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석 달 뒤, 겨울로 접어든 서울. 채린은 한남동의 새 집에서 눈을 떴다. 서태우와 살던 펜트하우스가 아니었다. 방 크기도 가구도 자신이 골랐고, 현관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도 채린이 정했다.
아침마다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전날 회의가 길거나 재판 관련 연락을 받은 날이면 목이 다시 굳기도 했다. 채린은 정기 진료와 영양 상담을 이어갔고, 먹은 양보다 몸의 반응을 기록했다.
오늘 메모에는 짧게 적혔다.
[공복감 있음. 메스꺼움 2. 따뜻한 빵 가능.]
먹지 못한 날도 지우지 않았다. 예전에는 빈 접시가 곧 실패였지만, 이제 기록은 몸의 상태를 알아보는 자료였다. 담당 의사는 급하게 체중이나 양을 늘리기보다 정해진 시간에 안전한 음식을 시도하고 불안을 함께 다루자고 했다. 거실로 나오자 오픈 주방에서 토마토와 바질 향이 났다. 도혁이 흰 셔츠 소매를 걷은 채 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
2년 뒤 봄.서태우는 420억 원대 횡령·배임, 사문서위조, 납치 교사와 특수감금 혐의로 징역 18년을 확정받았다. 은닉 재산은 추징과 피해 배상 절차에 들어갔고, 태광홀딩스는 문제 사업을 정리한 뒤 채권단 관리 아래 분할 매각됐다. 범행에 가담한 임원들도 차례로 실형을 선고받았다.판결이 확정된 날, 기자들은 선우물산 본사 앞에 몰려들었다.“전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복수에 성공한 소감은 어떻습니까?”채린은 걸음을 멈추고 마이크를 바라봤다.“제 삶은 그 사람의 형량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판결은 피해를 확인하고 책임을 묻는 절차였을 뿐입니다.”그녀는 더 대답하지 않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유럽 운송망 개통 보고서와 서울 지점의 첫해 실적표가 기다리고 있었다.선우물산은 루미에르와의 본계약을 체결하고 초저온 물류망을 유럽까지 넓혔다. 채린은 대표이사로 회사를 이끌면서 라 루미에르 재단 공동 이사장을 맡았다. 부친은 치료를 마친 뒤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경영에는 개입하지 않았다.서울의 ‘라 타블 리브르’는 예약이 석 달 뒤까지 찼다. 모든 손님에게 같은 양을 강요하지 않고 작은 접시와 향을 낮춘 메뉴를 고를 수 있게 한 운영 방식이 입소문을 탔다. 메뉴판 아래에는 채린이 직접 쓴 문장이 인쇄돼 있었다.[한입도 한 끼입니다. 당신이 멈추는 곳에서 접시는 기다립니다.]그렇다고 모든 날이 매끈한 것은 아니었다. 재판 기사가 다시 나오는 날이면 채린의 속이 굳었고, 낯선 향이 과하면 수저를 내려놓기도 했다. 그럴 때 도혁은 이유를 캐묻거나 한입만 더 먹으라고 하지 않았다.“오늘은 여기까지입니까?”“네. 나중에 배고프면 다시
이듬해 봄, 서울의 작은 유리 온실에 흰 라일락 향이 번졌다.채린과 도혁은 호텔 연회장도, 수백 명의 하객도 선택하지 않았다. 온실 한쪽에는 가족과 가까운 동료 스무 명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두 사람이 직접 고른 긴 식탁 하나가 놓였다.채린은 풍성한 드레스 대신 움직이기 편한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었다. 부케는 들지 않았다. 두 손을 비워두고 싶었다. 도혁도 셰프 코트가 아닌 짙은 감청색 정장을 입었지만, 주방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평소와 같았다.“소스 온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그가 세 번째로 주방 쪽을 돌아보자 채린이 팔을 잡았다.“오늘 조리 책임자는 민재 셰프예요.”“확인만 하려는 겁니다.”“확인도 맡기는 연습을 해야죠.”도혁은 못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은 웃음을 참으며 그의 넥타이를 바로잡았다.결혼 서약은 짧았다. 주례도 화려한 축사도 없었다. 두 사람은 법적 절차와 재산 약정, 각자의 경영권을 이미 변호사와 함께 검토했다. 