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화의 숨결이 고르게 변한 뒤에도 무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침상 곁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조금 전의 입맞춤이 아직도 선명했다.그녀가 먼저 허락했던 순간.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던 눈.그리고 입술이 닿은 뒤 부끄러워하던 얼굴.무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수백 년이었다.그녀를 잃고, 다시 찾고, 또 잃었다.어떤 생에서는 이름조차 듣지 못했고, 어떤 생에서는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았다. 자신이 산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저주했던 밤도 셀 수 없이 많았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그녀가 살아 있었다.자신의 이름을 불렀다.그리고 스스로 입맞춤을 허락했다.무현은 손을 들어 입술을 가볍게 만졌다.그 순간.왼쪽 손목에 오래된 상처가 벌어졌다.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무현의 표정이 굳었다.그는 소매를 걷었다.손목 안쪽에는 검은 문양이 떠오르고 있었다.연화의 손목에 새겨진 붉은 연꽃과는 정반대의 문양이었다.검은 가시가 손목을 감싸는 형태.무현은 이를 악물었다.“……벌써 시작되었군.”그때 창밖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오랜만이구나, 무현.』무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창밖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빗방울이 닿은 창호지 위로 검은 글자가 하나씩 떠오르고 있었다.『이번에도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느냐.』무현은 손을 들어 글자를 지웠다.그러나 마지막 문장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그 아이가 너를 사랑하는 순간, 다시 죽을 것이다.』무현의 손이 멈췄다.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연화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입가에는 아주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무현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그리고 손목에서 흐르는 피를 옷소매로 닦아 냈다.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이번에는 다르다.”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네가 무슨 짓을 하든.”무현은 잠든 연화를 바라보았다.“그 아이를 다시는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그때였다.연화의 손목
연화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옷깃을 내려다보았다.손이 떨리고 있었다.“꿈을 꿨어요.”“…….”“산신님이 나왔어요.”무현의 얼굴이 굳었다.“어떤 꿈이었느냐?”“붉은 꽃이 피어 있었고…… 저는 혼례복을 입고 있었어요.”연화는 숨을 골랐다.“그리고 누군가 저를…….”말이 끊겼다.가슴이 다시 아팠다.무현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하지만…….”“연화야.”그가 낮게 불렀다.“지금은 쉬어야 한다.”연화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녀는 무현의 옷깃을 조금 더 단단히 붙잡았다.“저 이제 알고 싶어요.”무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제가 누구였는지.”“…….”“그리고 산신님이 왜 저를 그렇게 기다리셨는지.”연화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전부 알고 싶어요.”무현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다가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그의 손끝이 연화의 뺨 가까이에서 멈췄다.“만져도 되겠느냐?”연화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무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따뜻했다.손끝이 떨리고 있었다.연화는 그제야 깨달았다.이 남자도 두려워하고 있었다.자신이 기억을 되찾는 것을.그리고 기억을 되찾은 자신이 그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을.연화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손등을 덮었다.무현의 눈빛이 깊어졌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연화는 그의 숨결이 자신의 이마에 닿는 것을 느꼈다. 무현의 시선이 잠시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가 곧바로 눈으로 돌아왔다.그 짧은 순간을 연화는 놓치지 않았다.가슴이 빠르게 뛰었다.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연화는 자신이 이 남자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것이 전생의 흔적 때문인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조금 전까지 무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산신님.”연화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그래.”“저한테…….”그녀는 잠시 망설
한동안 빗소리만 들렸다.연화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잠이 오지 않았다.눈을 감으면 아까 보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고, 눈을 뜨면 창가에 앉은 무현의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결국 몸을 돌렸다.“산신님.”“왜 그러느냐.”“안 주무세요?”“나는 괜찮다.”“밤새 그렇게 앉아 계시려고요?”“네가 잠들 때까지는.”연화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제가 안 자면요?”무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아침까지 있겠지.”“내일도 안 자면요?”“그다음 날까지.”“계속 안 자면요?”무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네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마.”연화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산신님은 참 이상하세요.”“그런 말을 자주 듣는구나.”“제가 많이 했으니까요.”무현이 웃었다.그 웃음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연화는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산신님.”“그래.”“전생의 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무현의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연화는 그가 대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고집이 셌다.”“……네?”“남의 말을 좀처럼 듣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렸지.”연화는 눈을 깜빡였다.“지금 저랑 똑같네요?”“그렇구나.”“또요?”무현은 잠시 생각했다.“겁이 없었다.”“정말요?”“아니. 정확히는 겁이 나도 도망치지 않았다.”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저는 오늘 도망쳤는데요?”무현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왜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아주 먼 기억을 떠올리는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때의 너는 도망쳐야 할 순간에도 끝내 돌아섰으니까.”연화는 더 묻지 못했다.그의 목소리에 담긴 슬픔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잠시 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많이 사랑하셨어요?”무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누구를?”“전생의 저요.”긴 침묵이 흘렀다.연화는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무현이
