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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 곁에 선 다른 남자

Auteur: pinecone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1-05 13:35:09

부회장실 밖에서 이어지던 대화는 20분쯤 지나서야 끝났다.

박영숙과 유세아가 회의실로 이동하는 소리가 멀어지자, 휴게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이설은 소파에서 일어나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풀었다.

보석함에 넣어 가방 안쪽에 챙긴 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휴게실을 나섰다.

오후 3시. S그룹 본사 대회의실.

두마스 그룹과의 해외 인수합병 계약 체결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 측 회장과 주요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권제하는 최종 프랑스어 계약서에 서명하려던 참이었다.

특별 초청석에는 유세아가 앉아 있었다.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최종 계약서에는 유세아가 손을 쓴 흔적이 있었다.

그녀는 전날 두마스 측 통역사를 매수해 제12조 부속 합의서의 법률 용어와 자산 평가 기준을 바꿔 놓았다.

그대로 서명하면 S그룹은 두마스 계열 페이퍼컴퍼니에 300억 원을 추가로 지급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계약서의 1차 검토 책임자란에 한이설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계약이 체결되면 그녀가 그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을 상황이었다.

“권 부회장님, 이견이 없으시다면 서명하시지요.”

두마스 회장이 만년필을 건넸다.

권제하가 펜을 받아 서명란에 가져가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한이설이 들어섰다. 손에는 프랑스어 계약서와 검토 자료가 들려 있었다.

회의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유세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이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계약 체결식을 방해하겠다는 거예요? 제하 오빠, 경호팀 불러서 내보내세요!”

권제하는 펜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리고 이설을 바라봤다.

이설은 유세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두마스 회장을 향해 유창한 프랑스어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 서명하시기 전에 제12조 부속 합의서를 다시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기존에 합의한 내용과 최종본의 조건이 다릅니다. 특히 자산 평가액의 차액을 보전하는 조항이 일방적으로 수정됐고, 산정 기준도 30%나 높아졌습니다. 이대로 계약하면 추가 비용은 전부 S그룹이 부담하게 됩니다.”

두마스 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곁에 있던 법무총괄도 곧바로 계약서를 펼쳐 내용을 대조했다.

“이게 사실입니까?”

“잠시만 확인하겠습니다.”

법무총괄은 관련 조항을 몇 차례 살펴본 뒤 고개를 들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기존 합의안과 다른 문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반드시 수정해야 합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한이설이 서명 직전 발견한 오류는 300억 원에 달하는 손실로 이어질 수 있었다.

권제하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이설을 바라봤다. 평소와 달리 당당한 그녀의 모습이 낯설었다.

“한이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유세아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프랑스 측 통역사와 제가 확인한 계약서예요. 지금 누구를 모함하는 거예요?”

그제야 이설이 그녀를 바라봤다.

“유 이사님, 왜 그렇게 서두르세요? 최종 검토까지 끝난 계약서가 누군가에 의해 바뀌었다면, 그 과정부터 확인하면 될 일 아닌가요?”

“그게 무슨…….”

“설마 수정한 통역사가 유 이사님과 가까운 사이라도 되는 건가요?”

유세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두마스 회장은 곧바로 내부 통역 인력과 계약서 수정 경위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유세아는 더는 반박하지 못한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후 6시. 서울성모병원.

계약 체결식이 끝난 뒤, 이설은 병원을 찾았다. 긴장과 피로가 쌓인 탓에 위궤양 증상이 다시 심해진 데다, 오전에 다친 손등의 상처도 제대로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진료실에서 그녀의 손을 살피던 윤재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전에 치료받았다면서? 처치가 제대로 안 됐잖아. 상처도 다시 벌어졌고.”

그는 상처를 소독한 뒤 새 거즈를 감아 주었다.

윤재이는 고인이 된 이설의 어머니가 아끼던 제자였고, 이설과 함께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에서 공부한 선배이기도 했다. 지난 3년 동안 한진국이 입원한 구치소 지정 병원을 몰래 살피고 도와준 사람도 그였다.

“오후 계약식에서 있었던 일도 들었어. 위도 안 좋은데 손까지 다치고. 이설아, 너무 무리하지 마.”

“괜찮아요. 이 정도는 버틸 만해요.”

“괜찮기는. 얼굴이 이렇게 창백한데.”

윤재이는 한숨을 내쉬며 따뜻한 물을 건넸다.

“유진이한테 들었어. 권제하와 맺은 계약도 이제 반년 남았다며? 취리히에 있는 은사님 연구소와 머물 곳은 내가 미리 알아봐 뒀어. 남은 반년만 잘 버텨. 이혼 절차 끝나고 서울을 떠날 때 내가 직접 스위스까지 데려다줄게.”

