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정도면 됐다.약속이라 부르기에도 작은 합의였다.그런데도 엘리시아는 그 말을 한 뒤 이상하게 숨이 조금 편해졌다.다음 진동은 오지 않았다.대신 방의 문틈부터 어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천명몽 특유의 낙하감이 다시 두 사람을 각자의 현실로 밀어냈다.마지막까지 둘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엘리시아가 현실에서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그녀는 곧바로 통신석부터 잡지 않았다.먼저 자신의 상태를 기록했다.성흔 열감은 잠들기 전과 비슷했고 심박은 정상 범위였으며, 손바닥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천명몽에서 느낀 칼릭스의 통증은 자신의 몸에 남지 않았다.그녀는 네 번 숨을 고른 뒤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마셨다.그때 기존 의료통신 경로에 새 기록 하나가 올라왔다.황도 주치의 보고.시각은 방금 전.칼릭스가 수면 중 깨어났고, 약 삼 분간 절명흔 주변 압박감이 있었으나 심박은 곧 안정됐다. 오른손 냉감 인지 지연은 전날과 비슷했고 새로운 감각 소실은 없었다.엘리시아는 그 기록을 오래 바라봤다.천명몽에서 느낀 감각과 닮아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꿈에서 확인했다’는 문장을 사건기록에 적지 않았다.의료기록은 의료진이 확인한 현실 자료로 충분했다.잠시 뒤 칼릭스에게서 별도 문장이 도착했다.‘방금 의료기록을 기존 경로에 올렸습니다.’그리고 한 줄이 더 있었다.‘천명몽에서의 접촉을 확인 목적으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엘리시아는 답신란 앞에서 잠시 손을 멈췄다.‘네.’거기까지만 썼다가 지웠다.조금 더 정확하게 다시 적었다.‘동의합니다. 저도 그러지 않겠습니다.’전송한 뒤 그녀는 통신석을 덮었다.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서로 원해서 닿은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한 번의 사고가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 하나를 남겼다.천명몽에서 서로의 몸에 닿으면 현재의 감각 일부가 넘어올 수 있다.그것은 생각을 읽는 일도, 기억을 보는 일도, 거짓말을 가려내는 일도 아니었다.그러니 둘은 그 기능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적
익숙하지만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침실.닫힌 문.벽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회귀 이후 두 사람을 강제로 같은 밤 안에 밀어넣곤 했던 천명몽이었다.엘리시아는 곧바로 왼손목을 찾았다.손가락 아래 맥박이 느껴졌다.반대편에는 칼릭스가 서 있었다.그 역시 방금 끌려온 듯 잠옷 위에 얇은 겉옷만 걸친 모습이었고, 엘리시아를 확인하자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대 하나와 넓은 바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폐하.”“엘리시아.”칼릭스는 자신의 위치에서 멈춘 채 말했다. “오늘은 예고가 없었습니다.”“원래 예고해준 적도 없잖아요.”엘리시아의 말에는 피곤한 마른 기색이 섞여 있었다.칼릭스는 방의 문과 벽을 차례로 살펴봤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동안 둘은 천명몽에서 같은 공간에 떨어지더라도 불필요하게 가까워지지 않았고, 특히 상대의 몸에 닿는 일을 피했다. 이곳에서 접촉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현실에서 수면이끼에 노출되셨습니까?”칼릭스가 물었다.엘리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폐하도요?”“없습니다.”그 대답만으로 둘은 이번 천명몽을 수면이끼 탓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천명몽은 회귀 반동으로 생긴 공간이었다.전쟁과 수면이끼가 겹친 시기에 나타났다고 원인이 같다는 증거는 없었다.엘리시아가 벽에 가까운 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순간 방 전체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침대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고, 천장 없는 어둠 속 어디선가 낮은 진동이 지나갔다.칼릭스가 즉시 그녀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멈췄다.진동은 한 차례 더 이어졌다.이번에는 바닥이 한쪽으로 기울었다.엘리시아의 몸이 침대 쪽으로 밀렸고 칼릭스 역시 반대편에서 균형을 잃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가장 가까운 침대 기둥을 짚었다.손이 겹친 것은 그때였다.의도는 없었다.누가 먼저 상대를 잡은 것도 아니었다.같은 기둥을
