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벽에 금이 다섯 개가 되던 날, 냉장고가 비었다.
정확히는 비지 않았다. 반찬 몇 가지와 달걀 네 개, 케첩과 쌈장이 있었다. 하지만 카레는 끝났고 생수도 두 병 남았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둔 채 한참 서 있었다. 냉장고 불빛이 켜진 채로 멈춰 있었다. 모터 소리 없는 냉장고는 그냥 차가운 상자였다.
장을 봐야 했다.
그 말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장을 본다. 이 세상에서. 계산대에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장 보는 건 원래 해인 몫이었다. 해인은 휴대폰에 목록을 적어 갔고, 나는 카트를 밀며 목록에 없는 과자를 몰래 넣었다. 계산대에서 해인은 그걸 꺼내 들고 나를 봤다. 서아가 먹을 거라고 하면 한 번은 봐줬다.
단지 앞 대형마트까지는 걸어서 칠 분이었다.
가는 길에 빈 유모차 하나가 인도에 서 있었다. 바퀴 하나가 보도블록 틈에 걸린 채였다. 안에 작은 담요가 구겨져 있었다. 나는 담요를 펴 주려다 손을 거두었다.
마트 자동문은 반쯤 열린 채 멈춰 있었다. 누군가 막 들어가던 참이었던 것처럼. 나는 그 틈으로 몸을 비틀어 들어갔다. 입구에 카트가 줄지어 서 있었다. 동전을 넣어야 빠지는 카트. 주머니에 백 원짜리가 있었다. 넣었다. 카트가 빠졌다. 백 원이 동전 구멍 안에서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매장 안으로 굴러가다 사라졌다.
매장은 넓었다. 형광등이 전부 켜져 있었다. 진열대마다 물건이 가득했다. 오전 9시 개점 직전이었는지, 진열이 완벽했다. 사과는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고, 우유는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빵은 봉지마다 반듯했다.
매장 안은 서늘했다. 채소 코너 위로 물안개를 뿌리는 분무구가 있었는데, 하얀 안개가 상추 위에 얇게 걸려 있었다. 흩어지지도 가라앉지도 않았다. 손을 넣어 보았다. 젖지 않았다. 빵 코너 앞에서는 구운 빵 냄새가 났다. 코를 진열대에 바짝 대야만.
아무도 없었다. 계산대에도, 시식 코너에도, 정육 코너 유리 너머에도.
나는 카트를 밀고 생수 코너로 갔다. 2리터 생수 여섯 개들이 묶음을 들어 카트에 실었다. 무거웠다. 무게가 반가웠다. 무거운 건 진짜였다.
비닐 손잡이가 손가락 마디를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눌렸다가 천천히 붉어졌다. 그 아픔까지 반가웠다.
한 묶음 더. 또 한 묶음.
그리고 멈췄다.
카트 손잡이를 쥔 손이 이상하게 굳었다. 계산을 안 한 물건을 카트에 담는 게, 몸에 익지 않았다. 서른네 해 동안 물건을 사면 돈을 냈다. 편의점 계산대 위에 오백 원을 올려놓던 첫날의 나처럼. 손가락이 자꾸 지갑을 찾았다.
지갑을 꺼냈다. 현금이 삼만 이천 원 있었다. 카드들. 무용지물이었다. 이 세상에서 돈은 받을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 지갑을 한참 보다가, 도로 넣었다.
지갑을 넣은 주머니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매일 들고 다니던 건데 처음으로 무게가 느껴졌다. 쓸 데가 없어진 물건은 무거웠다.
그리고 사과 하나를 집었다. 진열대 피라미드 맨 위의 것. 새빨간 사과였다. 옷에 문질러 닦고, 그 자리에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
소리가 컸다. 넓은 매장에 사과 씹는 소리가 퍼졌다. 과즙이 턱을 타고 흘렀다. 흘렀다. 내 입에 들어온 사과는 흘렀다.
단맛이 혀에 번졌다. 달았다. 아주 달았다.
과즙이 손목까지 타고 내려와 셔츠 소매를 적셨다. 끈적했다. 닦지 않았다. 사과 향이 코끝에 오래 남았다. 내 손에 들린 것이라서 향도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처음엔 픽, 하고. 그다음엔 소리를 내어. 사과를 든 채로, 텅 빈 대형마트 한가운데서, 과즙을 턱에 묻힌 채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이 날 만큼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는 몰랐다. 이 모든 게, 이 말도 안 되는 게, 그냥 웃겼다.
계산 안 하고 먹는 사과가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웃음이 가라앉자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어깨가 가벼워졌다. 닷새 동안 등에 지고 있던 무언가가 조금 내려간 것 같았다.
좋아.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카트를 밀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바퀴가 매끈한 바닥 위를 굴렀다. 진열대 사이 통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끝까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통로 한가운데로 카트를 똑바로 밀고 갔다. 평소라면 사람을 피해 몇 번은 멈췄을 길이었다.
정육 코너 냉장 진열대에서 한우 등심을 집었다. 평소라면 가격표를 보고 내려놓았을 것이다. 가격표를 보았다. 100그램에 만 이천 원. 한 팩에 육만 원. 나는 두 팩을 담았다.
과일 코너에서 샤인머스캣. 서아가 좋아하는 거였다. 한 송이에 이만 원이라 늘 반 송이짜리를 샀다. 한 송이를 담았다. 아니, 두 송이.
