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극 로맨스 / 설야팔부 (雪夜八部) / 제104화 — 스물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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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 스물일곱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6 16:23:25

무덤 벌판의 아침은 바람부터 낮았다.

새벽의 등잔 신호를 두고 밤새 판을 짜던 사람들이, 해가 뜨자마자 벌판으로 올라온 길이었다. 등잔의 답은 기다리면 오지만, 무덤의 답은 파야 나온다고 혈비가 순서를 정했다.

스물여섯 개의 봉분이 산기슭을 따라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그 줄의 맨 끝에, 흙빛이 다른 봉분 하나가 새로 앉아 있었다. 서둘러 쌓은 무덤이 아니었다. 반듯하게 다지고, 잔돌을 골라내고, 머리맡에 넓적한 돌 하나까지 놓은 무덤이었다.

"파겠습니다."

부수 노인이 삽을 잡으려는 것을 운설이 막았다.

"제가 합니다. 안에 누운 이가 누구든 — 몸을 보는 건 의녀의 일입니다."

흙은 아직 부드러웠다. 삽날은 금세 무엇엔가 닿았다.

거적에 정성껏 말린 몸이 나왔다. 거적을 걷은 운설의 손이, 낯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멎었다.

케테였다.

곁에서 우르가 소리를 냈다. 말이 되다 만 소리였다. 허풍쟁이는 제 소매로 낯을 한 번 거칠게 훔치더니, 무덤가에 주저앉아 죽은 동료의 흙 묻은 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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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230화 — 상단주의 값

    노관은 도망치지 않았다.그는 광장 한복판에서 진짜 도장을 제 손으로 꺼냈다. 허리 안쪽에 늘 차고 다니던 물목 인장이었다. 수레 바닥의 문양과 정확히 맞았다."제가 찍었습니다."사람들이 욕을 뱉었다. 돌 하나가 날아와 노관의 이마를 찢었다. 두 번째 돌은 연도하가 손으로 받았다."아직 값을 정하지 않았소.""사람 마흔일곱을 죽인 값이 돌 하나로 모자라오?"복칠의 어미가 소리쳤다."모자라니 멈추라는 것이오."연도하는 피 묻은 손으로 돌을 내려놓았다."이자를 붙여도 목숨 하나를 못 돌려주오. 그러니 죽이는 값부터 받으면 남은 빚을 받을 사람이 없어지지."그 말은 그가 평생 믿어 온 셈과 닮았으나 방향이 달랐다.설로상단 물목 창고에서 장부가 나왔다. 붉은 광석을 실은 수레 스물세 대, 온생원에서 받은 은 마흔여섯 냥. 그 돈은 노관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았다. 삽꾼 품삯, 죽은 말 보상, 여섯 마을 외상 약값으로 흩어졌다.노관은 돈이 쓰인 곳을 모두 기억했다. 어느 말이 눈길에서 다리를 부러뜨렸는지, 어느 삽꾼의 아이가 폐병을 앓았는지까지 말했다. 선한 용처가 이어질수록 광장의 얼굴들은 더 복잡해졌다.복칠의 어미가 물었다."내 아이 값으로 어느 아이 약을 샀소?"노관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모릅니다.""그런데 어찌 길을 살렸다고 말해. 누구 피가 어느 눈 위에 뿌려졌는지도 모르면서."노관은 더는 귀의 상처를 만지지 않았다.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처음으로 완전히 엎드렸다."그래서 네가 옳아지나?"연도하가 물었다."아닙니다.""훔친 은자가 없으니 배신이 아닌가?""배신입니다.""처음 손 떨린 환자 이야기를 들은 날은."노관이 날짜를 말했다.채령의 검은 장부에서 스물아홉 번째 이름이 죽기 엿새 전이었다. 그는 사람 열여덟이 더 죽는 동안 수레를 보냈다.노관은 왼손으로 오른귀의 잘린 자리를 만졌다."그 길을 닫으면 여섯 마을 아이들이 약 없이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그래서 보지 못한 아이를 죽였군.""예."연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229화 — 검신의 이름값

