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국가정보국 심리연구본부.
민기는 조용히 임무 수행 중이던 도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숨을 죽이고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평소보다 더 치솟는 그녀의 감정, 이제는 익숙하게 울려대는 경보음까지. 다른 게 있다면, 오늘 도희의 감정은 순식간에 90%를 뚫었다는 것이다. 천천히 예열된 것이 아니라 폭발하듯 한계선을 넘어버린 그녀의 감정. 도희가 출동한 드론을 총으로 쏴 버리자마자 놀란 민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야?’ 멍하니 화면 속 고철이 된 채 나뒹구는 드론을 보던 민기. 그는 허겁지겁 데이터 자료를 가지고 소연에게로 뛰어갔다. 드론을 쏴 버린다고?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백시현도, 그리고 저 한도희조차도. “본부장님!” “뭐지?” “이것 좀 보십시오.” 민기가 건넨 데이터 파일을 천천히 바라보는 소연의 눈동자에도 보기 드문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눈이 조심스럽게 깜빡였다. 기계적인 냉정함으로, 그러나 뭔가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스쳤다. “뭐야, 이게.” “한도희 요원, 임무 수행 중에…….” 민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안정화 드론 폭파시켰습니다.” 소연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아쉬운 작별의 순간이 온 건가. “더는 못 봐주겠네.” 소연은 상부에 보고를 올렸다. 이리부대 한도희 중사, 코드네임 EVe. 위험인물에서 잠재적 반역자로 격상. 칩 추가 삽입 예정. 소연의 음울한 눈에서 스산한 향기가 불었다. 도희를 제어할 수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아무 문제가 없지 않던가. 도희가 처음 이리부대에 입대하고, 강화인간 프로젝트에 성공하고, 본격적으로 소연까지 괴물이라 인정했을 때부터. 도희는 아슬아슬했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다. 오늘 같은 돌발 행동은 처음이었다. 이제는 도희를 어찌할 수가 없는 상태다. “한도희 요원 근무지 변경해. 이제부터 N구역 고정이다.” “알겠습니다.” 화면에 데이터를 입력하던 직원의 손가락이 유독 피곤하다. 연이은 야근과 잔업에 눈꺼풀은 바위가 되어 그를 짓눌렀다. 느릿한 손길로 그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중사 한도희 근무지 변경 완료. 구역 M. 그 순간 명령이 시스템에 퍼져나갔다. 누구도 오타를 감지하지 못했다. “한도희 요원, 근무지 변경이다. M구역, 이동 후 바로 SMD와 협동 작전 수행한다.” “네.” 도희는 의심 없이 M구역으로 이동했다. M구역, 백시현이 있는 곳이었다. *** “이리부대 한도희 중사입니다. 오늘부터 SMD와의 협동 작전 수행을 명 받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이곳에서의 임무는 도희가 평소 수행하던 것과 비슷했다. 정부에서 명령한 인물을 사살하고 침투하는 특수부대, 이리부대. 도희가 이곳에서 할 일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저 그전처럼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침투하고, 사살하고, 퇴각한다. “이브, 목표 좌표 전송 완료. 공습 후 그쪽으로 침투하면 된다.” “확인.” 침투 대기 중이던 도희의 눈썹이 꿈틀했다. ‘생각보다…….’ 공습이 효과가 없었다. 잔존 인원이 더욱 더 거세게 반격해오기 시작했다. 은폐된 방공망이 가동되고, 무장 세력들은 만만치 않은 공격을 하고 있었다. 도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도희의 눈은 흑복과 고글 아래 가장 밝은 섬뜩함이었다. 가만히 총을 들고 숨까지 죽이던 도희에게 침투 명령이 떨어졌다. “침투하라.” 파견된 이리부대 대원은 고작 세 명. 