이설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고마워요, 재이 선배.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선배도 여기서 맡고 있는 연구가 있잖아요. 제 일 때문에 선배까지 시간을 낼 필요는 없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유진이와도 약속했어요. 반년 뒤에 모든 절차가 끝나면 같이 취리히에 가 주기로 했거든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지난 3년 동안 아버지를 돌봐 주신 것도, 제 건강 상태를 살펴 주신 것도 전부 선배 덕분이에요.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윤재이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7년 전부터 이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쉽게 기대지 않았고,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

“그래. 네 뜻대로 하자.”

윤재이는 더 권하지 않고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건넸다.

“위장약도 처방해 뒀어. 잊지 말고 챙겨 먹어.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줄게.”

“고마워요, 선배.”

이설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순간 몸이 휘청했다. 윤재이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의 팔과 허리를 받쳤다.

“천천히 일어나.”

두 사람이 진료실을 나와 VIP 복도로 들어선 순간, 앞쪽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병원장과 병원 이사들이 한 남자를 둘러싸고 걸어 나왔다. 유씨 메디컬 관계자들과 새로 투자한 임상센터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권제하였다.

그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걸음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 한이설이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재킷을 걸친 그녀의 곁에는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한 손은 이설의 허리를 받치고 있었다.

권제하의 시선이 그 손에 꽂혔다.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남자의 손을 떼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유세아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고, 뒤에는 병원장과 외부 이사들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비밀 결혼은 아직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권제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한이설과 그녀의 허리를 감싼 남자를 차갑게 노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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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표를 내고 도망친 아내가 임신했다니   11. 가족이라는 이름의 협박

    다음 날 오전 8시.전날 밤 권제하가 결혼 3년 차 아내를 공개한 소식은 주요 언론을 통해 빠르게 퍼졌다.‘S그룹 권제하 부회장, 창립 50주년 포럼서 아내 공개! 200억 원짜리 핑크 다이아몬드의 주인은?’기사에는 무대 위에서 한이설의 손을 잡은 권제하와 그녀의 약지에 끼워진 10캐럿 핑크 다이아몬드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같은 시각, 권제하가 보낸 경호원들이 한이설의 짐을 청담동 펜트하우스로 옮겼다. 이설은 간단히 짐을 정리한 뒤 전용 차량을 타고 S그룹 본사로 향했다.그런데 본사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소란이 눈에 들어왔다.수십 명의 기자와 파파라치가 로비 앞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큼지막한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재벌가 사모님 한이설, 배은망덕한 딸! 200억 다이아몬드를 끼고 호의호식하면서 중병에 걸린 아버지와 동생은 외면!]현수막 아래에는 금붙이를 잔뜩 걸친 중년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고 있었다.“기자 양반들, 제발 우리 집안 사정 좀 들어 보세요! 남편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병원에 누워 있는데, 딸이라는 애는 재벌가에 시집가서 3년 동안 사모님 노릇만 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는지 안중에도 없고, 친정에는 돈 한 푼 보내지 않았다니까요!”한이설의 계모 김미란이었다.그 옆에는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금목걸이를 걸친 스물네 살 청년이 앉아 있었다. 김미란이 데리고 온 아들 한준우였다.준우는 전날 뉴스에서 이설의 손에 끼워진 핑크 다이아몬드를 본 뒤 밤새 어머니와 일을 꾸몄다. 불법 도박장에서 빌린 사채 8억 원을 갚을 길이 막막하던 참이었다.그에게 누나의 200억 원짜리 반지는 그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없었다.“왔다! 한이설 나왔다!”준우가 이설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짓이겨 끄고 출입 게이트 앞을 가로막았다.“어이쿠, 우리 누나 오셨네! 재벌가 사모님 되더니 이제야 얼굴을 비추시는구만?”김미란도 서둘러 다가와 이설의 바짓단을 붙잡으려 했다.“이설아! 네 아버지가 병원에서