연화는 그제야 이불을 조금 내렸다. “먼저 제 손목부터요.” 무현의 시선이 그녀의 왼쪽 손목으로 향했다. “그 문양은 연화인이다.” “연화인?” “오래전 네 영혼에 새겨진 인장이다.” 연화는 눈을 깜빡였다. “제 영혼에요?” “그래.” “누가 새겼는데요?” 무현은 잠시 침묵했다. 연화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말씀 안 하시려고요?” “네가 새겼다.” 연화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요?” “그렇다.” “저는 그런 적 없는데요.” “지금의 네가 아니라 오래전의 네가.” 방 안이 조용해졌다. 연화는 무현의 말을 천천히 되짚었다. 오래전의 자신. 그 말은 마치 자신이 지금의 삶을 살기 전에도 존재했다는 뜻처럼 들렸다. “혹시…… 전생이라는 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이제는 전생까지 나왔다. 평범한 약초꾼의 딸로 살던 자신에게 하루아침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 저는 전생에 뭐였는데요?” 무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 “설마 저도 신이었어요?” “그것은 아니다.” “선녀요?” “아니다.” “그럼 요괴?” 무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인간이었다.” 연화는 조금 실망했다. “에이, 그냥 인간이었어요?” “그냥 인간이라.” 무현은 그녀의 말을 조용히 되풀이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 “내게는 그 어떤 신보다 귀한 인간이었다.”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닿았다. 무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주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연화는 그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처음 보는 남자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럼…….” 연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도 제가 산신님의 신부였어요?” 무현의 표정이 굳었다. 한참 뒤 그가
세 번째 목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무현이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산신궁을 둘러싼 금빛 결계가 거대한 파도처럼 일렁였고,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비명으로 변했다. 동시에 궁의 처마마다 매달린 금종이 일제히 울렸다. 맑고 청아해야 할 종소리는 어딘가 절박했고, 연화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누군가의 손에 움켜쥐어진 것처럼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윽……!”연화는 반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처음에는 단순히 놀란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왼쪽 손목에서 시작된 열기가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져 올라왔다. 피부 아래로 뜨거운 물이 흐르는 듯한 감각이었다. 숨을 들이마시려 해도 가슴이 제대로 부풀지 않았고, 눈앞에 펼쳐진 복도의 풍경이 물에 젖은 그림처럼 흐려졌다.“마님!”백령이 다급하게 달려왔다.연화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목에 새겨진 붉은 연꽃 문양이 심장 박동에 맞춰 깜빡이고 있었다. 꽃잎이 하나씩 피어나는 듯한 기묘한 빛이었다.그때 무현이 돌아섰다.“연화.”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연화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산신…… 님.”무현은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곧장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이 연화의 손목과 창백해진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어디가 아프냐?”“손목이…… 뜨거워요.”“다른 곳은?”“가슴도 조금…….”연화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이 기울었다.무현이 그녀를 받아 안았다.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는 순간, 연화는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바로 가까이에서 솔잎 향이 났다. 낮에 맡았던 것과 같은 향기였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 안에 서늘한 비 냄새까지 섞여 있었다.무현의 얼굴이 굳었다.“백령. 동쪽 결계를 세 겹 더 둘러라. 그리고 오늘 밤은 누구도 연화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해라.”“예, 주
연화는 한 걸음 다가갔다. “너 아까부터 이상한 말을 자꾸 해.” “…….” “나를 처음 봤다면서 왜 돌아왔다고 했어? 그리고 이번에도라니, 그건 무슨 뜻이야?” 백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화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이곳에는 자신과 관련된 비밀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비밀이. “백령아.” 연화가 조용히 불렀다. “너 나를 알아?” 백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나를 예전에도 본 적 있어?” 백령의 눈가가 붉어졌다. “마님…….” 그때였다. 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렸다. 댕—. 백령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안 됩니다.” 연화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지금은 나가시면 안 됩니다.” “왜?” 백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늘 밤은…….” 그 순간 연화의 손목이 뜨거워졌다. “아!” 그녀는 반사적으로 소매를 걷었다. 꽃잎 모양의 붉은 반점이 다시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선명했다. 금빛 선이 피부 위로 퍼지더니 작은 연꽃 문양을 이루었다. 그리고 눈앞의 문이 다시 움직였다. 끼이이익.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너머에는 산 아래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연화는 숨을 삼켰다. ‘열렸어.’ 정말 열렸다. 이제 저 길로 달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백령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그녀의 손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소년이 중얼거렸다. “마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연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이야?” 백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산신궁의 문은…….” 그때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백령.” 연화는 돌아보았다. 무현이었다. 그는 언제 나타났는지 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