그러나 그 세 명은 이리부대라는 명성답게 타격대 맨 앞에서 정면으로 돌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단연 선두는 도희였다. 탕, 탕- 도희가 울리는 총성은 정확히 타깃의 개수와 맞아떨어졌다. 추가적인 공격은 불필요하다. 적군 하나에, 총탄 하나. 그거면 충분했다. “이브, 위치 전송 바란다.” “지금 지하 1층 격납고 쪽, 엄폐 중.” 데이터가 격납고 쪽에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도희는 망설임없이 지점으로 향했다. 감정이 치솟는 시한폭탄 같은 도희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이 소속된 곳이 정부임을 잊지 않았다. “이브, 무인기 추적 감지된다. 스텔스 기능 때문에…….” 본부에서 도희에게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나 무전이 채 다 들리기도 전에, 도희의 바로 뒤에서 콰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드론이 무차별하게 탄을 날리고 있었다. ‘씨, 지금 퇴각 경로 확보도 못했는데……!’ 도희가 입술을 악물었다. 지금은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경보음이 비명을 지르면 드론은 감정의 머리를 사냥한다. 그러나, 감정을 참는 건 도희에게 임무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감정 수치 85%. 안정화 필요합니다. 경보음이 울렸다. 드론들은 마치 거기 있었냐는 듯이, 탄을 쏴대기 시작했다. “이브, 퇴각하라.” 무전기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반복해서 들려왔다. “이브, 위험하다. 즉시 퇴각하라.” 도희는 총을 꽉 쥔 채 눈을 부릅떴다. 고글에서는 여전히 작전 데이터를 보여주고 있었다. 데이터 서버실 위치, 도희의 좌표, 현재 감지되는 생존자 등등. 작전이냐, 퇴각이냐. 고글과 마스크 아래로 웃음이 새었다. 그건 광기의 부산물이자 오만함의 유기체. “씨발, 나 아니면 누가 해.” -감정 수치 87%. 안정화 필요합니다. 경보음까지 무시한 채 도희는 벌떡 일어나 드론들을 향해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울려퍼지는 격발 소리가 누구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브, 퇴각해!” 도희는 무전을 거칠게 끊어버렸다. 이제 이렇게 된 이상, 단독 작전으로 간다. 도희는 침착하게 보이는 드론들을 조준하고 총을 쏘았다. 발사, 또 발사. 그리고 명중. 드론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쾅- 그때 도희가 어깨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부상이었다. “하, 진짜 씨…….”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미 흑복 너머로 진득하고 뜨거운 피가 느껴졌다. 관통상인가? 아니면 단순 화상? 총상?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도희는 피를 느낀 순간, 몸 속의 생기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어깨가 뻐근하고 뜨겁게 아프고 상처 사이로 기운이 줄줄 새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도희는 기어이 데이터를 통째로 뽑아내 복귀했다. 중요한 의료품까지 회수 완료. 작전은 성공이었다. SMD의 작전이 아니라, 한도희의 단독 작전이었다. “한 중사! 이리로! 당장 구급대 연락해!” “가까운 병동으로 긴급 보고합니다!” 하지만 심각한 총상. 도희는 본부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놀이공원 가고 싶어.”“놀이공원? 갑자기?”거처에서 조용히 총기를 분해하다 다시 조립하기를 반복하던 도희였다.철컥, 철컥, 탁.다시 탁, 탁.절그럭.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도희가 만지는 총열과 그 부품들의 소리만 침묵을 채웠다.그녀는 혼자 있거나 심란할 때 강박처럼 총기 분해를 하곤 했다.