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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색적

작가: moominkiller
last update 게시일: 2026-09-14 19:10:28

미시의 볕이 회랑 마루에 비스듬히 들고 빈전 쪽 곡소리가 낮게 깔린 가운데, 상선 배원이 뒤따라온 내관에게서 옻칠한 함을 받아 문턱 앞에 내려놓았다.

여울은 문 안쪽에 엎드려 있었다.

배원은 품에서 열쇠를 꺼내 함을 열었다. 궁 안 내관들을 다스리는 상선도 이 방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함에서 꺼낸 장부는 손바닥 둘을 편 것만큼 작고 얇았다.

“내시부 색적의 법을 읽겠다.”

배원이 목을 가다듬는 동안 뒤의 내관 둘은 눈을 내리깔았다.

“색적에 오른 자는 본래의 적을 잃는다. 혼인하지 못하고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죽어도 사초에 오르지 않는다. 왕이 승하하면 새 왕의 처분을 기다리며, 그때까지 빈전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거처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상복도 입지 못한다.”

마지막 말에 봉수의 짧은 상복 소매가 움직였다. 여울이 고개를 더 낮추자 배원이 장부를 펼쳤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라.”

배원이 펼친 장부를 여울 쪽으로 기울였다. 한 장에 이름 여섯이 줄을 맞추고 있었다. 위의 먹빛은 오래되어 갈색으로 바랬다. 이름 옆에는 장부에 오른 해가, 그 옆에는 처분을 적은 글자가 남았다.

사(死). 출(出). 사(死). 사(寺). 출(出).

맨 아래에 하여울과 휘력 백칠십구년이 적혀 있었다. 그 옆자리만 종이 빛 그대로였다.

곧 채워질 자리였다. 여울은 바닥을 짚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처분이 내리면 저기에 적는다. 죽이거나, 내치거나, 절로 보내거나.”

배원이 장부를 거두어 함에 넣었다.

“그때까지 거처 밖으로 나가지 마라.”

“예.”

“거처는 오늘 안으로 내시부 청사 뒷방으로 옮긴다. 국상 중에 색적자가 침전 곁방을 차지하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다.”

여울이 다시 엎드리려는데 봉수가 문 옆에서 나섰다.

“선왕의 명이 있었습니다.”

배원의 손이 함 뚜껑 위에 멎었다.

“무슨 명.”

“처분이 내릴 때까지 곁방에 두라 하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승하하셨네.”

“아직 처분이 내리지 않았잖습니까. 그때까지는 옮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뒤에 선 내관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배원은 봉수의 얼굴을 오래 살폈다.

“자네가 들었나.”

“예.”

“언제.”

“승하하시기 이레 전, 이 방에서 들었습니다.”

“함께 들은 이는.”

“없습니다.”

배원은 더 캐묻지 않고 함을 내관에게 넘겼다. 돌아서던 눈길이 봉수의 손목에서 멎었다.

“소매가 왜 그런가.”

“나눠 주신 것이 이겁니다.”

“내일 바꿔 가게. 쯧, 뒷방은 어차피 상복 뭉치로 차서 사람 하나 누울 데도 없어.”

두 내관의 발소리가 배원을 따라 멀어졌다.

여울이 몸을 일으키자 봉수는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어른. 그런 명이 있었습니까.”

봉수는 소매를 고쳐 내리며 빈 문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없었습니다.”

여울은 목이 메었다. 무릎 위에 올린 손이 저절로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벌을 받습니다.”

“뒷방에 자리 없는 건 참말입니다.”

봉수는 짧은 소매 끝을 쥔 채 문턱을 넘다가 돌아섰다.

“내일부터 내시부에서 어린 궁녀 하나를 보낸답니다. 곁방 시중이랍니다.”

“여기서 무얼 시키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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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왕의 남총을 처분하는 법   닫힌 문

    서별당 마루에서 여울이 흰 옷의 소매를 당겨 내리던 그 시각, 자경전 안마당에는 볕이 들어도 소리가 들지 않았고, 곁채 문은 닫힌 채였고, 윤척은 그 마당을 가로질러 오면서 제 발소리를 두 번 죽였다.대비는 창호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찻잔이 앞에 있었다. 김이 나지 않는 잔이었다.“대비마마께서도 근심하시는 바라고 아뢰었습니다.”“그래서.”“적으라 하셨습니다. 두 번.”대비는 잔을 들지 않았다. 윤척은 말을 마친 뒤 대비 쪽을 보았다. 대비가 보고 있지 않아도 보는 버릇이었다.“죄인은 또 섰느냐.”“섰습니다. 귀 밑에……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아침에 그 방에서 곤룡포를 입었다지.”“그리 들었습니다.”대비는 창호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렸다. 빛이 뺨의 한쪽만 밝혔다.“선왕은 여덟 해 동안 그 아이를 안방에서 멀리 두었다. 낮에도 밤에도. 내 아들은 사흘 만에 궁 안에 다 보였다.”윤척은 대답하지 못했다.“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소신은.”“급한 것이다. 급한 사람은 기다리면 된다.”윤척은 홀을 고쳐 쥐었다. 쥔 손에 땀이 배었다.“좌상은 의금부를 잃었습니다. 앞으로 사람을 잡으려면 승정원의 글이 있어야 한다 하옵니다.”“안다.”“그러면 조정에서 사람을 세울 수 있는 것은…….”“너다. 그래서 급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문이 열렸다. 최령이 찻상을 들고 들어왔다. 연금 중인 사람이 드는 찻상이었다. 자경전 밖으로 못 나갈 뿐, 안에서는 전과 같이 움직였다.최령이 새 잔을 놓고 식은 잔을 거두었다. 거두는 손이 잔 가장자리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대비는 그 손을 보았다.“손이 왜 그러느냐.”“……아무것도 아니옵니다.”“아무것도 아닌 손이 잔을 놓치느냐.”최령이 엎드렸다. 대비는 더 묻지 않았다. 윤척은 그 사이에 눈을 어디 둘지 몰라 제 홀을 보았다.“우상.”“예, 마마.”“예조에 간택 절차를 살피라는 말은 네가 한 것으로 해라. 내 이름을 앞세우지 마라.”“대비마마께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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