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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손을 올리지 않는다

Penulis: 데이지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8-17 18:36:56

“그것도 제가 정하겠습니다.”

하겐은 곧바로 고쳤다.

“정정하죠. 남을 생각이면 먼저 말해주십시오.”

“그건 하겠습니다.”

둘 사이에 약속이라고 부를 만한 거창한 말은 없었다.

자신의 선택을 지키되, 위험을 숨기지 않는다.

그 정도가 지금 필요한 합의였다.

옛 기사 주둔지에 도착했을 때,

전날 내려왔던 철문은 반쯤 열린 상태로 고정돼 있었다.

억지로 들어 올린 것이 아니었다.

시설 기술자들이 외부 하중장치를 분리하고,

철문이 더 내려오지 못하도록 벽 양쪽에 받침대를 세웠다.

전날 다친 기술자의 피가 묻었던 자리는 흙과 천으로 가리지 않았다.

사고 위치를 남겨두었다.

새 조사팀은 그 흔적을 피해 들어갔다.

하겐은 창고 안으로 가지 않았다.

애초 합의대로 외부 경비선에 남았다.

테사와 법무관, 시설 기술자 둘만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상자까지 열 걸음.”

테사의 목소리가 통신석을 통해 들렸다.

하겐은 외부 지도와 대조했다.

“서쪽 벽 뒤에 옛 배수로가 있다. 무너지면 안쪽으로 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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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327. 새로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더 불쾌한 것은 신성 잔류를 넣는 단계였다.중앙 수확기 측면에는 작은 유리관 여섯 개가 꽂혀 있었고 그중 네 개는 비어 있었지만, 두 개에는 아직 오래된 신성 반응이 남아 있었다. 아델라이드 계열과 높은 유사도를 가진 것 하나, 여러 후보 파장이 섞여 판독되지 않는 것 하나였다. 엘리시아의 현재 파장은 잡히지 않았다.그녀는 화면을 오래 보다가 말했다. “제17호 혈액이 저기 있었다고 쓰지는 마세요.”오스카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는 근거가 없습니다.”“그리고 저 유리관을 확인한다고 제 혈액을 새로 비교하지도 않습니다.”“그 조건은 이미 감정지에 들어 있습니다.”엘리시아는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테사는 조립선의 동력을 찾고 있었다. 수확기 본체가 왕핵을 직접 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움직이는지가 중요했다. 오래된 설계도에는 수동 태엽과 지열 보조만 적혀 있었지만 현재 장치는 그보다 훨씬 오래 움직일 수 있었다.원인은 벽 뒤에서 나왔다.수면이끼 저장고.말린 이끼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짙은 회녹색 군락이 따뜻한 물길 위에 자라고 있었다. 지하의 미약한 열과 습기를 이용해 십일 년 동안 완전히 죽지 않은 군락이 남아 있었고, 누군가는 최근 물길을 손봐 다시 번식하도록 만들었다. 이끼가 내놓는 진정성 분진은 회각충 껍질의 불규칙한 반응을 낮췄고, 동시에 오래된 자동기계의 마력공명 오차를 줄이는 완충재로 이용되고 있었다.미하일은 해당 자료를 받자 얼굴을 찌푸렸다. “수면이끼를 약으로 쓴 기록만 보면 이런 용도로 쓸 생각을 못 했을 겁니다. 진정시키는 대상이 사람만이 아니었던 거군요.”엘리시아가 물었다. “저 군락을 죽이면 수확기가 멈춥니까?”“일부는 멈출 겁니다. 다만 포자가 지하 전체에 퍼져 있으면 태워 없애는 방식은 위험합니다. 열을 올리면 오히려 분진이 한꺼번에 올라올 수 있습니다.”하겐이 통신으로 들어왔다. “물길을 끊으면?”테사는 수확기 설계도를 겹쳤다. “가능합니다. 수면이끼가 살아 있는 층

  •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326. 더 오래 봐야 하는 이유

    수확기 본체가 깨어났다는 보고가 올라온 직후에도 로스테는 폐창고로 사람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지하에서 움직이는 금속 구조물의 크기와 수가 아직 정확히 잡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스물네 개가 넘는 왕핵 유사반응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한 상황에서 문을 열어버리면 그 반응이 바깥 먹이길로 흩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겐은 새벽 경비교대를 마치기도 전에 북벽 전술실로 들어왔지만, 정찰대를 꾸리자는 말 대신 창고 주변 도로를 먼저 비우고 민가가 있는 남서쪽 길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폐창고에서 가장 가까운 목탄 작업장은 이미 비어 있었으나, 그 아래 마을에는 열두 가구가 남아 있었고 겨울 장작을 옮기던 마차도 아침부터 그 길을 사용할 예정이었다.베른하르트는 주민들을 강제로 성 안까지 데려오지 않았다. 폐창고 반경 안에 들어가는 마을만 두 시각 동안 임시 이동 대상으로 지정하고, 동쪽 공회당과 인근 친척집 가운데 원하는 곳을 선택하게 했다. 가축을 함께 옮길 수 있는 마차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나오자 군수마차를 가져다 쓰지 않고 도시 운송조의 빈 수레 여섯 대를 먼저 배정했으며, 이동한 주민들에게 지급하는 식사와 난방비가 조사 협조의 대가로 기록되지 않도록 비용 항목도 따로 만들었다.엘리시아는 그 과정이 끝난 뒤에야 수확기 본체의 구조도를 받았다. 십일 년 전 왕핵국 설계본에는 지하 최심부에 하나의 대형 수확기가 있고, 그 주변으로 회각충 껍질을 분류하는 자동 회수틀과 공명각 보관함이 배치됐다고 적혀 있었지만, 현재 관측값은 설계보다 훨씬 컸다. 원래 다섯 기였던 회수틀 가운데 적어도 열둘 이상이 움직이고 있었고, 일부는 벽면을 따라 새로 이어진 금속선과 연결돼 있었다.“십일 년 동안 누군가 증설했다는 뜻입니까?”오스카의 질문에 테사는 기록과 현재 값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증설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숨긴 수량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공식 설계하고 실제 시공이 달랐다는 사례가 너무 많아서 어느