모든 걸 풀어헤쳤다가 하나 둘 역순으로 조립하는 게, 마음을 정리해 나가는 것만 같아서였다.그런 도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맥락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놀이공원.옆에서 메스를 닦던 시현도 어리둥절해 소독약을 묻힌 거즈를 툭 떨어트렸다.“응, 놀이공원. 가서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싶어. 롤러코스터도.”말이 안 된다는 걸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도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남은 총기 부품을 탁 쑤셔넣었다.철컥,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희의 작은 목소리가 묻혔다.“못 타는 건 나도 알아.”하지만 강화인간인 시현의 귀에 그게 안 들리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그날 밤, 시현이 앉은 모니터에는 좌표와 화살표가 빼곡했다.마냥 떠돌아다니던 시현에게 새로운 목적지가 생겼다.‘남쪽에 하나, 이 근처에 하나.’그가 찾는 것은 오늘 도희가 무심코 던졌던 그곳이었다.꿈과 환상의 나라.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다 죽어버려 콘크리트 황무지가 된 이곳에서 꿈과 환상이라니.그러나 시현은 손을 계속 움직였다.찾아낸 건 두 군데.은신처 바로 옆에 놀이공원이 하나 있었지만, 혁명군의 기지로 쓰이고 있었다.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 소리가 펑펑 터지던 곳이었다.거긴 패스.다른 곳은…….바쁘게 돌아다니던 시현의 눈동자가 한 점에서 멈췄다.점선과 파란 위치 아이콘이 가리키는 곳, 그 아래 숫자는 17min.한강을 건너면 보이는 곳이었다.‘여기다.’근처에는 호수와 강이 있고 복합쇼핑몰과 병원들까지.새로 거처를 잡을 후보지도 차고 넘치는 곳.‘군부대는 없지만…… 폐벙커와 기지가 많아. 여기서는 의약품을 챙길 수 있고 여기서는 생필품
시현과 도희는 산책 중이었다. 날씨가 좋았다. 잿빛이 된 거리와 달리 하늘은 쾌청했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햇빛은 적당히 따뜻했다. 도시가 망가지든 말든, 나무와 풀은 제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엽이 굴러다니기 시작했고 단풍은 이파리를 따라 제 영역을 넓혔다. “단풍 봐, 벌써 날씨가 시원해졌나 봐.” “예쁘다.” “그치? 진짜…….” “단풍이겠냐.” 시현이 픽 웃으며 도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너.” 도희의 얼굴이 단풍을 닮아갔다. “가, 갑자기 뭐래…….” “싫어?” 그리고 언제나 시현이 한 수 위였다. “싫으면…… 안 하고.” “누가 싫대?” “그럼, 좋아?” “……응.” 도희의 대답이 시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느리게 돌아왔다. “방금은 당황했을 뿐이야. 네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서.” 도도한 고양이가 오늘은 삐끗, 헛발질을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그의 팔에 팔을 걸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고 폐허는 말없이 둘을 외면했다. “근데 여기 호수, 괜찮다. 벚꽃 피면 진짜 예쁠 것 같아.” 도희가 말했다. “다음 봄에도 오면 되지.” 다음 봄이라는 그 말에 도희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시현의 그 무거운 말 앞에 모두 삼켰다. 도희는 그저 시현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도희…….” 시현이 도희를 부르려다 멈췄다. 불길하면서도 기괴한 소리에 시현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드론이야.” 시현의 목소리에 경계가 서렸다. 작게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아직 저놈은 우릴 발견하지
