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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새로 부임한 현령이 하필 내 전남편이라니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 오는 운금골목, 아침 이슬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서린아! 어서 서우 비단신 좀 신겨! 오늘 새 현령 나리께서 상가를 순시하러 오신다잖아. 우리 비단 가게가 늦으면 안 돼!"
이수연은 보따리를 든 채 처마 밑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안 갈래! 나 오늘은 서당 절대 안 가!"
침상 위의 작은 떡덩이가 배를 끌어안고 데굴데굴 굴렀다. 꼭 손에 잡히지 않는 미꾸라지 같았다.
윤서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쪼그려 앉아 아들의 말랑한 볼을 꼭 꼬집었다.
"정말 안 갈 거야?"
사내아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 오후에 줄 꿀 절임 살구씨는……."
"갈래! 갈래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꼬마는 얌전히 두 발을 쑥 내밀었다.
이수연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아주 그냥 오냐오냐 키워라, 키워."
윤서린은 웃으며 아들에게 버선과 신을 신겨 주고는, 번쩍 안아 올려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어. 엄마가 일 끝나면 바로 데리러 갈게."
서당으로 가는 작은 마차에 아들을 태우기 전, 윤서린은 무심코 작은 망토를 매만져 주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내아이의 허리춤에 달린 작은 주머니 틈새에, 누렇게 빛바랜 초상화 한 장이 몰래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림 속 남자는 눈매가 차갑고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붓질 하나하나가 날이 서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윤서린이 지난 3년간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들을 보내고 나서 윤서린은 마차에 올라 운금 상가로 향했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이수연이 헐레벌떡 휘장을 걷고 비집고 들어왔다.
"서린아! 겨우 탔네! 우리 거리에 큰일 났어! 옆 가게 대행수가 도망가서 강남에서 팔자 좋게 살고 있다잖아. 그 자리에 조정에서 철권통치로 유명한 독한 사람을 보내서 우리 현을 맡겼대. 그것도 칠품 현령으로 강등까지 시켜서! 신임 관리가 부임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우리 같은 상인들 뒷조사랑 납세 장부 조사래!"
윤서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치맛자락을 정돈했다.
"가 보자. 돌아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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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 무렵, 현 관아의 순시 행렬이 운금 상가 어귀에 멈춰 섰다.
검은 말 네 필이 끄는 커다란 이층 지붕 마차가 소리 없이 멈추자, 숨이 턱 막힐 만큼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았다.
시종이 재빨리 휘장을 걷었다. 검은 가죽 장화를 신은 곧고 긴 다리가 내려서고, 도포 자락이 바람에 살짝 일렁였다.
이어서 훤칠하고 늠름한 그림자가 허리를 숙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짙은 금빛으로 단을 두른 먹빛 칠품 관복 차림이었다. 어깨는 넓고 허리는 가늘었으며, 전장에서 단련된 듯한 서늘한 기운과 금욕적인 분위기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타고난 상위자의 위압감에 주변 소상인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슬금슬금 물러섰다.
관아의 총포교가 허리를 굽히며 아첨하듯 아뢰었다.
"서 사또, 소관이 상인들의 장부를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서이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먹물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인파를 차갑게 훑고 지나갔다.
한 명이 비는군.
그는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반 각 뒤, 상인회 뒤쪽 대청에서 정례 회합을 연다. 불참하는 자는 그 즉시 장사 허가패를 거두겠다."
얼음장 같은 한마디를 던져 놓고, 그는 곧장 회랑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인들은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흩어졌고, 앞다투어 뒤쪽 대청으로 몰려들었다.
대청의 묵직한 나무문이 막 닫히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윤서린이 바람처럼 뛰어 들어왔다. 그런데 바닥에 끌리던 치맛자락을 그만 밟고 말았다.
"앗!"
균형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맨 앞에 서 있던 사람의 품으로 고꾸라졌다.
서늘한 소나무 향이 코끝을 스쳤다. 쇠처럼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힌 탓에 코끝이 시큰했다.
커다란 손 하나가 능숙하면서도 거침없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아 붙들었다.
낮고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나직하게 울렸다.
"삼 년 만인데, 윤 행수의 품에 안기는 버릇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군."
뼛속까지 익숙한 이 목소리.
윤서린은 퍼뜩 고개를 들었고, 그대로 차가운 연못처럼 깊은 두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 질문은 아무 예고도 없이 날아왔다.윤서린은 멍해졌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강 총관은 연봉이 천 냥인 데다 인물도 훤칠한데, 어떤 여자가 안 좋아하겠어요?"농담처럼 들렸지만, 도발의 기색은 분명했다.서이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본관이 꼼꼼히 비교해 봤다."그가 몹시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그자는 본관보다 키도 작고, 인물도 못하고, 권세는 더더욱 못하다."윤서린: “……”이 사람은 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걸까?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물론 당신처럼 억지를 부리지도 않고요.얼굴에는 오히려 더 환한 웃음을 지었다."그야 당연하지요. 서 사또는 지금 강남에서 권세가 으뜸인 명문 귀공자시니, 강 총관이 어찌 감히 견줄 수 있겠어요."더없이 가식적인 아첨이었다.서이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윤 수행원, 눈을 본관 쪽으로 돌려 보는 게 어떠냐."윤서린은 멈칫하더니 이내 실소했다."사또도 참, 소녀가 어찌 감히요.""해 보지도 않고 감히 못 하는지 어찌 아느냐?"서이현이 몸을 일으켜 한
서 사또가 왜 또 내려왔지?설마 천하의 관리란 관리는 다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게 취미인가?"예, 서 사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소소가가 황급히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다방으로 달려갔다.서이현이 의미심장하게 윤서린을 훑어보았다.윤서린은 영문도 모른 채 마주 노려보았다.뭘 봐?또 시비 걸 거리를 찾는 거야?"본관이 듣기로, 이달 말에 상인회가 나들이를 간다던데?"서이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예, 서 사또."윤서린이 사실대로 대답했다."본관도 간다."세 시녀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현령 나리가 직접 상인회 나들이에 간다고?그러면 누가 마음 편히 놀 수 있겠는가. 다들 메추라기처럼 잔뜩 움츠러들 텐데.서이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본관의 명을 전해라. 급한 공무가 없는 한, 누구도 휴가를 낼 수 없다."말을 마친 그의 입꼬리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그는 걸음을 옮겨 위층으로 올라갔다.얼마 뒤, 소소가가 우려낸 차를 들고 서재에 들어갔다.서이현은 찻잔을 받아 들고도 곧바로 마시지 않았다.
