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며칠 후, 서초동 법조타운 중심가에 위치한 '법률사무소 정점(頂點)'.
이현은 자신의 이름을 건 독립 법률사무소의 대표 변호사로서 정식 개업을 마쳤다. 대형 로펌의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정점에 서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윤민우 역시 '정점'의 공동 파트너 변호사로 합류하여 이현의 곁을 지켰다.
이현이 정식 변호사로서 맡은 첫 번째 사건은 대한민국을 뒤흔들 대형 집단소송 사건이었다.
피고는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결탁하여 수천억 원대의 환경 오염 물질을 무단 방류하고, 이에 항의하는 소상공인과 노동자들을 조폭과 관변 단체를 동원해 폭력으로 입막음해 온 거대 기업 '한성그룹', 그리고 그들의 범죄를 은폐해 준 전직 검찰총장 출신의 전관 변호사 카르텔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늑한 서재의 불빛 아래서 부딪혔다. 더 이상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 적대자가 아니었다. 완벽한 신뢰와 깊은 감정으로 얽혀가는,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공조자들의 시선이었다.---다음 날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 제417호.대한민국 언론의 모든 취재진과 카메라가 법정 안팎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한성그룹 회장단, 그리고 거대 로펌 '태산'의 최고위 변호사들이 피고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재판장이 법복을 정돈하며 법정에 들어섰다."2026가합 109281 한성그룹 불법 폐수 방류 및 손해배상 청구 사건, 정식 첫 변론 진행하겠습니다. 원고 대리인 출석하셨습니까?"원고 대리인 석에서, 이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딥 네이비 수트를 입은 그녀의 곧은 자태와, 가슴 위에서 차갑게 빛나는 은색 변호사 뱃지. 그리고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청명하고 강렬한 눈빛."원고들 대리인, 변호사 강이현 출석했습니다."이현의 낮고 명확한 음성이 정숙한 대법정을 울렸다.피고 측 석에 앉아 있던 전직 검찰총장 출신의 대표 변호사가 오만한 표정으로 일어서며 반박했다."재판장님! 원고 측 대리인은 이제 막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신참 변호사입니다. 본 사건은 한성그룹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일부 언론과 소상공인들이 결탁한 무분별한 억측에 불과하며, 원고 측은 피고의 고의성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를 단 하나도 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거대 법조 카르텔의 오만한 도발에 법정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현의 입가에는 싸늘하고 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이현은 가방에서 정갈하게 정리된 두꺼운 디지털 포렌식 분석 보고서와 금융 거래 내역 서류를 꺼내 재판부를 향해 내밀었다."증거가 없다고 하셨습니까?"이현의 단호한 목소리가 법정의 소음을 단숨에 제압했다."입증 취지 제1호증 내지 제15호증. 피고 한성그룹이 지난 5년간 환경 오염 물질을 은밀히 방류하기 위해 설립했던 해외 유령 법인의 자금 세탁 내역과, 담
며칠 후, 서초동 법조타운 중심가에 위치한 '법률사무소 정점(頂點)'.이현은 자신의 이름을 건 독립 법률사무소의 대표 변호사로서 정식 개업을 마쳤다. 대형 로펌의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정점에 서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윤민우 역시 '정점'의 공동 파트너 변호사로 합류하여 이현의 곁을 지켰다.이현이 정식 변호사로서 맡은 첫 번째 사건은 대한민국을 뒤흔들 대형 집단소송 사건이었다.피고는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결탁하여 수천억 원대의 환경 오염 물질을 무단 방류하고, 이에 항의하는 소상공인과 노동자들을 조폭과 관변 단체를 동원해 폭력으로 입막음해 온 거대 기업 '한성그룹', 그리고 그들의 범죄를 은폐해 준 전직 검찰총장 출신의 전관 변호사 카르텔이었다.피해자만 수백 명에 달했으나, 상대가 정관계와 거대 법조 카르텔을 등지고 있었기에 그 어떤 대형 로펌도 수임을 꺼리던 지독한 사건이었다."이현아, 이 사건 상대 측 대리인단이 화려해."민우가 사건 기록 서류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엄중하게 말했다."전직 대법관 출신 변호사 두 명에, 전직 검찰총장, 그리고 국내 1위 로펌 '태산'의 대표 변호사까지 총 10명의 메머드급 변호인단이 꾸려졌어. 저들은 돈과 권력으로 재판부를 압박하고 증인을 회유하려 할 거야."이현은 딥 네이비 수트 상의의 카라를 곧게 정돈하며 가슴에 달린 은색 변호사 뱃지를 가만히 쓸어내렸다."상대가 전직 대법관이든 검찰총장이든 상관없어."