저녁 제한 통신에서 칼릭스는 사건보다 의료기록을 먼저 화면에 올렸다.오른손의 냉감 인지 지연은 전날과 비슷했고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오후에 절명흔 주변에서 짧은 압박감이 한 차례 있었다. 지속시간은 약 삼 분이었고, 주치의가 확인한 뒤 저녁 일정 두 건을 취소했다. 왕핵은 여전히 사용하지 않았다.엘리시아는 화면의 기록을 끝까지 읽었다.“통증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까?”칼릭스가 잠시 생각했다. “약했습니다. 하지만 없었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예전 같으면 ‘문제없습니다’로 뭉갰을 문장을 그는 굳이 나눠 말했다.엘리시아는 왼손목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서류 끝에 적힌 주치의 권고를 확인했다. “내일 일정도 절반만 유지합니까?”“예.”“황실 쪽에서 흰 뿔의 왕 때문에 직접 왕핵 사용 요청은 없었고요?”“없습니다. 제가 금지 항목으로 올린 상태라 별도 검토가 필요합니다.”“좋습니다.”그 한마디가 끝난 뒤 잠깐 침묵이 흘렀다.칼릭스가 먼저 수면이끼 실험 보고를 꺼냈다. “관측팀에 영향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사냥꾼 한 명이 방향을 잠깐 헷갈렸고, 기술자 한 명이 철수 중 넘어졌습니다. 둘 다 지금은 괜찮습니다.”“농도를 더 올리는 실험은?”“안 합니다.”“흰 뿔의 왕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도?”“왕을 일부러 불러올 생각은 없습니다.”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엘리시아가 화면을 바라보다 물었다. “폐하라면 예전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칼릭스의 금빛 눈이 잠시 멈췄다.“농도 5를 시험했을 겁니다.”대답은 예상보다 빨랐다.“사람을 세워놓고요?”“아마 보호장비를 입힌 병사를 배치했겠죠.”“몇 명쯤?”칼릭스는 바로 숫자를 말하지 못했다. 손가락 끝이 책상 위에서 아주 조금 굳었다가 풀렸다.“필요 최소라고 생각했을 만큼.”엘리시아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표현이네요.”“압니다.”“지금은요?”“왕의 반응을 모르더라도 현재 방어선이 유지된다면 굳이 확인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
테사의 명령은 그 순간 바로 내려갔다.사냥꾼은 자신은 졸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그 대답을 안전 판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관측팀은 장비 일부를 자동모드로 남기고 능선을 내려왔으며, 한 기술자는 서둘러 발을 옮기다가 얼어붙은 돌을 밟고 미끄러져 팔꿈치를 찧었다. 골절은 없었지만 보호대가 깨져 장비 한 대를 현장에 남겨야 했고, 그 손실까지 실험기록에 포함됐다.미하일이 두 사람을 치료소에서 확인했을 때 사냥꾼의 졸음은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숫자를 거꾸로 읽는 실수가 한 차례 더 있었고, 약 반 시각이 지나서야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엘리시아는 그 기록을 보고 수면이끼 사용기준에 새 조건을 추가했다.“본인이 졸리지 않다고 말하는 건 노출 여부 판단에 쓰지 마세요. 방향감각이나 계산 반응이 먼저 흐려질 수 있다는 걸 오늘 확인했으니까요.”하겐이 원격 화면으로 그 문장을 읽다가 입술을 비틀었다. “농도 3도 바람 한번 잘못 돌면 저 정도인데, 5를 성벽 앞에서 쓰자는 소리가 나오면 누가 했는지 이름부터 적어두겠습니다.”“의견을 냈다고 처벌하지는 마세요.”“이름만 기억하려고요.”“그것도 별로 좋은 표정은 아니네요.”그날 실험은 실패로 기록되지 않았다.회각충의 활동을 늦출 수 있다는 가능성과, 낮은 농도에서도 인간의 판단력이 먼저 흔들릴 수 있다는 위험을 동시에 확인했다. 로스테는 수면이끼를 전면 무기로 채택하지 않았고, 당분간은 회각충이 왕핵 잔류를 먹기 전에 제한 구역에서 접근을 늦추는 보조수단으로만 검토하기로 했다.사용 가능한 선택지가 하나 늘었다.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조건도 더 많이 늘었다.칼릭스가 보낸 자료는 그보다 늦게 도착했다.십일 년 전 수면이끼 대량 구매와 회색 공명각 채취 실험을 승인한 문서의 연쇄였는데, 예상대로 한 사람의 서명으로 끝나는 기록은 아니었다. 왕핵국 북부 실험분과가 재료를 요청했고, 군의무국이 수면이끼를 제공했으며, 대신전 결속법무실은 성녀 잔류를 사용하는 실험이 결속 준