오늘 읽을 것은 계약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남긴 한 문장뿐이었다.도혁이 먼저 말했다.“당신이 멈추라고 할 때 멈추고, 묻기 전에 정답을 정하지 않겠습니다.”채린은 그의 눈을 보며 답했다.“당신의 사랑을 빚으로 여기지 않고, 내 마음과 몸의 상태를 숨기지 않겠습니다.”두 사람이 반지를 교환하자 조용한 박수가 온실을 채웠다. 채린의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혔지만 딸을 대신해 대답하거나 손을 잡아끌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식사가 시작되자 첫 번째 접시가 나왔다. 채린이 직접 개발한 구운 토마토와 현미 크로켓이었다. 겉은 얇고 바삭했으며 속에는 레몬 향
청혼으로부터 일주일 뒤, 오베르주 드 라 루미에르 이사회 회의실에는 축하 대신 서류 더미가 쌓였다.채린은 반지를 오른손에 옮겨 끼고 긴 테이블의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약혼 사실과 경영 권한이 한 문장 안에서 섞이지 않게 하려는 선택이었다.재단의 수석 이사 베르나르가 두꺼운 안경 너머로 채린을 살폈다.“백 이사님이 공동 이사장으로 선임된 과정에 강 셰프의 사적인 영향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회의실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도혁이 입을 열려는 순간 채린이 손을 들었다.“제 질문이니 제가 답하겠습니다.”도혁은 곧바로 말을 멈췄다. 채린은 준비해 온 파일을 화면에 띄웠다. 선우물산의 최근 3년간 온도 이탈률, 아시아 시장 예상 매출, 공급망 장애 발생 시 대체 운송 계획이 차례로 나타났다.“제 선임안은 약혼 전에 실무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습니다. 평가 자료와 회의록도 여기 있습니다. 그래도 이해상충이 우려된다면 공동 이사장의 보수와 계약 승인 절차를 외부 감사위원회에 공개하겠습니다.”베르나르가 자료를 넘겼다.“강 셰프와 관련된 안건에서는요?”“저와 강 셰프 모두 의결에서 빠지겠습니다. 대신 독립 이사 세 명과 직원 대표 한 명이 결정하도록 규정을 바꾸죠.”“스스로 권한을 줄이겠다는 뜻입니까?”“감시받지 않는 권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저는 이미 그런 권력이 한 회사를 어떻게 망치는지 봤습니다.”서태우의 이름을 꺼내지 않아도 의미는 분명했다. 채린은 다음 장을 열었다.“그리고 서울 지점은 단순한 브랜드 매장이 아니라 회복식 연구와 조리 교육을 함께 하는 공간으로 운영하겠습니다. 병원 치료를 대신한
도혁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반지 상자를 열어두고도 서두르지 않았다.센 강물 위로 번진 불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은빛 테두리 위에서 흔들렸다. 채린은 다이아몬드보다 먼저 도혁의 얼굴을 보았다. 늘 정확한 온도와 시간을 말하던 남자가 드물게 긴장한 표정이었다.“배고픈 날마다 한 접시를 비우라고 하지 않겠습니다.”도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한 숟갈이면 한 숟갈, 아무것도 못 먹는 날이면 그 옆에 있겠습니다. 제가 만든 맛이 틀리면 고치고, 채린 씨가 정한 일과 이름을 빼앗지 않겠습니다.”채린은 손가락으로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짚었다.[당신의 식탁을 대신 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같은 자리에 오래 앉고 싶습니다.]그 말이 반지보다 오래 눈에 들어왔다. 서태우의 청혼은 선택지가 없는 통보였다. 집안과 회사, 양가 어른의 뜻이 먼저였고 채린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도혁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거절할 시간까지 그녀에게 돌려주면서.“조건이 있어요.”“말씀하십시오.”“내가 힘들 때 혼자 결정하고 구해주려 들지 말 것. 먼저 말하고 같이 정할 것.”“지키겠습니다.”“내 접시 간은 내가 보고, 내 회사 일도 내가 결정해요. 결혼하고 나서도 백채린으로 일할 거예요.”도혁은 망설이지 않았다.“제가 원하는 사람도 백채린 씨입니다.”“그리고 당신도 모든 걸 혼자 짊어지지 마요. 완벽한 셰프도, 완벽한 구원자도 필요 없어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요.”도혁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는 남을 살피는 데 익숙했지만 제 상태를 내보이는 데는 서툰 사람이었다. 채린은 그 사실을 이제 알고 있었다.“그 조항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연습하는 동안 내가