서아는 샤인머스캣을 꼭 반으로 잘라 줘야 먹었다. 통째로 주면 목에 걸릴까 봐 해인이 가위로 하나하나 잘랐다. 서아는 그 반쪽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즙을 짜 먹었다. 식판이 늘 끈적였다.
치즈 코너에서 해인이 좋아하는 브리 치즈. 와인 코너에서 이름도 모르는 비싸 보이는 와인. 과자 코너에서 초콜릿 한 무더기. 라면 코너에서 라면 한 박스. 쌀 코너에서 쌀 10킬로.
쌀은 들어 올리다 카트가 넘어질 뻔했다. 카트가 기울자 와인병이 굴렀다. 나는 몸을 날려 병을 잡았다. 쨍그랑 소리가 날 뻔했다. 나지 않았다. 병을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또 웃었다.
와인병이 가슴에 차갑게 닿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깨질 뻔한 병 하나에 이렇게 놀랄 수 있다는 게 우스웠다. 여기서 뭐가 깨지든 뭐라 할 사람이 없는데.
카트 두 대를 채웠다. 한 대를 밀고 한 대를 끌었다. 계산대 앞을 지났다. 계산대 직원 의자가 비어 있었다. 바코드 스캐너가 까맸다. 나는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습관처럼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세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트 출구를 나오자 햇빛이 쏟아졌다. 영원히 아침인 햇빛. 카트 두 대를 끌고 아파트 단지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인도 턱에 걸리고, 보도블록 틈에 바퀴가 끼었다. 멈춘 차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누가 보면 웃었을 것이다. 서른네 살 먹은 남자가 카트 두 대에 한우와 샤인머스캣과 쌀을 싣고 텅 빈 도로를 헤매는 모습.
아무도 안 봤다. 그래서 내가 대신 웃었다.
카트 바퀴 하나가 자꾸 옆으로 돌았다. 마트 카트는 꼭 하나씩 그랬다. 해인은 그런 카트를 귀신같이 골라 왔고, 나는 늘 투덜대며 밀었다. 덜덜거리는 바퀴 소리가 내 곁에서만 났다. 이 길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문제였다. 12층까지. 생수 묶음 세 개, 쌀 10킬로, 라면 한 박스. 나는 짐을 1층 현관에 부려 놓고, 몇 번에 나눠 올랐다. 네 번째 왕복쯤 10층 계단참에 주저앉았다. 해인이 쉬던 자리였다.
"우리 애는 엘리베이터 고장 나도 안 쉬고 올라가는 튼튼한 애로 키우자."
튼튼한 애의 아빠는 10층에서 쉬었다. 숨을 헐떡이며.
다섯 번째 왕복 끝에 짐이 다 올라왔다. 거실 바닥에 늘어놓으니 제법 그럴듯했다. 전리품 같았다.
쌀 포대를 부엌 구석에 세웠다. 라면 박스는 식탁 밑에 밀어 넣었다. 해인이 늘 두던 자리였다.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자 집이 조금 덜 낯설었다.
그날 저녁 — 저녁이라고 부르기로 한 시간에 — 나는 한우를 구웠다.
가스레인지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프라이팬을 달궜다. 고기를 올리자 치익, 소리가 났다. 기름이 튀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부엌에 가득 찼다. 가득 차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이 없으니까. 냄새는 온 집 안에 고였다.
기름 튀는 소리가 좋았다. 치익, 타닥. 부엌이 오랜만에 부엌 같았다. 나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집으며 한 손을 허리에 올렸다. 해인이 고기를 구울 때 늘 그렇게 섰다. 따라 하고 나서야 그걸 알았다.
나는 고기를 접시에 담고 식탁에 앉았다. 와인 병을 땄다. 코르크 따개가 서랍에 있었다. 해인이 결혼기념일에만 꺼내는 따개였다. 와인을 머그잔에 따랐다. 와인잔은 찬장 맨 위에 있었고 꺼내기 귀찮았다.
한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녹았다. 정말로 녹았다.
기름이 혀 위에서 풀렸다. 씹기도 전에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 그 맛을 붙들고 있었다.
"와."
소리 내어 말했다.
"와, 이거 뭐야."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계속 말했다. 맛있다고. 미쳤다고. 해인이 먹어야 하는데. 서아는 너무 어려서 못 먹겠지만 샤인머스캣은 좋아할 텐데.
샤인머스캣을 한 알 떼어 먹었다. 달았다. 서아가 먹으면 두 손으로 볼을 감싸며 "마시따" 했을 것이다.
나는 서아 의자를 보았다. 내가 닦아 둔 깨끗한 식판.
그 위에 샤인머스캣 세 알을 올려 두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서아가 올 것도 아닌데. 올 리가 없는데.
그래도 올려 두었다. 식판 위에 동그란 초록 알 세 개.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반짝임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손을 뗐으니까. 내 손을 떠난 포도알은 다시 이 세상의 것이 되어, 멈췄다.
나는 머그잔의 와인을 다 마셨다.
그날 밤 — 밤이라고 부르기로 한 시간에 — 나는 조금 취해서 잤다. 필름이 끊기듯이, 뚝.
일어나서 벽에 여섯 번째 금을 그었다.
그리고 식탁을 보았다. 서아 식판 위에 샤인머스캣 세 알이 그대로 있었다. 하나도 줄지 않고, 하나도 시들지 않고.
영원히 싱싱할 포도였다. 영원히 아무도 먹지 않을.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