  •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325. 접촉을 반복하지 않겠다

    그 정도면 됐다.약속이라 부르기에도 작은 합의였다.그런데도 엘리시아는 그 말을 한 뒤 이상하게 숨이 조금 편해졌다.다음 진동은 오지 않았다.대신 방의 문틈부터 어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천명몽 특유의 낙하감이 다시 두 사람을 각자의 현실로 밀어냈다.마지막까지 둘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엘리시아가 현실에서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그녀는 곧바로 통신석부터 잡지 않았다.먼저 자신의 상태를 기록했다.성흔 열감은 잠들기 전과 비슷했고 심박은 정상 범위였으며, 손바닥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천명몽에서 느낀 칼릭스의 통증은 자신의 몸에 남지 않았다.그녀는 네 번 숨을 고른 뒤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마셨다.그때 기존 의료통신 경로에 새 기록 하나가 올라왔다.황도 주치의 보고.시각은 방금 전.칼릭스가 수면 중 깨어났고, 약 삼 분간 절명흔 주변 압박감이 있었으나 심박은 곧 안정됐다. 오른손 냉감 인지 지연은 전날과 비슷했고 새로운 감각 소실은 없었다.엘리시아는 그 기록을 오래 바라봤다.천명몽에서 느낀 감각과 닮아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꿈에서 확인했다’는 문장을 사건기록에 적지 않았다.의료기록은 의료진이 확인한 현실 자료로 충분했다.잠시 뒤 칼릭스에게서 별도 문장이 도착했다.‘방금 의료기록을 기존 경로에 올렸습니다.’그리고 한 줄이 더 있었다.‘천명몽에서의 접촉을 확인 목적으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엘리시아는 답신란 앞에서 잠시 손을 멈췄다.‘네.’거기까지만 썼다가 지웠다.조금 더 정확하게 다시 적었다.‘동의합니다. 저도 그러지 않겠습니다.’전송한 뒤 그녀는 통신석을 덮었다.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서로 원해서 닿은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한 번의 사고가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 하나를 남겼다.천명몽에서 서로의 몸에 닿으면 현재의 감각 일부가 넘어올 수 있다.그것은 생각을 읽는 일도, 기억을 보는 일도, 거짓말을 가려내는 일도 아니었다.그러니 둘은 그 기능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적

  •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324. 확인하려고 다시 닿지는 않는다

    익숙하지만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침실.닫힌 문.벽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회귀 이후 두 사람을 강제로 같은 밤 안에 밀어넣곤 했던 천명몽이었다.엘리시아는 곧바로 왼손목을 찾았다.손가락 아래 맥박이 느껴졌다.반대편에는 칼릭스가 서 있었다.그 역시 방금 끌려온 듯 잠옷 위에 얇은 겉옷만 걸친 모습이었고, 엘리시아를 확인하자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대 하나와 넓은 바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폐하.”“엘리시아.”칼릭스는 자신의 위치에서 멈춘 채 말했다. “오늘은 예고가 없었습니다.”“원래 예고해준 적도 없잖아요.”엘리시아의 말에는 피곤한 마른 기색이 섞여 있었다.칼릭스는 방의 문과 벽을 차례로 살펴봤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동안 둘은 천명몽에서 같은 공간에 떨어지더라도 불필요하게 가까워지지 않았고, 특히 상대의 몸에 닿는 일을 피했다. 이곳에서 접촉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현실에서 수면이끼에 노출되셨습니까?”칼릭스가 물었다.엘리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폐하도요?”“없습니다.”그 대답만으로 둘은 이번 천명몽을 수면이끼 탓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천명몽은 회귀 반동으로 생긴 공간이었다.전쟁과 수면이끼가 겹친 시기에 나타났다고 원인이 같다는 증거는 없었다.엘리시아가 벽에 가까운 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순간 방 전체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침대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고, 천장 없는 어둠 속 어디선가 낮은 진동이 지나갔다.칼릭스가 즉시 그녀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멈췄다.진동은 한 차례 더 이어졌다.이번에는 바닥이 한쪽으로 기울었다.엘리시아의 몸이 침대 쪽으로 밀렸고 칼릭스 역시 반대편에서 균형을 잃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가장 가까운 침대 기둥을 짚었다.손이 겹친 것은 그때였다.의도는 없었다.누가 먼저 상대를 잡은 것도 아니었다.같은 기둥을

