는데 없어요.”

“그럴 리가요. 내가 직접 스팀질하고 넣어뒀어요. 대표님께 물어봐봐요. 가져갔을 수도 있잖아요.”

가정부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대표님은 안 건드리셨대요. 사모님께서 직접 오셔서 찾아 주시겠어요?”

유현진은 그새 머리가 맑아졌다.

지금 강한서가 바로 가정부 앞에 서 있다는 걸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한서의 옷들이 어느 칸에 있는지 가정부가 모를 리 없는데 찾지 못한다는 건 당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더 꼼꼼히 찾아봐요. 그 집엔 드레스룸이 고작 그 몇 개잖아요. 하나씩 모조리 뒤져봐요. 그래도 못 찾겠으면 다른 거로 바꿔입으면 되죠!”

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시계를 보니 고작 아침 여섯 시였다.

‘강한서 이 인간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가정부를 시켜 전화를 걸게 하다니. 고작 그까짓 셔츠 때문에? 진짜 미친 것 같아!”

한주 강씨 가문.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전화를 끊으셨어요.”

강한서는 그녀를 흘긋 바라봤다. 그가 귀먹은 것도 아니니 이렇게 높은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었다.

“대표님, 이 파란색 셔츠를 입으시겠어요?”

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몇 초 동안 침묵하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 셔츠엔 어느 넥타이를 매야 하는지 물어봐봐요.”

가정부는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베이지색의 꽃무늬 넥타이를 착용하는 걸 몇 번 봐서 나도 다 기억하는데 매일 입고 다니는 대표님이 모르신다고?’

하지만 가정부는 직업상 주인의 말에 감히 더 캐묻지 못하고 마지못해 유현진에게 또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연결음 소리가 한참 들린 후에야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사모님, 셔츠는 찾았는데 어느 넥타이를 착용해야 하죠? 평소엔 사모님께서 맞춰주셔서 저는 잘 몰라요. 괜히 대표님께서 화내실까 봐 걱정이에요.”

유현진은 태양혈을 어루만졌다.

“베이지색 구름무늬, 왼쪽 서랍의 네 번째 층의 세 번째 칸에 있어요.”

전화기 너머로 가정부가 또다시 바스락거리더니 결국 나지막이 말했다.

“못 찾겠어요...”

“강한서 바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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