프랑스 파리, 센 강변의 오스만 양식 석조 건물. 오베르주 드 라 루미에르의 아치형 문이 열리자 낮은 재즈 선율과 버터 향이 흘러나왔다. 창밖으로는 젖은 돌길과 강물 위에 번지는 에펠탑 불빛이 보였다.오늘 저녁 레스토랑은 한 테이블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다이닝 홀에는 과한 장식 대신 낮은 촛불과 흰 장미 몇 송이, 정갈하게 놓인 은식기가 전부였다. 직원들은 첫 코스만 준비한 뒤 퇴근했고, 주방에는 도혁 혼자 남았다. 채린은 빈 홀을 둘러보다 물었다.“이렇게 문 닫으면 손해 아닌가요?”“오늘 매출은 제가 책임집니다.”“공동 운영자가 되기도 전에 비용부터 확인하게 하네요.”“좋은 습관입니다.”채린은 이사회에서 계약 조항 세 군데를 고치고 온 참이었다. 자신의 결재권, 서울 근무 비중, 선우물산과 재단 사이의 이해상충 회피 규정까지 문서에 넣었다. 주방 문이 열리고 도혁이 흰 셰프 코트 차림으로 나왔다.“협상은 만족스러웠습니까, 백 이사님?”“아직 한 조항 남았어요. 셰프가 내 입맛을 제멋대로 해석하지 않을 것.”“그건 매번 시식으로 확인하겠습니다.”“그리고 ‘사모님’은 서울에 두고 왔어요.”“알고 있습니다, 채린 씨.”도혁은 고개를 숙였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남았다. 도혁이 의자를 빼주었다. 채린은 상석 대신 그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첫 접시는 브르타뉴산 랍스터였다. 샤프란은 버터에 오래 끓이지 않고 마지막에 향만 입혔고, 소스에는 레몬즙을 조금 더 넣었다.“서울에서 처음 소스를 드셨을 때 단맛 뒤에 레몬이 난다고 하셨죠.”
석 달 뒤, 겨울로 접어든 서울. 채린은 한남동의 새 집에서 눈을 떴다. 서태우와 살던 펜트하우스가 아니었다. 방 크기도 가구도 자신이 골랐고, 현관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도 채린이 정했다.아침마다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전날 회의가 길거나 재판 관련 연락을 받은 날이면 목이 다시 굳기도 했다. 채린은 정기 진료와 영양 상담을 이어갔고, 먹은 양보다 몸의 반응을 기록했다.오늘 메모에는 짧게 적혔다.[공복감 있음. 메스꺼움 2. 따뜻한 빵 가능.]먹지 못한 날도 지우지 않았다. 예전에는 빈 접시가 곧 실패였지만, 이제 기록은 몸의 상태를 알아보는 자료였다. 담당 의사는 급하게 체중이나 양을 늘리기보다 정해진 시간에 안전한 음식을 시도하고 불안을 함께 다루자고 했다. 거실로 나오자 오픈 주방에서 토마토와 바질 향이 났다. 도혁이 흰 셔츠 소매를 걷은 채 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상태는요?”“메스꺼움 2. 배는 조금 고파요.”“그럼 차가운 치즈는 마지막에 올리죠. 먼저 빵 냄새부터 확인하십시오.”채린은 갓 구운 사워도우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 고소한 향이 불편하지 않았다. 도혁이 리넨 앞치마를 들어 보였다.“오늘은 직접 하시겠습니까?”“네. 대신 손 덮어서 잡지 말고, 말로만 알려줘요.”“알겠습니다. 토마토는 5mm. 손가락은 칼날 안쪽으로.”도혁은 손을 뒤로 모으고 한 발 떨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라면 직접 칼을 빼앗아 정확한 각도를 보여줬을 남자가, 이제는 채린이 요청한 방식대로 기다렸다. 채린은 제 손으로 칼을 잡았다. 사각, 하고 토마토가 갈라지며 붉은 과즙이 도마 위에 번졌다. 두께가 들쭉날쭉하자 도혁이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