  • 사표를 내고 도망친 아내가 임신했다니   10. 이혼은 네 마음대로 안 돼

    새벽 1시 30분.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권제하는 검은 셔츠 차림으로 거실에 들어섰다.밤늦은 시간인데도 한이설은 잠들지 않고 소파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제하는 곧장 소파 앞으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한이설, 설명해 봐. 오늘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내 아내라고 공식 발표했는데, 돌아서자마자 반지를 빼놓고 호텔을 나와? 무슨 뜻이야?”이설은 반지를 한 번 내려다본 뒤, 미리 준비해 둔 서류 두 묶음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한쪽은 수석 비서 업무 인수인계 서류, 다른 한쪽은 3년 전 선대 회장 입회하에 체결한 비밀 결혼 및 직무 수행 계약서였다.“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해진 절차를 밟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계약도 이제 반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유럽 의료 인수합병에 필요한 연구소 기술 사용권도 확보했고, 오늘 포럼에서 부회장님과 부부 행세까지 했으니 외부에 보여 줄 건 다 보여 줬다고 생각합니다.”이설의 시선이 반지에 머물렀다.“더는 이런 보여 주기식 행동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반지도 원래 제 것이 아니니 돌려드리는 게 맞고요.”권제하는 눈앞의 계약서를 내려다봤다.그녀가 오늘 밤 전략실 앞에서 자신과 당숙의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해 주었다고 생각했다.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식 석상에서 아내로 인정했고, 권씨 가문의 상징인 가보까지 손에 끼워 주었다.그런데 이설은 아무런 감동도 없는 얼굴로 계약 종료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더는 필요 없다고?”제하가 짧게 웃더니 몸을 숙였다. 그의 손이 이설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한이설, 똑똑히 들어. 이 결혼이 언제 시작되고 끝날지는 처음부터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어. 내 허락 없이는 반년이 지나든 3년이 지나든 이혼 못 해.”턱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설은 그의

  • 사표를 내고 도망친 아내가 임신했다니   9. 처음으로 내 전화를 끊은 여자

    새벽 12시 30분.권제하는 당숙 권태성을 돌려보내고 전략실을 나섰다.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대화에 미간을 누르며 스위트룸으로 향했다.복도 한쪽 장식대에는 식어 버린 홍삼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객실 문을 열자 어둠과 적막이 그를 맞았다.평소라면 이설이 늦게 돌아오는 그를 위해 작은 조명 하나쯤은 켜 두었을 시간이었다.게다가 오늘은 달랐다.그는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수많은 사람 앞에 이설을 자신의 아내라고 선언했다. 권씨 가문의 안주인에게만 허락된 200억 원짜리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도 직접 끼워 주었다.그녀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한이설?”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욕실과 드레스룸까지 확인했지만 이설의 흔적은 없었다. 오늘 입었던 드레스와 주얼리는 그대로 놓여 있었다.제하는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그 순간,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열린 검은색 벨벳 케이스 안에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가 놓여 있었다.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였다.제하는 반지를 집어 들었다.백금 밴드 안쪽과 다이아몬드 받침대에 선명한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그는 낮에 이설의 오른손등에 드레싱이 감겨 있던 걸 떠올렸다. 반지를 빼다가 상처가 다시 벌어진 모양이었다.반지를 빼는 데 그만큼 애를 썼다는 뜻이었다.제하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지난 3년간 이설은 한 번도 그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회사에서도 차갑게 굴더니, 사람들 앞에서 아내로 인정받고도 반지를 빼놓고 떠났다.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이설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통화가 연결됐다.“한이설, 너 지금 어디야?”제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누가 마음대로 호텔을 나가도 된다고 했어? 반지는 왜 빼놓은 거야? 무슨 뜻이지?”잠시 침묵이 흘렀다.이내 이설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호텔 방이 답답해서 몸이 좀 안 좋았어요. 먼저 한강 아파트로 돌아와

  • 사표를 내고 도망친 아내가 임신했다니   8. 계약이 끝나면, 남이었다

    순간, 연회장이 술렁였다.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고, 하객들 사이에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이설은 그 자리에 선 채 제하를 바라봤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와 자신을 잡은 그의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오랫동안 자신을 외면하고, 다른 여자를 위해 자신의 노력을 빼앗고, 상처를 입어도 모른 척했던 남자.그런 그가 지금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아내라고 선언했다.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만찬이 끝나기도 전에 서울의 경제계와 사교계는 발칵 뒤집혔다.‘S그룹 권제하 부회장,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결혼 3년 차 아내 최초 공개! 200억 원 상당의 핑크 다이아몬드로 아내의 정체 밝혀!’기사는 순식간에 포털 사이트와 SNS를 장악했다.박영숙 이사장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그룹 원로들까지 그날 밤 권제하에게 해명을 요구했다.만찬이 끝나자 제하는 이설을 데리고 호텔 최고층 스위트룸으로 향했다.방에 들어선 그는 보타이를 풀며 이설을 돌아봤다.“오늘 오래 서 있었잖아. 먼저 씻고 쉬어. 아까 술도 두 잔이나 마셨으니 속이 불편할 거야. 북엇국도 준비해 뒀어.”“네.”“나는 복도 끝 전략실에서 당숙 어른들과 인수합병 문제를 논의하고 올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이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왼손 약지의 핑크 다이아몬드를 내려다봤다.밤 11시 30분쯤, 직원이 북엇국과 따뜻한 홍삼차를 가져왔다. 홍삼차는 제하가 마실 것이었다.이설은 잠시 망설이다 쟁반을 들었다.그에게 직접 전해 주고 싶었다. 오늘 무대에서 자신을 아내라고 선언한 이유를, 짧게라도 듣고 싶었다.그녀는 복도 끝 전략실로 향했다.문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좁은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노크하려던 순간,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제하야, 솔직히 말해 봐라. 오늘 그 귀한 핑크 다이아몬드까지 한이설 손에 끼워 준 게 설마 진심이냐? 한진국 그 범죄자의 딸에게 마음이라도