수면이끼를 전장에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열린 아침 회의에서, 가장 먼저 제외된 것은 로스테 외곽 전체에 진정 성분을 퍼뜨리는 방식이었다. 십일 년 전 군의무국 기록에는 농도 5단계에서 흰 뿔의 왕으로 추정되는 백각 대형종의 보행이 느려졌다고 적혀 있었지만, 같은 문서의 마지막에는 농도 7단계 이상에서 인간 지휘체계가 유지되지 못했다는 경고가 붙어 있었다. 더구나 회각충은 충분한 왕핵 잔류를 먹은 뒤 수면이끼에 노출되어 활동을 멈추기만 해도 껍질이 빈 왕핵석과 비슷한 성질로 변할 수 있었다. 마물을 재우는 데 성공하더라도 전장에 가짜 왕핵 재료를 수십, 수백 개 남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테사는 폐병원 주변 지형을 세 구역으로 나눈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쳐놓고, 현재 가능한 실험은 도시와 바람을 등진 북서쪽 골짜기 한 곳뿐이라고 설명했다. “살아 있는 회각충을 잡아서 우리 쪽으로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이미 폐병원 저장구 주변에서 움직임을 멈춘 군체 가운데 일부가 자연적으로 깨어나면, 골짜기 쪽으로 유도되는 기존 지맥 흔적만 이용하겠습니다. 수면이끼도 새로 뿌리는 게 아니라 저장구 안에 남은 양을 원격으로 조금씩 개방해서 농도 변화를 확인하는 정도가 한계입니다.”하겐은 지도의 풍향선을 살피다가 손가락으로 로스테 방향을 한 번 짚었다. “바람이 돌아서 성벽 쪽으로 오면?”“즉시 중단합니다. 관측대도 같은 고도에 두지 않고 능선 뒤로 내립니다.”“사람한테 어느 정도부터 영향이 오는지 확인한다고 경비병 세워놓는 짓은 안 하겠지?”테사의 표정이 피곤하게 일그러졌다. “그 말 오늘로 세 번째 들었습니다. 안 합니다.”엘리시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미하일 쪽 자료를 끌어왔다. 과거 군의무국이 수면이끼의 인간 영향도를 측정한 기록은 충분하지 않았고, 특히 성흔을 가진 사람이나 왕핵과 직접 연결된 황족에게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는 거의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자기 몸으로 시험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칼릭스에게도 같은 검사를
두 사람 모두 자기 쪽으로 가져가지 않았다.결정을 나중으로 미루면서도 책임을 남겨두었다.그것은 예전의 침묵과는 달랐다.밤이 되기 전에 회각충 군체는 폐병원 외곽에 도착했다.로스테는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대신 멀리 떨어진 능선에 관측기를 두고 움직임만 봤다.회각충들은 무너진 병원 벽을 갉지 않았다.건물 뒤편의 오래된 지하 저장구로 몰렸다.그곳에는 수면이끼를 말려 보관하던 통이 묻혀 있었다.대부분 썩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북부의 차가운 지하와 봉인수지 때문에 일부는 형태가 남아 있었다.회각충이 저장구 주변을 파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그러다 한 마리가 오래된 이끼 조각을 입 부분으로 끌어당겼다.그 순간 개체의 움직임이 느려졌다.몸통이 몇 차례 떨리더니 그대로 웅크렸다.죽지는 않았다.잠든 것처럼 멈췄다.두 번째 개체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세 번째와 네 번째가 따라 들어간 뒤에는 군체 전체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늦어졌다.하겐이 관측 화면을 보며 말했다. “저게 먹히는 건가?”미하일이 원격으로 수면이끼의 옛 기록을 확인했다. “사람에게는 진정 효과가 있지만, 회각충에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기록은 없습니다.”테사가 군체의 생체 반응을 읽었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왕핵 잔류 흡수도 멈췄습니다.”회각충 수십 마리가 폐병원 저장구 주변에서 움직임을 멈췄다.그리고 이상하게도 흰 뿔의 왕도 그쪽으로 가까이 오지 않았다.로스테는 처음으로 회각충을 죽이지 않고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그러나 엘리시아는 바로 수면이끼를 전장에 뿌리자는 결정을 막았다.“농도와 부작용부터 봅니다. 사람이나 말이 같이 노출될 수 있어요.”하겐이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성녀님이 그 말 안 할 줄 알았다면 내가 오늘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겠지.”“칭찬입니까?”“이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미하일은 과거 수면이끼 재고량과 현재 로스테 주변 자생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