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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두 바퀴

Penulis: Jino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17 12:14:36

걷는 건 한계가 있었다.

해인의 회사까지 왕복 네 시간. 마트에서 12층까지 다섯 번 왕복. 이틀 동안 종아리가 돌처럼 뭉쳤다. 차는 안 된다. 지하철도, 버스도. 머리를 쓰는 건 다 죽었다.

그렇다면 머리 없는 탈것.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체인이 돌고, 체인이 돌면 바퀴가 도는 것. 내 다리가 하는 만큼만 가는 것. 태엽이 감기고 라이터가 켜지는 세상이라면, 이것도 될 것이다.

아파트 자전거 보관대에 자전거가 스무 대쯤 서 있었다. 대부분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비밀번호 자물쇠, 열쇠 자물쇠, 체인. 나는 보관대를 한 바퀴 돌았다. 자물쇠 없는 자전거는 두 대였다. 하나는 바퀴에 바람이 빠져 있었고, 하나는 아이용이었다.

아이용 자전거 앞에 잠깐 서 있었다. 보조 바퀴가 달린 분홍색. 서아가 네 살쯤 되면 사 주려고 했던 것과 똑같은 모델이었다. 해인이 인터넷으로 벌써 봐 둔 거였다.

나는 분홍 자전거 핸들에 달린 방울을 손가락으로 튕겨 보았다. 따릉. 작고 맑은 소리가 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서아라면 저걸 몇 번이고 누를 것이다. 해인은 시끄럽다고 할 것이고.

나는 그 자전거를 지나쳤다.

결국 관리사무소 옆 창고로 갔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 공구함이 있었다. 절단기가 있었다. 빨간 손잡이의 커다란 절단기.

그걸 들고 보관대로 돌아와 제일 멀쩡해 보이는 자전거 앞에 섰다. 검은 하이브리드 자전거. 체인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절단기 날을 체인에 물렸다. 손잡이를 모았다.

잘 안 됐다. 힘을 더 줬다. 이를 악물고, 온몸으로.

탁.

체인이 끊어졌다. 쇳조각이 튀어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져서, 굴렀다. 굴렀다. 내가 끊은 쇳조각이니까.

손바닥이 얼얼했다. 절단기 손잡이의 빨간 고무가 손바닥에 줄무늬 자국을 남겼다. 쇳조각을 하나 주워 보았다. 끊어진 단면이 은색으로 반짝였다. 방금 생긴 반짝임이었다.

나는 끊어진 체인을 들고 한참 서 있었다. 남의 자전거 자물쇠를 끊었다. 서른네 해 동안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 할 일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자전거 주인에게 말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저쪽 세상에서 지금도 출근길에 이 자전거를 찾고 있을지도 모를.

"빌려 갈게요. 잘 쓸게요."

안장 높이를 맞췄다. 타이어를 눌러 보았다. 빵빵했다. 체인에 기름이 잘 먹어 있었다. 주인이 아끼던 자전거였다.

핸들 고무가 손때로 반들거렸다. 오른쪽 손잡이만 유난히 닳아 있었다. 주인은 오른손으로 브레이크를 자주 잡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조심성 많은 사람. 나는 그 사람이 닳게 해 놓은 자리에 내 손을 얹었다.

올라탔다.

페달을 밟았다.

바퀴가 굴렀다.

단지 안 도로를 천천히 돌았다. 오랜만이었다. 결혼 전에는 한강에서 자주 탔다. 서아가 태어나고는 한 번도 못 탔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균형, 페달, 핸들. 조금 비틀거리다가 이내 똑바로 나아갔다.

서아가 태어나고 해인과 뒷자리에 아이 의자를 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서아가 좀 더 크면 태우고 한강에 가자고. 의자는 끝내 달지 못했다. 서아는 아직 작았고 우리는 늘 바빴다.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집으로 올라가 가방을 챙겼다. 회사에 들고 다니던 백팩. 노트북을 빼고 생수 두 병, 초콜릿 몇 개, 라이터와 볼펜, 출석부 종이, 그리고 서아의 분홍 실내화를 넣었다. 실내화는 어디를 가든 챙겼다. 이제는 버릇이 됐다.

현관을 나서다 신발장 거울에 비친 나를 보았다. 헬멧이 없었다. 해인이 봤으면 한 소리 했을 것이다. 애 아빠가 헬멧도 없이.

나는 신발장 위 서랍을 뒤졌다. 해인이 한강 갈 때 쓰던 흰색 헬멧이 있었다. 작았다. 머리에 겨우 얹혔다. 턱끈이 목을 조였다. 거울 속 남자가 우스꽝스러웠다. 흰 헬멧을 머리 위에 간신히 얹은 서른네 살.

나는 거울 속 남자에게 경례했다.

"안전 운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 자전거에 올랐다.

단지 정문을 나섰다.

경비실 앞을 지날 때 습관처럼 고개를 숙였다. 책상 위 라디오는 여전히 소리가 없었다.

큰길로 나갔다.

8차선 도로. 평소라면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는 길. 지금은 차들이 서 있었다. 드문드문, 멈춘 채로. 차선 사이 틈이 넓었다. 나는 그 틈으로 들어갔다. 버스 전용 차로, 1차선, 중앙선.

중앙선 위를 달렸다.