“아으, 여기면 되겠지? 거리도 나쁘지 않고, 인터넷 되고.”버려진 한 기지.민기는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콜록거렸다.몇 시간을 돌고 돌아 드디어 인터넷이 되는 기지를 찾았다.근무 대기 신청을 해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무기들을 챙겨 그는 정보국을 몰래 탈출했다.삼엄한 경비와 두꺼운 장벽이 버티고 있었지만 민기는 어찌저찌 그 장애물들을 전부 통과했다.사실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뭔가 부서졌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고함을 쳤던 것 같기도 한데.결국 남은 건 팔에 묻은 콘크리트 가루와 흙먼지들.“아, 이거 귀한 건데 기스 났네. 이게 얼마짜린데, 하…….”탈출하면서 비싼 기기에 흠집도 났다.투덜거리던 민기가 대충 말아둔 모포 더미에 풀썩 주저앉았다.사사로운 정의감이나, 목숨을 건 탈출 따위의 같잖은 헛소리는 민기의 것이 아니었다.죽기를 각오한 건 맞지만, 그런 진지함을 가지고 이 낡아빠진 폐기지로 온 거라면 너무 우스울 것 같았다.“어디 보자…… 전원 버튼이…….”수석 해커를 괜히 단 그가 아니었다.기계라면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굴릴 수 있는 민기였다.OFF에서 멈춰 있던 글자가 ON으로 바뀌는 순간.-환영합니다. 재부팅을 시작합니다.이것저것 전선을 연결하고, 프로그램을 깔아놓자 그제야 민기는 거울을 보았다.거울에 쌓인 두껍던 먼지가 민기의 손길에 후두둑 떨어지자 그는 천천히 금속탐지기를 들었다.직접 해킹하고 개조한 탐지기였다.탐지기로 자신의 몸을 쓸어내자 탐지기가 곧 울렸다.목덜미에서 징징대던 탐지기는 귀 뒤로 올라가자 미친 듯이 울어재끼기 시작했다.정보국 요원이었던 민기조차도 몰랐던 칩의 위치.‘거기구나. 귀 뒤에.’거울 속 민기가 씩 웃었다.곧 그는 칼을 들었다.라이터로 칼을 소독한 후, 그는 고른 한숨을 내쉬었다.무겁지 않은 한숨이었다.“괜찮아.”내 궁극의 반항은 내 몸을 해킹하는 것.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그걸 잘 아는 민기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거침없이 칼로 피부를 도
국가정보국 심리연구본부.소연의 사무실.손이 초조하게 바빴다.키보드를 두드렸다가도 패드를 들었다가, 손톱을 딱딱 물었다.-1중대 2소대 전멸. 확인 생존자 없음. 수배자 시신 확인 실패.군부대들이 가져온 건 두 연놈의 시신이 아닌 차가운 실패의 데이터.그 둘의 허튼 총질에 엘리트 부대원들이 죄다 사냥당한 것이었다.‘아무리 그래도 피해는 입힐 줄 알았는데.’시신은커녕 피해를 입혔다는 보고조차 없었다.소연은 더 이상 무식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손톱을 찢던 소리가 일순간 멈췄다.본부가 적막에 뒤덮였다.‘안 되겠다. 무력으로는 감당 안 돼.’소연의 결론에서는 되찾은 평정이 짙게 깔렸다.보고서에서는 단순히 실패만 적혀 있던 게 아니었다.‘타깃 1이 먼저 공격을 개시하고, 타깃 2는 그 소리에 유인된 아군들을 후처리한다. 살상보다는 기능 상실 유도. 타깃 1이 간혹 성급하게 행동하나 타깃 2는 강화된 시야로 아군 공격을 차단하고…….’백시현, 한도희 그 둘의 공조는 소대 하나쯤은 전멸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폭탄은 약물의 독성을 퍼트리고 약물은 화약을 터트리는 이치.‘그러니 내가 뭘 해야겠어. 머리를 써야지. 둘이 다시는 못 만나게. 그게 힘으로 되겠어?’그것이야말로 소연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백시현, 한도희 둘 정보 다 긁어와. 쓸데없는 정보여도 돼. 입대하고 활동 시기까지 전부 다 싹싹 모아서 가져와.”소연이 명령을 내릴 때마다 말끝에 차가운 한숨이 뱉어졌다.그녀의 말에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요한 살의는 여전히 눈앞의 실패 보고서를 쏘고 있었다.소연의 입술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터졌다.이런 패배를 안겨준 놈들은 처음인지라 분노와 흥분이 뒤엉켜 난리를 부렸다.“최대한 빨리 드리겠습니다.”“그래.”두 수배자 때문에 전국이 비상사태에 돌입해 무장한 군대가 서울과 그 근방을 장악했다.이미 사살 당한 의심 인물들만 스무 명이 넘었다.위급한 상황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아는 팀원들은