    광장에 웃음이 먼저 번졌다."선우현은 얼음강에서 죽었다지 않았소?""저자가 검신이면 나는 무림맹주다.""검도 없는데 무슨 선우현이야."선우현은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예전에는 이름을 대면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살아 있는 몸이 제 이름을 증명해야 했다.그는 붕대 감은 옆구리를 펴고 수레 바로 앞에 섰다."검신은 죽었소. 선우현은 약방에서 물을 나르는 중이오."이번에는 웃는 사람이 적었다.누군가 정말 선우현인지 증명해 보라며 나무 막대를 던졌다. 예전 검객이라면 손가락 두 개로 받았을 거리였다. 막대는 그의 어깨를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운설의 얼굴이 굳었다. 선우현은 막대를 주워 옆에 세웠다. 지팡이처럼 짚자 흔들리던 무릎이 바로 섰다."검신이 아니라 했잖소."조롱하던 사내가 눈을 피했다.그 한 번의 실패가 오히려 그의 이름을 증명했다. 죽었다 살아나 검을 잃었다는 소문과 눈앞의 몸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군중 사이에서 정말 그 사람이라는 속삭임이 번졌다.포졸장이 앞으로 나왔다. 콧등에 동상으로 패인 홈이 있었고 말할 때마다 오른쪽 수염을 잡아당겼다."죽었든 살았든 관아의 구휼을 막을 권한은 없소. 비키시오.""구휼품이 사람을 죽인 증거가 있소."채령이 검은 장부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온생원 호위 하나가 곧 외쳤다."도둑이 베낀 가짜 장부요! 저 계집은 원의 은자를 훔쳐 달아났소!"사람들의 시선이 흔들렸다.선우현은 채령에게 장부를 받지 않았다. 대신 광장 한복판 빈 탁자에 놓게 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도 혼자 가져갈 수 없는 자리였다."오늘 배급을 하루만 멈추시오. 그동안 장부의 이름을 확인하고 약을 따로 감정합시다. 틀렸다면 내가 온생원 문 앞에서 사죄하리다.""하루 동안 얼어 죽는 사람은?"포졸장이 물었다."내 이름을 담보로 장작을 사겠소.""검 없는 이름이 얼마짜리인데."조롱이 다시 튀었다."값이 없다면 더 좋소. 아무도 손해 보지 않을 테니."선우현은 제 앞에 떨어진 막대를 짚고 한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228화 — 혀 밑의 겨울

    운설은 아이를 빨래터 곁 빈 국밥집으로 옮겼다.불을 세게 피우지 않았다. 땀으로 약 기운을 뺀다는 장터 의원의 말을 막고, 미지근한 물로 입안을 씻었다. 아이가 삼킬 수 있게 된 뒤 녹두와 감초를 묽게 달인 물을 한 숟갈씩 먹였다."해독약입니까?"아이 어미가 물었다."몸이 버티도록 돕는 약이에요. 이미 들어간 돌가루를 한 번에 없애는 약은 없습니다."기적을 약속하지 않자 어미의 얼굴이 무너졌다.운설은 그 낯을 피하지 않았다."대신 지금 멈추면 살 수 있어요. 손을 잡아 주세요. 깨어날 때 아는 손이 있어야 합니다."채령은 문 앞에서 적온산 봉지를 하나씩 뜯었다. 원래 약재 냄새 아래 쇠와 눅은 흙 냄새가 났다. 붉은 가루를 물에 풀자 무거운 입자가 그릇 바닥에 가라앉았다.연도하가 칼끝으로 긁어 보았다."화로 안료로 쓰는 단사 찌꺼기요. 북쪽 폐광에서 버리던 것.""약으로도 아주 조금 쓰기는 해요."운설이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먹이는 건 약이 아닙니다. 몸 안에 쌓이는 독이에요."선우현은 국밥집 밖에 긴 종이를 붙였다.손 떨림, 잇몸 피, 이유 없는 열, 헛것이 보이는 자는 약 봉지를 들고 들어오시오.한 시진 만에 열두 사람이 모였다.국밥집 주인은 겨울 장사를 망친다며 처음에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손 떨리는 짐꾼이 제 친형이라는 것을 알고는 솥을 비웠다. 뜨거운 국 대신 묽은 녹두죽을 끓였다. 짠 장아찌는 치웠고 바닥에 멍석을 더 깔았다.채령은 환자마다 붉은 봉지 수를 적었다. 손이 떨려 먹점이 번지면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버지가 장부에 사정을 한 줄씩 남기던 방식이었다.선우현은 글 모르는 환자의 말을 대신 적었다. 손이 떨려 딸의 머리를 못 땋음. 밤마다 죽은 남편이 문밖에 보임. 증상은 사람의 생활을 빼앗은 모양으로 기록되었다.쉰 살 짐꾼은 젓가락을 잡지 못했다. 임신한 여자는 사흘째 물만 토했다. 열다섯 소녀는 혀가 붉게 부어 말을 제대로 못 했다. 모두 추운 밤을 견디려고 공짜 약을 먹었다.운설은 한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227화 — 붉은 약