노란 두 줄 사이를. 평생 한 번도 밟아 볼 일 없던 선을. 페달을 세게 밟았다. 속도가 붙었다. 멈춘 차들이 양옆으로 휙휙 지나갔다. 신호등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빨간불, 초록불, 상관없었다.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멈춘 차들 옆을 지날 때마다 차 유리에 내가 비쳤다. 흰 헬멧을 얹은 남자가 창에서 창으로 건너뛰며 따라왔다. 유리마다 잠깐씩, 그리고 금방 뒤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속도가 붙는데, 바람이 없었다.

자전거를 타면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머리카락이 날리고, 셔츠가 등에 붙고, 귀에서 바람 소리가 윙윙거린다. 그게 자전거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얼굴에 닿는 게 없었다. 공기가 그냥 비켜났다. 저항도 없이, 소리도 없이.

나는 달리고 있는데, 세상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로수 잎들도 그대로였다.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도 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나 혼자 그림 속을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물감 위를 달리는데 물감이 조금도 번지지 않는.

속도를 더 냈다. 헐떡일 만큼. 허벅지가 타들어 갈 만큼.

그래도 바람은 없었다.

들리는 건 내 숨소리와 체인 돌아가는 소리,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들은 내 몸 가까이에서만 났다. 한 발짝만 떨어지면 삼켜지는 소리. 나는 소리의 작은 방 안에 들어앉아 달리는 것 같았다.

한강 둔치까지 달렸다.

강변 자전거 도로. 결혼 전에 해인과 같이 달리던 길이었다. 해인은 자전거를 못 탔다. 내가 뒤에서 안장을 잡아 주며 가르쳤다. 해인은 "놓지 마, 놓지 마" 하다가 어느새 혼자 가고 있었다. 내가 손을 놓은 줄도 모르고. 뒤돌아보고 내가 멀리 서 있는 걸 알고는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무릎이 까졌다. 그날 저녁 해인이 말했다. 결혼하자고. 무릎에 밴드를 붙인 채로. 내가 아니라 해인이 먼저.

그 자리에 자전거를 세웠다.

해인이 넘어진 자리는 가로등 밑이었다. 정확히 어느 가로등이었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몸이 먼저 멈췄다. 브레이크를 잡은 손이 알고 있었다.

강은 멈춰 있었다. 물결 모양 그대로. 햇빛 조각이 박힌 채로. 멀리 다리들이 서 있었다. 다리 위의 차들도.

강물 냄새가 나지 않았다. 둔치에 나오면 늘 나던 비릿하고 축축한 냄새. 해인은 그 냄새가 좋다고 했다. 나는 코를 킁킁거려 보았다. 내 땀 냄새만 났다.

나는 강변 계단에 앉았다.

숨이 가라앉았다. 땀이 식지 않았다. 바람이 없으니 땀이 마르지 않았다. 셔츠가 끈적하게 등에 붙어 있었다. 그 불쾌함이 이상하게 좋았다. 적어도 내 몸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백팩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병을 기울이자 물이 흘렀다. 입가로 넘친 물이 턱을 타고 셔츠로 떨어졌다. 떨어져서 번졌다. 셔츠에 번진 얼룩은 내 것이었다.

한참 앉아 있다가,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

강을 향해. 목이 찢어지도록.

소리가 강 위로 나갔다. 그리고 사라졌다. 물 위를 건너가지도 못하고, 강 건너 건물에 부딪혀 돌아오지도 못하고. 그냥 몇 미터 앞에서, 삼켜졌다.

나는 다시 질렀다.

"이서아——!"

사라졌다.

"윤해인——!"

사라졌다.

"여기 사람 있어요——!"

사라졌다.

목이 쉬었다. 기침이 났다. 기침 소리마저 금방 사라졌다.

나는 계단에 드러누웠다.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서 있었다. 새 몇 마리가 하늘 높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날아가던 모양 그대로.

등 밑의 돌계단이 딱딱했다. 헬멧이 뒤통수에 걸려 목이 꺾였다. 턱끈을 풀고 헬멧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해인의 헬멧은 가벼웠다.

아무 데도 닿지 않는 소리. 아무도 듣지 않는 목소리.

그래도 이상하게, 조금 시원했다. 속이.

목이 따가웠다. 침을 삼킬 때마다 걸렸다. 나는 그 따끔함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소리는 사라졌어도 소리를 낸 흔적은 내 목에 남아 있었다.

나는 일어나 자전거에 다시 올랐다. 이번에는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강변을 따라, 목적지 없이. 멈춘 사람들의 자리를 지나. 벤치 위에 놓인 누군가의 도시락, 강아지 목줄이 풀려 늘어진 채 멈춘 산책로, 킥보드 하나가 한 바퀴를 공중에 띄운 채 기울어 있는 자리.

바람은 끝내 불지 않았다.

그래도 두 바퀴는 굴렀다. 내가 밟는 만큼. 딱 그만큼만.

집에 돌아와 자전거를 1층 현관 안에 들여놓았다. 아파트 보관대에 두지 않았다. 내 거니까. 이제는.

벽에 기대 세우고 안장을 한 번 쓸었다. 안장 가죽이 내 체온으로 조금 따뜻했다. 오늘 이 세상에서 나 말고 따뜻해진 건 그것 하나였다.

그날 잠들기 전, 출석부 종이 뒷면에 적었다.

9. — 자전거. 바람 없음. 소리 질러도 사라짐. 한강 둔치, 해인이 넘어진 자리.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 해인아, 나 오늘 자전거 탔어. 당신이 넘어진 데까지 갔어.

아무에게도 보낼 수 없는 문자였다. 그래서 종이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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