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백지장 앞의 강은 흰색이었다.닥나무 섬유와 잿물이 물 위에 얇은 막을 만들었다. 물고기는 배를 드러낸 채 갈대 사이에 걸렸고, 비가 내려도 냄새가 씻기지 않았다.운설 일행은 종이를 사러 온 사람들처럼 들어갔다.연도하가 상단주, 운설이 종이독을 살피는 의원이었다. 선우현은 장부를 보는 늙은 서기 행세를 했다. 지팡이와 느린 걸음은 숨길 필요가 없었다.류단은 수레 바닥에 누웠다. 아직 열이 남았으나 길을 아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출발 전 운설은 돌아갈 것을 세 번 권했다. 류단은 세 번 모두 싫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백지장의 안쪽 문이 어느 쪽으로 열리는지, 수문 사슬 열쇠가 허담의 왼쪽 허리춤에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선우현이 네 번째에는 묻지 않았다.“그대가 앞장서지 않게 하겠소. 다만 길을 고르는 것은 그대가 하시오.”류단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구하러 온 사람이 제 선택까지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먼저 내려요.”“환자는 누워 있어요.”“여기서 환자는 누워 있으면 종이 밑에 묻혀요.”운설은 대답 대신 류단의 손에 얇은 천을 감았다. 도망칠 때 줄을 잡아도 화상이 터지지 않게 하는 매듭이었다.백지장 문은 셋이었다.바깥 나무문, 수레를 들이는 쇠문, 사람만 지나는 작은 쪽문. 류단이 객주에서 출구를 네 번이나 센 까닭을 운설은 그제야 알았다. 여기서는 문이 많을수록 나갈 길이 줄었다.장주 허담이 쇠문 앞에서 맞았다.왼손 전체가 먹물에 데인 듯 검었다. 손가락 두 개는 잘 펴지지 않았으나 옷과 말투는 단정했다.“설로상단주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시다니.”“흰 종이에 검은 소문이 많아서 직접 보러 왔소.”연도하가 웃었다.허담은 웃지 않았다.“종이는 소문을 남기지요. 사람보다 오래 갑니다.”“그래서 사람을 종이에 맞추었소?”두 사람의 말이 부딪히는 동안 선우현은 안쪽을 보았다.허담 뒤에는 장정 넷이 서 있었다. 칼은 없고 닥 방망이만 들었지만, 방망이는 사람 팔뚝만큼 굵었다. 선우현
선우현은 불을 끄러 달려가지 않았다.“사람부터.”그 한마디에 움직임이 갈렸다.운설과 묘선은 첫 방의 류단을 부축했다. 아련은 빈방 문을 하나씩 열어 손님이 남았는지 확인했다. 연도하는 마구간 줄을 끊어 검은 말 둘을 골목으로 몰아냈다.왕철과 시장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온 것은 그다음이었다.불은 문에서 시작했으나 기름은 장부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누군가 사람보다 종이를 정확히 노렸다.불길이 기름 자국을 따라 달렸다. 왕철이 물을 끼얹자 기름불이 옆으로 퍼졌다. 선우현은 젖은 흙을 쓰라고 소리쳤다. 시장 사람들은 물통을 버리고 화단과 도랑의 진흙을 삽으로 퍼 날랐다.운설은 불을 끄는 손의 화상부터 막았다. 소매를 걷으라 하고, 젖은 천을 얼굴에 묶었다. 불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은 뛰어드는 용기보다 다음 숨을 남겨 두는 순서에 가까웠다.아련은 제 장부방이 타는 것을 보면서도 안으로 가지 않았다. 선우현이 정한 순서를 지키느라 발가락으로 땅만 팠다.“장부 안 가져와요?”아련이 물었다.“네가 나간 뒤에.”선우현은 아이의 등을 문밖으로 밀었다. 무릎이 좋았다면 안으로 먼저 뛰어들었을 사람이, 이제는 순서를 입으로 지켰다.지붕 절반이 내려앉았다.연도하가 젖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장부방까지 갔다. 원장부는 이미 불이 붙어 가장자리가 붉었다. 그는 장부 대신 벽에 걸린 빈 자루를 들고 나왔다.“비었잖아요!”아련이 소리쳤다.“장부는 그대가 세 장 만들었지.”자루 안에는 빈 종이와 먹, 수결판이 들어 있었다. 다시 쓸 도구였다.약방과 국숫집에 둔 두 장은 타지 않았다. 아련은 울음을 삼키며 젖은 땅에 종이를 펼쳤다. 시장 사람들에게 이름을 하나씩 읽어 주었다.“한 사람에 하나씩 외워 주세요.”왕철은 류단을 외웠다. 묘선은 유경을, 운설은 마소분을 맡았다. 글을 모르는 이들은 이름 옆의 흉과 버릇을 함께 들었다.종이는 탈 수 있어도 스무 사람의 입을 한꺼번에 태우기는 어려웠다.류단은 쉰 목소리로 열두째 이름을 직접 말했다. 제 이름을 남