이현은 창밖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자신이 나아가야 할 정점의 길, 변호사로서 세상의 비리를 단죄해야 할 완벽한 무대. 그러나 그 무대 위에서 그녀가 마주해야 할 상대인 차도혁은, 더 이상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의 차가운 계약과 숨 막히는 냉전 속에서, 복수와 집착, 그리고 비틀린 진심이 얽혀가는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더욱 깊고 치열한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정점을 향한 첫 법정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계절의 옷을 여러 번 바꾸어 입었다.성북동 대저택의 권력 구도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가압류와 부도 위기에 몰렸던 강 회장 일가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다.지방으로 밀려난 강유라는 형사 처벌과 사회적 매장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다시는 이현의 삶에 발을 들이밀지 못했다. 이선희 역시 모든 기득권을 상실한 채 삼청동 저택과 미술관 재단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이현의 어머니 한서영은 완벽한 무죄 불기소 처분과 함께 정식 명의 이전을 마친 삼청동 집에서 평온하고 건강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서울 서초동 법원단지 건너편에 위치한 대한변호사협회 대강당.화려한 현수막 아래로 제15회 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이 크게 내걸려 있었다. 전국 유수의 로스쿨 출신 응시생 수천 명이 숨을 죽인 채 화면을 지목하고 있었다.&nbs
이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차도혁 씨."이현이 나지막하게 도혁을 불렀다.도혁이 문을 향해 걸어가려다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왜 그러나?""당신... 이사회 지분 15퍼센트를 담보로 내놓았어?"이현의 직선적인 물음에 도혁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도혁은 무심한 표정으로 외투를 챙기며 차갑게 응수했다."네가 신경 쓸 바 아니다.""신경 쓸 바가 아니라니!"이현이 이불을 거두고 침대에서 일어나 섰다. 아직 기력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아 몸이 살짝 휘청였으나, 그녀의 눈빛만큼은 서늘한 의문으로 빛나고 있었다."당신이 그 지분을 담보로 내놓으면, 차승태 전무 파벌이 몰락하더라도 이사회 내의 다른 보수파 이사들에게 약점을 잡히게 돼! 당신이 추진하려던 신사업 승인안도 위험해진다고! 그런데 왜 내 어머니 일에 당신의 가장 중요한 자산을 던진 거야?"이현의 추궁에 도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침실 안을 감싼 정적 속에서, 통유리창을 통해 비쳐드는 아침 햇살만이 두 사람 사이에 드리우고 있었다.도혁은 천천히 이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그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칠흑처럼 깊고 서글픈 진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네가 날 미워하고, 날 향해 칼을 세우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제발 내 눈앞에서 아프지 마라."도혁의 낮고 떨리는 음성이 어두운 침실 안을 조용히 울렸다.그것은 자신이 평생 믿어왔던 오만한 소유욕이나 통제욕이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을 경멸하고 거부하더라도, 그저 그 여인이 무사히 숨 쉬고 살아있기를 바라는... 사내의 지독하고도 서글픈 진심이었다.도혁은 밤이 새도록 침대 옆 자리를 지켰다. 눈 한 번 붙이지 않은 채, 이현의 호흡이 규칙적인지, 다시 열이 오르지는 않는지 살피며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만을 오롯이 바라보았다.---다음 날 아침 8시.창문 너머로 옅은 햇살이 들어오며 침실 안을 은은하게 비추기 시작했다.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를 짓누르던 지독한 두통과 열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팔에 꽂혀 있던 수액 바늘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몸은 가벼웠다.'내가... 어떻게 침대에 누워있지?'이현은 어젯밤 거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독한 고열 속에서 아득해지던 이성, 그리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을 때 자신을 부르던 도혁의 다급한 목소리.이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침대 옆 의자에 차도혁이 앉아 있었다.수트 상의를 벗은 블랙 셔츠 차림. 그의 짙은 머리칼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눈가에는 짙은 피로함이 서려
블랙 셔츠 차림에 오른손에는 여전히 흰 붕대를 감은 차도혁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이현을 발견한 도혁의 짙은 눈동자가 순간 거대하게 흔들렸다."강이현!"도혁은 본능적으로 이현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쓰러진 이현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손을 뻗던 도혁은, 순간 공중에서 손을 멈칫했다.지난밤 브라이덜 살롱에서 자신의 손길이 닿자마자 극심한 공황 발작을 일으키며 포크를 휘둘렀던 이현의 모습.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며 핏빛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비명이 도혁의 뇌리를 때린 것이다.도혁은 이현의 살결에 직접 손을 대는 대신, 옆에 놓인 자신의 수트 상의를 벗어 이현의 얇은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붕대를 감지 않은 왼손으로 이현의 흩어진 머리칼만을 가볍게 넘겨주었다.이현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이현아... 강이현, 정신 차려라."도혁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미세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자본과 권력을 쥐고 언제나 오만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던 사내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깊은 두려움과 당혹감이 묻어나는 어조였다.도혁은 곧바로 전용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펜트하우스로 와. 가장 유능한 여성 전문의와 함께 10분 내로 도착해라."도혁의 서늘한 명령에 전화기 너머의 주치의가 다급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도혁은 쓰러진 이현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