    백로진에서 물문 장터까지 도보로는 이레였다.그러나 적온산 수레를 앞질러야 했다. 연도하는 검은 말 넷을 골랐고 짐을 절반으로 줄였다. 채령에게는 털을 두 겹 깐 작은 수레를 내주었다.선우현은 제 말 앞에 섰다."옆구리 세 바늘입니다."운설이 말했다."말은 옆구리로 타지 않소.""떨어질 때는요?""안 떨어지면 되오.""검신께서 아주 훌륭한 계책을 내셨군."연도하가 고삐를 건넸다. 말끝에는 웃음이 묻었으나 안장 높이를 선우현이 오르기 좋게 한 치 낮춰 둔 뒤였다.첫날은 눈을 맞으며 달렸다. 둘째 날 선우현의 상처가 다시 배어 나왔다. 운설은 길가 사당에서 일행을 세우고 붕대를 갈았다.상처 가장자리는 붉었으나 곪지는 않았다. 운설은 찬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붕대를 돌렸다. 말에서 내린 연도하가 물주머니를 들고 들어오다 그 광경 앞에서 멈췄다.운설의 뺨은 선우현의 맨살 가까이에 있었고, 선우현의 손은 균형을 잡느라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물은 밖에 두지.""왜요? 들어와요."운설이 아무렇지 않게 부르자 선우현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한 번 굽었다.연도하는 웃으며 물을 내려놓았다."의원은 사람을 살리면서 사람을 시험하는 버릇이 있군.""무슨 시험이요?""모르면 됐소."그가 나간 뒤 선우현이 낮게 말했다."저 사내 앞에서 내 옷을 그렇게 벗기지 마시오.""환자인데 어떡해요.""문이라도 닫으시오.""질투하면 상처가 빨리 나아요?""덜 아픈 듯은 하오."운설이 웃자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옷깃을 여몄다."괜찮소.""그 말 한 번에 벌금 두 푼 받을 거예요.""내 약방 돈으로 내면 되겠군.""제 약방이거든요.""우리 약방이라 하지 않았소?"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동안 연도하는 사당 문밖에서 불을 피웠다. 채령은 그에게 약이 든 물주머니를 건넸다."안 보고 싶으세요?""무엇을.""두 분이요."연도하는 불씨를 오래 들여다보았다."보고 싶지 않은 것과 눈을 돌리는 것은 다른 일이지."그날 밤 운설은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226화 — 설로의 도장