죽은 사람은 길에서 검문받지 않았다.연도하는 백지장 운송표를 읽다가 그 사실을 알아냈다. 수레꾼 이름은 해마다 바뀌었으나 호적의 사망 날짜는 십 년 전 그대로였다. 죽은 이름 하나가 수레 세 대를 몰고, 또 다른 죽은 이름이 종이값을 받았다.“사람이 종이를 만드는 게 아니었군.”그가 말했다.“종이가 사람을 만들었소.”선우현은 호적소에서 거둔 빈 관인을 책상에 늘어놓았다. 위조 인도장 사건 뒤 파면 심리를 받는 아전의 창고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관인은 같았지만 종이 가장자리마다 눌린 자국이 달랐다.현승은 관인을 빌려 주면서도 사람 둘을 붙였다. 선우현이 또 관청 밖에 법판을 벌일까 두려운 얼굴들이었다. 선우현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관인 수를 세고, 종이마다 빛이 비치는 방향을 달리했다.석 장에는 같은 손가락 자국이 있었다. 오른손 약지가 짧아 먹이 한쪽으로 번진 모양. 파면된 아전의 손은 온전했다.“안에서 찍은 사람이 하나 더 있소.”연도하가 말했다.“빈 종이를 넘긴 자와 죽은 이름을 채운 자가 다르군.”그들은 호적소 뒷문에서 종이 부스러기를 찾았다. 닥섬유 사이에 검은 모래가 섞여 있었다. 백지장 앞 흰 강에서만 나는 모래였다.아련은 류단이 가져온 흰 종이와 겹쳤다.“이건 여기서 찍은 거예요.”“무엇을 보고 아느냐.”“모서리가 한 번 젖었어요. 이 종이도요.”아이의 갈라진 손톱이 희미한 물결 자국을 짚었다. 백로진 호적소에서 빈 관인을 찍은 뒤 백지장으로 보내고, 거기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죽은 이름을 붙였다.운설은 류단의 낡은 저고리를 뒤집었다. 옷 안쪽 솔기에는 세 갈래 닥잎이 수놓여 있었다. 설로상단의 옛 운송지에서 종이짐을 표시하던 무늬였다.연도하는 말없이 그 표식을 잘라 냈다.“왜 버려요?”류단이 물었다.“버리는 것이 아니오.”그는 자기 장부 첫 장에 천 조각을 붙였다.“내 상단이 무엇을 날랐는지 모른 척하지 않으려고.”선우현은 백지장까지 거리를 셌다. 말로 이틀, 강을 타면 하루 반. 관가 병력을 기다리면
류단은 사흘 동안 문을 열어 두고 잤다.밤비가 방바닥을 적셔도 닫지 못하게 했다. 묘선은 문턱 안쪽에 모래를 두껍게 깔고, 아련은 젖은 모래를 아침마다 갈았다.선우현은 열린 문 맞은편에서 잤다. 누가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면서도 류단이 나갈 길을 막지 않는 자리였다.운설은 종이죽 가루를 빼내는 약을 조금씩 먹였다. 도라지와 꿀, 폐의 열을 내리는 풀을 묽게 달였다. 류단이 기침할 때마다 흰 가래가 나왔고 셋째 날에는 처음으로 가루가 섞이지 않은 물이 나왔다.“이제 말해도 돼요?”아련이 물었다.“그 질문을 사흘이나 참았니?”“환자한테 말 많이 시키면 약값 더 든대요.”류단의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그녀는 열한 해 전 일을 띄엄띄엄 말했다.진무경이 풀어 준 아이들은 느티나무 객주에서 헤어졌다. 여덟은 북쪽으로, 셋은 남쪽 절로 갔다. 류단과 유경은 같은 마차 밑에 숨었다가 사흘 뒤 다시 잡혔다. 진태오와 함께 있던 호송인 하나가 아이들의 발목에 묻은 느티나무 진을 알아봤다.“우리를 관가에 데려간다고 했어요.”“안 데려갔군.”선우현이 말했다.“관가 종이를 데려왔죠.”빈 관인이 찍힌 사망 호적 두 장이었다. 류단은 열두 살에 죽은 박씨 셋째 딸이 되었고, 유경은 이름 없는 익사자의 몸이 되었다. 죽은 사람은 품삯을 요구하지 못했다. 달아나도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백지장은 강가의 담 안에 있었다.새벽에는 종을 세 번 울렸다. 첫 종에 일어나고, 둘째 종에 손을 잿물에 씻고, 셋째 종이 울리기 전에 가마 앞에 서야 했다. 늦은 사람은 하루 품삯 대신 이름표의 밥 한 끼를 잃었다.류단은 처음 몇 해 동안 달아날 날을 벽에 그었다. 백 번째 금을 긋던 날 허담이 벽을 새 종이로 발랐다. 그 뒤부터는 유경이 날짜를 외웠다. 류단은 문 수를, 유경은 사람 수를 맡았다.“둘이 합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실제로 나왔잖아요.”아련이 말했다.“반만.”류단은 열셋째 빈칸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사람들은 닥나무를 삶고