“으아악!”퍽-“아악!”“……허.”도희가 지켜보며 헛웃음을 지었다.그녀가 더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백시현, 그의 살육이 본색을 드러냈다.마취제와 독이 섞인 주사기를 목에 꽂아넣어 적의 신경을 끊었다.허리춤에서 꺼낸 수혈 튜브로 목을 조이며 숨을 틀어막고, 그 순간 뒤에서 기습하려던 다른 적을 가뿐히 피하며 메스로 동맥을 갈랐다.“컥! 여, 여기! 도와줘!”시현의 살인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마음껏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몸부림칠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그리고 그 시간 속 인간은 천천히 시드는 것이었다.피의 분수 한가운데 이질적인 그의 무표정이 차가운 죽음을 내렸다.손끝마다 둔탁한 총소리를 내는 도희와 사뭇 달랐다.정확하게 어딜 노려야 사람이 죽는지, 어딜 찔러야 사람이 불구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시현의 몸놀림은 최소화되고, 깔끔한 움직임 한 번에 피가 튀었다.관절이 무너지고 근육이 찢기며 피가 역류했다.“뭐야, 내가 할 게 없잖아.”도희가 총을 집어넣었다.총 대신 꺼낸 칼날에 흥미어린 도희의 미소가 비쳤다.시현의 도구는 치료도, 죽음도 구분하지 않았다.“억!”또 한 줄의 동맥이 잘려나갔다.탕-튀어나오려던 마지막 비명은 도희가 가져가 버렸다.시현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면, 도희는 그저 파괴 그 자체였다.둘의 속도가 다르고 리듬도 달랐지만 단 한 번도 엇나가지 않았다.원래 그게 그들이 맞물리는 방법이라는 듯이.어느새 사방은 고요해졌다.바닥은 피로 질척거렸고 여기저기 급소가 잘려나간 시신들이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었다.먼지와 땀, 피가 섞여 공기가 불쾌하게 끈적거렸다.그러나 시현과 도희 둘 다 살갗 한 번 베인 흔적조차 없었다.완벽한 승리였다.쓰러진 적들의 시체를 하나, 둘 밟고 도희가 지나왔다.바람에 그녀의 옷이 펄럭였다.찢어진 군복과 옷이 길게 늘어져 휘날리고, 발목을 휘감았다.피와 살 위로 신성한 광기가 걸어왔다.“너 공주 같다.”“뭐?”도희가 귀를 의심했다.하지만 시현은
다음날 아침.도희의 시선이 조용했다.붉게 젖은 붕대로 향한 시선이 점차 확신으로 떠올랐다.“야. 나도 의술 배울래.”“뭐?”시현이 고개를 들었다.“너도 다칠 때가 있을 거 아니야. 너 혼자 치료하는 것도 무리일 거고. 나도 배워서 너 치료할 거야.”시현은 그 속에 숨은 진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그는 알면서도 괜히 물었다.“왜?”“너 다칠 수 있게 하는 것도, 고치는 것도 나 하나여야 되니까.”시현이 천천히 일어났다.시선은 완벽하게 도희를 조준하고 있었다.기괴하게 꺾인 사랑이 대답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뜨거운 덩어리가 속에서 폐를 짓눌렀다.시현은 벌떡 일어나 자기 품 안에 도희를 옭아맸다.죽을 만큼 간절하게.“그거야. 그거야, 한도희.”그리고는 자비 없는 키스를 쏟아부었다.도톰하고 작은 입술을 물 때마다 도희가 움찔거렸다.부드러운 입술에 상처를 내면 도희는 시현을 더 꽉 끌어안았다.아픈 키스.도희가 좋아했던 열락.“도희야. 숨 막혀?”“조금.”그러나 시현은 배려해줄 생각이 없었다.“그럼…… 내가 네 숨까지 다 빼앗았다는 거지?”“뭐, 그렇지?”시현의 입꼬리가 솟았다.그 미소가 도희를 마취시킨 순간, 억센 힘이 그녀의 얼굴을 당겼다.도희의 숨이 턱 막혔다.시현 역시도 그녀의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뚝 끊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