    금이 간 도장은 진짜 설로상단 나무로 만들었다.눈잣나무는 북관 밖에서만 자랐다. 겉의 눈송이는 다섯 갈래로 잘못 팠으나 손잡이 밑에 칼금 일곱이 있었다. 상단 수레가 물목을 지날 때마다 하나씩 늘리는 표식이었다.연도하는 칼금을 엄지로 훑었다."일곱 번째 물목은 노관의 자리요.""믿는 사람입니까?"운설이 묻자 그가 낮게 웃었다."믿었으니 이름이 바로 나오지."노관은 설로상단의 가장 오래된 물목지기였다. 스무 해 전 눈사태로 오른귀 절반을 잃었다. 그날 눈 밑에서 사람 열하나를 끌어냈고, 마지막이 열일곱 살 연도하였다."내가 길을 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목숨을 먼저 샀소."연도하는 언제나 빚을 값으로 말했으나 이번에는 셈이 흐렸다.선우현이 도장 바닥에 얇은 종이를 대고 먹을 문질렀다. 찍힌 문양 가장자리에 작은 점이 두 개 나타났다."가짜인 것을 알아보게 만든 흠이오.""누구에게?""진짜 표식을 아는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면 넣을 필요가 없소.""노관이 알리고 싶었다는 뜻이군.""아니면 들켰을 때 제 목숨을 살릴 구멍을 팠거나."연도하가 선우현을 보았다."사람을 아주 좋게 보는군.""그대보다 조금.""그건 욕이오?""칭찬으로 들어도 좋소."전날 밤 둘 사이를 지나갔던 말이 돌아왔다. 운설은 웃지 못했다. 연도하의 오른손 끝이 다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도장을 소매에 넣고 객점 마구간으로 갔다. 한 시진 뒤, 오른귀가 반쯤 없는 사내가 약방으로 들어왔다.노관은 생각보다 작았다. 굽은 등에는 밧줄을 두르고 있었고, 눈을 마주치는 대신 손가락으로 매듭 수를 세었다. 약방 안의 사람을 하나씩 세는 버릇이었다.그는 연도하 앞에 오기 전 운설에게 먼저 절했다. 여섯 마을에서 의원 이야기를 들었다며 말린 산삼 한 뿌리를 약상 위에 놓았다. 진짜 귀한 물건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데 쓰라고 가져온 손과 사람을 죽인 광석을 통과시킨 손이 같았다.채령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노관도 채령의 낯을 처음 본다고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225화 — 살아 있는 밤

    운설은 선우현의 옆구리를 세 바늘 꿰맸다.상처는 얕았다. 피도 곧 멎었다. 그런데 마지막 매듭을 지을 때까지 그녀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설야.""말하지 마요.""숨은 쉬어야 하오.""당신이요."선우현은 입을 다물었다.연도하는 붙잡은 자를 관아에 넘기러 갔고 채령은 떡집 노파의 방에서 잤다. 약방 안에는 화로 타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만 남았다.붙잡힌 자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혀 밑에 온생원 목패와 같은 붉은 점이 새겨져 있었다. 관아에서는 단순한 도둑으로 가두겠다고 했다. 누가 풀어 주러 오는지 보자는 선우현의 말에 연도하가 포졸 셋의 한 달 품삯을 먼저 치렀다."돈으로 사람을 사지 마시오."선우현이 말하자 연도하는 어깨를 으쓱했다."사람이 아니라 깨어 있는 밤을 샀소. 그대가 오늘 밤 쓸 것 같지 않아서."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던 운설이, 문이 닫힌 뒤에야 얼굴을 붉혔다.운설은 피 묻은 물을 버리고 돌아왔다. 선우현이 혼자 저고리를 여미려 애쓰고 있었다. 한 손이 옆구리에 닿을 때마다 미세하게 얼굴이 굳었다."놔요."그녀가 매듭을 잡아당겼다. 너무 세게 당겼는지 그가 숨을 삼켰다."아프오.""아픈 줄 알면서 왜 앞에 섰어요?""당신 뒤에 설 수는 없었소.""저는 당신이 지켜야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알고 있소.""그런데요?"선우현은 한참 뒤 대답했다."내가 지킬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소."검을 잃은 날부터 삼킨 말이었다. 운설은 화를 낼 곳을 잃었다. 영웅이 되고 싶다는 말보다 더 약하고, 그래서 더 아픈 고백이었다."당신이 물을 가져오고 약초를 써는 날마다 저를 지켜요. 아이들한테 글을 가르치는 것도요. 제가 밤새 환자를 볼 때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도.""그건 누구나 할 수 있소.""당신이 해서 제게 소용 있는 거예요."선우현의 턱이 굳었다. 제 손의 소용을 처음 물었던 무한의 밤이 두 사람 사이에 돌아왔다. 그때 운설은 반쪽만 답했다. 이제는 늦은 나머지를 그의 가슴 위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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