문밖의 여자는 들어오지 않았다.아련이 문을 반쯤 열어 둔 채 기다렸다. 여자는 젖은 머리칼 사이로 객주 안을 살폈다. 창문 둘, 뒷문 하나, 마당으로 난 쪽문 하나. 출구를 다 세고 나서야 문턱에 발을 올렸다.“문이 모두 몇 개입니까?”“여덟째 문인데 문짝은 넷이에요.”아련이 답했다.여자는 웃으려다 기침했다. 흰 가루가 입술 사이에서 날렸다. 밀가루보다 고왔고 젖은 종이 냄새가 났다.운설은 곧장 그녀를 부축했다.“숨을 크게 쉬지 마요.”“크게 쉴 숨이 없어요.”여자의 손목은 지나치게 가늘었다. 소매 안쪽 피부에는 둥근 화상 자국이 다섯 개 이어져 있었다. 화상 사이마다 먹으로 글자를 지운 흔적이 겹쳤다.선우현이 문을 닫으려 하자 여자가 몸을 뒤틀었다.“닫지 마.”존대가 깨질 만큼 빠른 목소리였다.선우현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비가 방 안으로 들었으나 문은 그대로 두었다.“닫지 않겠소.”여자는 그 말을 듣고서야 힘을 놓았다. 무릎이 꺾였다.연도하가 먼저 팔을 받쳤고 운설이 머리를 안았다. 두 사람이 들어도 몸은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옷만 젖은 것이 아니라, 종이죽을 말릴 때 쓰는 잿물 냄새가 살갗에 밴 듯했다.운설은 여자를 볕이 드는 첫 방에 눕혔다. 묘선이 이름을 말하기 전까지 문밖에서 밤을 새운 사람에게 비워 둔 방이었다.묘선은 새 이불을 가져오지 않았다. 낯선 천이 몸을 덮으면 놀랄 수 있다며, 류단이 두르고 온 겉옷을 물에 헹궈 다시 덮었다. 옷에서는 흰 물이 세 번이나 빠졌다.아련은 열린 문 옆에 앉았다. 제 몸 하나가 지나갈 만큼만 자리를 비워 두고, 류단이 눈을 뜰 때마다 출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아무도 안 막아요.”류단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으면서도 눈을 감을 수는 있었다.“물부터 먹이면 안 돼요?”아련이 물었다.“입 안부터 봐야 해.”혀와 잇몸이 하얗게 벗겨져 있었다. 잿물 김을 오래 마신 사람의 상처였다. 운설은 물에 꿀을 아주 조금 풀고 천을 적셔 입술만 닦았다. 갑자기 많이 마
아련이 가져온 것은 문짝이었다.느티나무 객주의 오래된 문이었다. 아래가 썩고 가운데에는 칼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진무경이 아이 열셋을 숨기던 밤, 뒤쫓아 온 호위의 칼을 그 문으로 막았다고 했다.“고쳐 주세요.”아련은 선우현 앞에 문을 눕혔다.“나는 목수가 아니다.”“검도 없는데 문은 잘 막았잖아요.”연도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외상 두 푼의 이자를 갚겠다며 사흘째 약방 사랑방에 머물고 있었다.“그 말은 내가 증언할 수 있지.”“그대는 북쪽으로 돌아갈 준비나 하시오.”“하란주가 첫눈을 사람보다 잘 부린다는 편지를 보내서 내가 없어도 된다는군.”첫눈은 아직 짐을 지지 않는 망아지였다. 편지 아래에는 발굽 모양 먹자국이 찍혀 있었다.선우현은 문짝을 뒤집었다.안쪽 널에는 이름 열셋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마소분이 느티나무 잎을 하나씩 새로 그렸고, 묘선은 찾지 못한 이름 둘 옆을 비워 두었다.“객주를 다시 열 겁니다.”묘선은 지팡이 없이 세 걸음을 걷게 된 날 말했다.“돈 없는 손님도 받으려고요?”운설이 물었다.“호적 없는 손님을 먼저 받을 거요.”봄 호적이 닫히기 전, 제 이름을 대신 써 줄 사람을 찾는 아이와 여인에게 열하루씩 방을 내주기로 했다. 약방은 몸을 증언하고, 시장 사람은 생활을 증언하고, 설로상단은 오간 길을 장부에 남겼다.진태오는 첫 번째 수선값을 냈다.그가 낸 것은 문설주였다. 큰집 창고에서 가장 곧은 느티나무를 가져와 묵묵히 대패질했다. 용서받아서가 아니었다. 아련을 열두 냥으로 셈한 일을 갚는 첫날이었다.호적 아전은 관인을 빼앗긴 채 글 모르는 이들의 이름을 베껴 쓰게 되었다. 빈 종이에 미리 도장을 찍는 버릇이 사라질 때까지였다.선우현은 새 문짝 위에 현판을 달았다.여덟째 문.현판을 거는 날에는 잔치라 부르기 민망한 밥상이 차려졌다. 국숫집에서 면을 보내고, 장채령은 새 장부 스무 권을 묶어 왔다. 복칠의 어미는 금 간 약사발에 들꽃을 꽂았다. 온생원 사건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자기 이름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