  •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323. 발생 시각 그대로 올려주세요

    저녁 제한 통신에서 칼릭스는 사건보다 의료기록을 먼저 화면에 올렸다.오른손의 냉감 인지 지연은 전날과 비슷했고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오후에 절명흔 주변에서 짧은 압박감이 한 차례 있었다. 지속시간은 약 삼 분이었고, 주치의가 확인한 뒤 저녁 일정 두 건을 취소했다. 왕핵은 여전히 사용하지 않았다.엘리시아는 화면의 기록을 끝까지 읽었다.“통증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까?”칼릭스가 잠시 생각했다. “약했습니다. 하지만 없었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예전 같으면 ‘문제없습니다’로 뭉갰을 문장을 그는 굳이 나눠 말했다.엘리시아는 왼손목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서류 끝에 적힌 주치의 권고를 확인했다. “내일 일정도 절반만 유지합니까?”“예.”“황실 쪽에서 흰 뿔의 왕 때문에 직접 왕핵 사용 요청은 없었고요?”“없습니다. 제가 금지 항목으로 올린 상태라 별도 검토가 필요합니다.”“좋습니다.”그 한마디가 끝난 뒤 잠깐 침묵이 흘렀다.칼릭스가 먼저 수면이끼 실험 보고를 꺼냈다. “관측팀에 영향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사냥꾼 한 명이 방향을 잠깐 헷갈렸고, 기술자 한 명이 철수 중 넘어졌습니다. 둘 다 지금은 괜찮습니다.”“농도를 더 올리는 실험은?”“안 합니다.”“흰 뿔의 왕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도?”“왕을 일부러 불러올 생각은 없습니다.”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엘리시아가 화면을 바라보다 물었다. “폐하라면 예전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칼릭스의 금빛 눈이 잠시 멈췄다.“농도 5를 시험했을 겁니다.”대답은 예상보다 빨랐다.“사람을 세워놓고요?”“아마 보호장비를 입힌 병사를 배치했겠죠.”“몇 명쯤?”칼릭스는 바로 숫자를 말하지 못했다. 손가락 끝이 책상 위에서 아주 조금 굳었다가 풀렸다.“필요 최소라고 생각했을 만큼.”엘리시아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표현이네요.”“압니다.”“지금은요?”“왕의 반응을 모르더라도 현재 방어선이 유지된다면 굳이 확인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

  •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322. 괜찮다는 말은 근거가 되지 않는다

    테사의 명령은 그 순간 바로 내려갔다.사냥꾼은 자신은 졸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그 대답을 안전 판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관측팀은 장비 일부를 자동모드로 남기고 능선을 내려왔으며, 한 기술자는 서둘러 발을 옮기다가 얼어붙은 돌을 밟고 미끄러져 팔꿈치를 찧었다. 골절은 없었지만 보호대가 깨져 장비 한 대를 현장에 남겨야 했고, 그 손실까지 실험기록에 포함됐다.미하일이 두 사람을 치료소에서 확인했을 때 사냥꾼의 졸음은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숫자를 거꾸로 읽는 실수가 한 차례 더 있었고, 약 반 시각이 지나서야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엘리시아는 그 기록을 보고 수면이끼 사용기준에 새 조건을 추가했다.“본인이 졸리지 않다고 말하는 건 노출 여부 판단에 쓰지 마세요. 방향감각이나 계산 반응이 먼저 흐려질 수 있다는 걸 오늘 확인했으니까요.”하겐이 원격 화면으로 그 문장을 읽다가 입술을 비틀었다. “농도 3도 바람 한번 잘못 돌면 저 정도인데, 5를 성벽 앞에서 쓰자는 소리가 나오면 누가 했는지 이름부터 적어두겠습니다.”“의견을 냈다고 처벌하지는 마세요.”“이름만 기억하려고요.”“그것도 별로 좋은 표정은 아니네요.”그날 실험은 실패로 기록되지 않았다.회각충의 활동을 늦출 수 있다는 가능성과, 낮은 농도에서도 인간의 판단력이 먼저 흔들릴 수 있다는 위험을 동시에 확인했다. 로스테는 수면이끼를 전면 무기로 채택하지 않았고, 당분간은 회각충이 왕핵 잔류를 먹기 전에 제한 구역에서 접근을 늦추는 보조수단으로만 검토하기로 했다.사용 가능한 선택지가 하나 늘었다.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조건도 더 많이 늘었다.칼릭스가 보낸 자료는 그보다 늦게 도착했다.십일 년 전 수면이끼 대량 구매와 회색 공명각 채취 실험을 승인한 문서의 연쇄였는데, 예상대로 한 사람의 서명으로 끝나는 기록은 아니었다. 왕핵국 북부 실험분과가 재료를 요청했고, 군의무국이 수면이끼를 제공했으며, 대신전 결속법무실은 성녀 잔류를 사용하는 실험이 결속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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