"그러니까요!"이수연의 두 눈이 반짝였다."근데 우리 상인회 제일가는 미남 자리도 주인이 바뀌었어. 다들 입을 모아 서 사또를 뽑았거든. 강 총관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이등으로 밀려났지."강사는 한때 상인회에서 이름난 고고한 꽃이었고, 지금은 상인회 제이사를 맡아 연봉이 천 냥에 이르렀다. 수많은 여자 관졸들이 몰래 흠모하는 상대였다.외모가 수려하고 일 처리도 수완이 좋았다.그가 눈여겨본 계약은 성사시키지 못한 적이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점심엔 우리 식당 위층에 가서 먹자. 우리 강 총관이 요즘 더 잘생겨졌는지 구경도 하고."이수연이 기대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상인회 식당은 삼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일 층은 관원과 각 부서 책임자가 쓰고, 이 층은 일반 관리, 삼 층은 평범한 일꾼들이 식사했다.근접 수행원인 그녀들은 원래 일 층에 갈 수 있었지만, 평소에는 마음 편한 이 층에 머무르는 걸 더 좋아했다."나도 찬성."진열도 옆에서 웃으며 맞장구쳤다."밥은 못 먹어도 멀리서 두어 번 보면 눈요기는 되니까."여기까지 말하던 이수연
이튿날.현아 뒤뜰, 서재 안.서이현은 조각이 새겨진 큰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잘생긴 얼굴을 굳힌 채 온몸에서 소름 끼치는 한기를 뿜고 있었다.곁에서 시중을 들던 관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자칫 사또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그 자신도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툭하면 말대꾸를 하던 그 작은 독초가 오늘은 출근하지 않았다. 서재가 고요해지자 오히려 온몸이 불편했다.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그 여자가 어젯밤 그렇게 취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좀 깨어났는지도 모르겠다.시중드는 몸종 소소가가 문서 책자를 받쳐 들고 조마조마하게 오늘 상인회 일정을 보고했다."진시 말, 과영 상단의 성 행수가 수로 계약 건으로 찾아오십니다…….""오시 이각, 상인회 쪽은……."그녀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서이현이 불쑥 눈을 들어 차갑게 말을 끊었다."며칠 전 상인회 사무처 회랑에 놓여 있던 그 값비싼 꽃들은 누가 보낸 것이냐?"소소가는 멈칫했다.사또가 갑자기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기에 서둘러 대답했다."그건 윤 수행원을 쫓아다니는 상욱 도련님이 보내신 겁니다."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소인의 정인이
동부 명원.하주는 마차를 세우자마자 서둘러 저택의 여집사를 불렀다. 두 사람은 힘을 있는 대로 써서 만취해 곤죽이 된 윤서린을 겨우 집 안으로 부축해 들였다.어렵사리 객방 푹신한 침상에 눕히고 나니, 하주는 허리를 짚고 지칠 대로 지쳐 길게 숨을 내쉬었다.침상 위의 사람이 불쑥 몸을 뒤척였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욕을 했다."서이현……. 이 나쁜 놈…….""나는……우리 서우를……당신한테 안 줄 거야…….""그때……왜 나를 배신했어……."하주는 곁에 서서 한숨만 나왔다.취한 윤서린은 그야말로 닫히지 않는 취중 진담 기계였다. 아까 죽을힘을 다해 막지 않았다면, 서이현이 이 사람을 데려갔을 것이다.그랬다면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었다.그녀는 서둘러 몸을 돌려 부엌으로 가서 따뜻한 꿀물 한 사발을 떠 왔다.그런데 사발을 들고 돌아와 보니, 침상 위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하주는 가슴이 철렁해 병풍 뒤로 돌아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깥이 마침내 조용해졌다.서이현이 목욕을 마치고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허리에는 깨끗한 수건 한 장만 느슨하게 둘렀고, 흠뻑 젖은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방울은 날렵한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살짝 벌어진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사내는 곁방 문 앞으로 가서 손을 들어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역시 잠겨 있었다.그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문틀 위쪽을 쓱 훑어보더니, 손을 뻗어 대들보 위 비밀 칸에서 여분 열쇠를 더듬어 꺼냈다."딸깍."자물쇠가 순순히 열렸다.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안으로 들어갔다.창밖에서 스며드는 달빛 아래, 침상 위에 크고 작은 두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윤서린이 서우를 끌어안은 채, 모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서이현은 침상 곁에 오래도록 서 있다가, 결국 몸을 숙여 잠든 윤서린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그녀는 말도 안 되게 가벼웠다.그는 그녀를 안고 안방으로 돌아와, 큰 침상 위에 살며시 눕혔다.달빛이 그녀의 평온한 잠든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매는 부드럽고 입술은 살짝 다물려 있어, 낮에 이를 세우고 덤비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서이현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는 홀린 듯 몸을 숙여, 그녀의 뺨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