  • 사표를 내고 도망친 아내가 임신했다니   7. 200억 핑크 다이아몬드의 주인

    다음 날 오전, 한이설의 아파트.거실 한쪽에는 전날 부티크에서 가져온 샴페인 골드 드레스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이설은 포장조차 뜯지 않았다.오전 10시, 초인종이 울렸다.권제하의 수석 보좌관이 스타일리스트 두 명과 함께 찾아왔다. 손에는 드레스가 든 상자와 흉터 연고가 들려 있었다.“한 비서님, 부회장님께서 어젯밤 유럽 계좌 문제를 처리하신 뒤 파리에서 급히 공수하신 드레스입니다. 오늘 저녁 포럼 만찬에 입으라고 하셨습니다.”이설은 상자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안으로 들였다.***저녁 6시.이설은 은빛 실크 드레스를 입고 아파트를 나섰다.오른손등의 상처에는 피부색과 비슷한 의료용 드레싱이 붙어 있었다.아파트 앞에는 마이바흐가 대기하고 있었다.뒷좌석에 오르자 권제하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이설에게 잠시 머물렀다.차가 호텔을 향해 출발한 뒤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먼저 입을 연 것은 제하였다.“어제는 미안해.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겨서 급하게 나가느라 계산을 맡기는 걸 깜빡했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어제 널 도와준 남자 말이야. 심태주라고, 월가에서 돌아온 놈이야. 수단이 좋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 가까이하지 마. 가능하면 접촉도 피하고.”어젯밤 보좌관에게 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뒤였다.심태주가 이설의 드레스까지 사 줬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이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예의 바른 대답이었지만, 그뿐이었다.제하는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감싸 쥐었다.이설은 손을 빼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호텔에 도착했다.***밤 8시.신라호텔 대연회장은 창립 50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한 재계 인사와 언론사 기자들로 붐볐다.박영숙은 유세아와 함께 원로 이사진에게 둘러싸여 있었다.제하가 입장하자 그녀는 곧장 세아의 팔을 끼고 다가왔다.“제하야, 이제 왔구나. 아까

  • 사표를 내고 도망친 아내가 임신했다니   6. 그 남자의 위험한 제안

    서울성모병원 VIP 복도.권제하의 시선은 한이설의 허리에 얹힌 윤재이의 손에 고정돼 있었다. 표정은 싸늘했다.이설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윤재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선생님, 감사합니다. 약도 받았으니 먼저 가 볼게요.”그녀는 곧장 제하와 일행에게 사무적으로 인사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30분 뒤, 서울성모병원 지하 VIP 주차장.수석 보좌관의 연락을 받고 나온 이설은 검은색 마이바흐 뒷좌석에 올라탔다.차 안에는 짙은 시더우드 향이 감돌았다. 권제하는 재킷 단추를 풀고 좌석에 기대어 있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윤재이가 이설의 허리를 감싸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 역시 유세아와 함께 있었으니, 그녀에게 무슨 관계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손은 어떻게 됐어?”“소독하고 다시 붕대를 감았습니다. 약만 제때 바르면 된다고 했어요.”이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제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청담동 부티크로 가.”“부회장님, 지금은 퇴근 시간이…….”“내일 저녁 그룹 창립 50주년 기념 아시아·태평양 의료 전략 포럼 만찬이 있어. 수석 비서인 너도 참석해야 해.”그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드레스부터 고르자.”***20분 뒤, 두 사람은 청담동의 한 고급 부티크에 도착했다.2층 VIP 살롱에는 뜻밖에도 유세아가 먼저 와 있었다. 새하얀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그녀 주변으로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매장 점장인 박 씨는 유씨 집안과 친척 관계였다. 제하를 발견하자 곧장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권 부회장님, 오셨습니까? 세아 아가씨도 내일 만찬에 입으실 드레스를 고르고 계셨습니다.”“제하 오빠, 왔어요?”세아가 반갑게 다가왔다. 그러다 이설을 발견하고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이설 언니도 드레스 고르러 왔어요?”제하는 대꾸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매장에 진열된 드레스들을 가리켰다.“저쪽에 있는 드레스 전부 한 비서에게 가져다줘. 입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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