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며칠이 지났다.
애리는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안은 조용했다.
신발을 벗으며 거실을 둘러봤지만 줄리안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일찍 뉴욕으로 간다고 했으니 당연했다.
애리는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먹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줄리안이었다.
“응.”
“집이야?”
“방금 왔어.”
“오늘 일찍 끝났네.”
“응. 마지막 수업이 휴강이었어.”
“좋겠다.”
애리가 냉장고 문을 닫았다.
“오빠는?”
12월이 시작되고도 류정호의 퇴근 시간은 좀처럼 빨라지지 않았다.그날도 사무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류정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다시 넘겼다.이미 여러 번 확인한 내용이었다.문제는 거래 자체보다 그 이후였다.며칠 전부터 당시 승인 과정에 대한 자료를 다시 제출하라는 요구가 이어지고 있었다.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와.”문이 열리고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부장님.”“응.”직원이 서류 한 묶음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요청하신 자료입니다.”류정호가 맨 위에 놓인 문서를 확인했다.“이게 전부야?”“네. 당시 결재 올라갔던 자료까지 다 넣었습니다.”“본사 쪽에서는?”직원이 조금 망설였다.“추가로 확인해 달라는 게 있습니다.”류정호가 고개를 들었다.“뭔데?”“최종 승인 전에 부장님께서 검토하셨던 내용이요.”“그것도 지난번에 보냈잖아.”“저도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다시 달라고 합니다.”류정호는 아무 말 없이 직원을 바라봤다.“알았어.”직원은 그대로 서 있었다.류정호가 물었다.“왜?”“괜찮으십니까?”“뭐가.”“계속 같은 자료를 요구하니까요.”류정호가 서류를 덮었다.“확인할 게 있나 보지.”“그래도….”“달라는 거 다 줘.”“네.”“우리가 문제될 거 한 것도 없잖아.”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문이 닫히고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류정호는 의자에 기대앉았다.
추수감사절 연휴가 끝나고 애리는 뉴헤이븐으로 돌아왔다. 며칠 비워둔 집은 조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자 거실은 떠날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소파 위에는 교재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한쪽에는 줄리안이 두고 간 잡지 몇 권이 쌓여 있었다. 애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혼자 들어오니 집이 더 크게 느껴졌다. 기숙사로 갈까 생각했지만 금방 마음을 바꿨다. 룸메이트와 좁은 방을 나눠 쓰는 것보다는 여기가 나았다. 애리는 가져온 옷을 위층에 가져다 놓고 다시 내려왔다. 저녁을 먹고 과제를 시작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줄리안이었다. “응.” “뭐 해?” “과제.” “또?” “학생이 과제하지 그럼 뭐 해.” “나랑 통화해.” 애리가 웃었다. “하고 있잖아.” “과제 말고.” “오빠는 뭐 하는데?” “호텔.” “공연 끝났어?” “응.” 애리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오늘 어디였지?” “디트로이트.” “내일은?” “시카고.” “또 이동해?” “아침에.” 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 “힘들겠다.” “괜찮아.” “잠은?”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애리가 바로 물었다. “또 못 잤어?” “좀.” “얼마나?” “세 시간?”
뉴저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거의 넘어간 뒤였다.보스턴에서 출발한 지 네 시간이 훌쩍 넘었다.중간에 한 번 쉬기는 했지만 추수감사절을 앞둔 도로는 평소보다 차가 많았다.애리는 차를 세우고 한동안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힘들어.”혼잣말을 하고 나서야 안전벨트를 풀었다.차에서 내려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났다.애리가 신발을 벗으며 안쪽을 바라봤다.“엄마?”주방에서 엄마가 얼굴을 내밀었다.“왔어?”“응.”“왜 이렇게 늦었어?”“차 막혔어.”애리는 가방을 현관 옆에 내려놓았다.“뭐 해?”“내일 먹을 거.”주방으로 들어가자 식탁 위에는 이미 재료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불려놓은 당면과 손질한 채소가 보였고, 한쪽에는 전을 부칠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애리가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냈다.“이번에도 한국 음식 해?”“그럼 뭘 해.”“칠면조.”엄마가 애리를 한번 봤다.“먹고 싶어?”“아니.”“그럼 됐지.”애리가 웃었다.“뭐 하는데?”“잡채하고 갈비찜. 전도 좀 하고.”“송편은?”“사 왔어.”
다이너에서 나온 건 새벽 한 시가 가까워진 뒤였다. 지율과 샬롯, 이안은 먼저 하버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조심해서 가.” “너도.”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세 사람이 먼저 차에 올랐다. 마커스와 노아도 곧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마커스가 줄리안에게 물었다. “너는?” “나는 목요일에 따로 갈게.” 마커스는 애리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노아도 대충 손을 흔들고 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애리가 줄리안을 봤다. “나 진짜 여기 있어?” “응.” “내 차는?” “내일 가지러 가.” “옷도 없는데.” “내 거 입어.” 대답이 막힘없이 나왔다. 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지?” “네가 올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그건 맞았다. 애리가 할 말을 잃자 줄리안이 웃었다. “가자.” 애리는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호텔은 공연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투어팀이 머무는 곳이라 늦은 시간에도 로비에 익숙한 스태프들이 몇 명 보였다. 줄리안과 애리가 들어오자 몇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애리가 물었다. “사람들 다 아는 거 아니야?” “뭘?”
공연이 끝난 뒤. 애리와 세 사람은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백스테이지로 들어갔다. 복도는 공연 직후라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옮기며 오갔고, 열린 문 사이로 사람들이 계속 드나들었다. 샬롯은 아까부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 진짜 들어가도 되는 거 맞아?” 애리가 웃었다. “이미 들어왔잖아.” “아니, 그러니까.” 샬롯이 목소리를 낮췄다. “나 오늘 맨 앞줄에서 실버라인 공연 보고 지금 백스테이지까지 들어온 거잖아.” 지율이 말했다. “응.” “미쳤다.” “아까도 그 말 했어.” “그때랑 지금은 다르지.” 이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뒤를 따라왔다. 조금 전까지 공연장이 떠나갈 듯했던 함성이 아직 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스태프가 한 대기실 앞에 멈췄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문이 열리자 샬롯이 가장 먼저 안을 들여다봤다. 마커스와 노아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샬롯의 걸음이 멈췄다. 지율이 뒤에서 물었다. “왜 안 들어가?” 샬롯이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 “왜?” “그냥 네가 먼저 들어가.” 지율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커스가
투어가 시작됐다.첫 공연은 필라델피아였다.공연장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 찼고, 시작부터 분위기는 뜨거웠다.다음은 워싱턴이었다.두 번째 공연도 별다른 문제 없이 끝났다.투어가 시작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이동과 공연은 빠르게 반복됐다.그리고 11월 25일.보스턴.공연 시작을 앞둔 대기실은 평소보다 분주했다.스태프들이 계속 드나들었고, 무대에서는 마지막 점검이 진행되고 있었다.줄리안은 시간을 확인했다.공연까지 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핸드폰을 들어 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애리가 받았다.“응.”“뭐 해?”“친구들이랑 있어.”“이 시간에?”“과제 때문에.”주변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줄리안이 물었다.“밖이야?”“응.”“어디?”“그냥 학교 근처.”“아.”애리가 물었다.“왜?”“그게 다야?”“뭐가?”“오늘.”“오늘 왜?”줄리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나 생일인데.”한 박자 후 애리가 말했다.“아.”“아?”“축하해.”“…끝?”“응. 생일 축하해.”줄리안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성의 없네.”“미안. 나 지금 가봐야 돼.”“벌써?”“응. 이따 전화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