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서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혹시 저 아세요?”내가 다가가며 바로 물었다.“아니요. 모릅니다.”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엔 평범해 보였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피부는 하얗고 오늘 입은 물빛 티셔츠 덕분에 한층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이었다.“하지만 어제와 오늘 우연히 마주친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나는 그의 말이 거짓말임을 넌지시 지적했다.“정말 모릅니다. 다만 당신이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요.”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아?”그는 내 웃음 속 비꼼을 눈치챘는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진짜라니까요. 사진도 있어요.”그는 말을 마치고 휴대전화를 꺼내 몇 번 터치한 뒤 내게 화면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한참 들여다봤다.사진 속 여자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동그랗게 묶고 있었다. 얼굴은 나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지만 눈가에 있는 눈물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나는 사진 속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정말 닮긴 했네요. 하지만 저는 이 여자를 몰라요.”“그럴 줄 알았습니다.”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데 왜 저를 따라다니는 거죠?”나는 그의 신발에 잠시 시선을 두며 물었다. 그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묘하게 눈에 들어왔다.그는 잠시 침묵했다.그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런 식으로 따라다니면 스토킹으로 간주할 수 있어요. 신고해도 된다고요.”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런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의도가 나쁘지 않더라도 이런 행동은 여자에게 불안하고 무섭게 느끼게 만들 수 있어요. 이해하시겠어요?”내 말투는 마치 직원에게 충고하는 듯 단호했다.“죄송합니다.”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솔직히 특별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요.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은 그냥 없던 걸
산소 기계를 끄면 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그럼 지금은 그녀 곁에 있어야죠. 끝까지 함께 지켜 줘야죠.”“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소지훈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폐를 끼쳐드려서 미안해요.”나는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기적이 있기를 바랄게요.”소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젯밤 그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뭘 봐? 전화도 안 받았고.”진정우가 다가와서 내가 들고 있던 꽃을 받아 들고 물었다.나는 소지훈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어젯밤 그와의 우연한 만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소지훈의 사정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가장 중요한 건 소지훈의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정우 씨, 사람과 혈연관계가 없어도 닮은 사람이 있는 이유가 뭘까?”“사람은 유전자란 걸로 구성되니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유전자가 비슷한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지.”진정우는 아주 공식적인 답을 했다.나는 소지훈이 나를 따라다녔던 이유를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그럼 언젠가 정우 씨는 날 닮은 사람을 보면 나를 찾으려고 할 거야?”“왜 그래야 하는데?”진정우는 날카롭게 물었다.“그냥. 만일의 경우 말이야.”“내 눈에 너는 오직 너 하나뿐이야.”진정우는 그다지 흔들림 없이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다른 생각 안 할게.”진정우는 내 옆에 있던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언제나 너는 오직 너 뿐이야. 나에겐 너밖에 없어.”“하하.”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알겠어. 빨리 가자.”진정우는 꽃을 들고 내 손을 잡았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방금 사진을 봤는데 내 얼굴과 정말 닮은 여자애가 있었어.”내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닮은 정도가 90%는 됐어.”그때는 그냥 얼굴이 비슷하다는 점에 놀랐지만 사진이 내 머릿속에 남고 나서야 닮은 점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지켜본 지 한참 된 것 같았다.그래서 아까 진정우와 내가 나눈 대화도 그들이 다 들었을 것이다.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이렇게 마주쳤으니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었다.진정우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아줌마, 삼촌, 진혁 오빠.”그러자 아줌마가 제일 먼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원아, 정우야, 너희 둘은 여기서 뭐 하고 있어?”나는 진정우를 힐끗 보며 대답했다.“친구를 보러 왔어요.”진소영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진정우가 진소영을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줌마와 삼촌이 진소영이 병원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병문안을 오려고 할지도 모르고 그럼 진소영이 나와 그들의 관계를 물을까 봐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나는 말을 마치고 삼촌을 쳐다보았다. 삼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서 있었고 안색도 안 좋아 보였다. 분명 몸이 편찮으신 것 같았다.“삼촌, 괜찮으세요?”“그냥 혈압이 좀 올라서 그렇지 별일 아니야.”삼촌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줌마가 삼촌을 한 번 쳐다봤다. 삼촌이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삼촌도 뭔가를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처럼 서로 숨기는 게 많아지면서 우리 관계도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예전에는 삼촌이 감기만 걸려도 나한테 먼저 약을 구해달라고 했었는데.“지원아, 너희 여기서 뭔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게 없어?”.“없어요.”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거절했다.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고 진정우가 분위기를 깨며 말했다.“삼촌, 저희랑 같이 가서 진찰받으시죠.”그 말은 정말 좋은 말이었다. 진정우는 항상 사람들에게 그를 고마워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괜찮다니까. 너희는 너희 일 보러 가.”삼촌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고 아줌마도 곧바로 말했다.“지원아, 나중에 시간 되면 삼촌 좀 보러 와.”“네.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나는 진정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우리가 걸음을 떼자 아줌마의 한숨 소리
그러자 내 표정이 잠시 굳었다. 진정우는 진소영의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무슨 호적 조사라도 하냐?”진소영은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나는 진정우를 보며 말했다.“검사는 다 끝났으니까 정우 씨가 소영이를 데리고 가서 뭐라도 먹어. 나는 가서 좀 볼 일이 있어.”“언니... 언니는 어디에 가는 건가요?”진소영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진정우는 내가 뭘 하러 가는지 이미 짐작한 듯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밀어내며 걸어가며 말했다.“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어? 여기 오더니 수다쟁이가 다 됐네.”“지금 안 하면 나중엔 말할 기회 없을 것 같아서요.”진소영의 말에 진정우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나 역시 그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진소영도 수술대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헛소리하지 마.”진정우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진소영은 그의 팔을 붙잡고 함께 걸어갔다. 둘이 멀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나는 발길을 돌려 강삼촌을 찾으러 갔다.“지원아, 어떻게 다시 왔어?”아줌마가 반가운 듯 물었다.“삼촌 상태가 걱정돼서요.”나는 솔직히 말했다.아까 진소영에게 그들이 내 양부모라고 말했던 것처럼 내 마음속에서 그들은 진짜 부모님 같은 존재였다.“괜찮다니까.”삼촌은 오늘따라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가 괜찮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삼촌, 저를 딸처럼 생각하신다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냥 혈압이 좀 높아서 가슴이 답답한 거야.”이번엔 강진혁이 대신 대답했고 아줌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 요 며칠 결혼식 두 번 다녀오면서 술 좀 훔쳐 마셨더니 이러는 거야.”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 강진혁의 표정을 보니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엄마, 여기 계세요. 검사 끝날 때까지 밖에 나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요.”강진혁은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그래
조태혁의 비명과 함께 나는 들고 있던 커피 한 잔을 그의 얼굴에 부어버렸다.조태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에 흘러내리는 커피를 닦으며 소리쳤다.“누나 미쳤어? 무슨 정신 나간 여자야?”나는 빈 커피잔을 들고 그를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음번에 또 날 건드리면 이 잔으로 네 머리를 깨버릴 거야. 그리고 경찰서로 데려가서 차 한 잔 마시게 할 테니까 알아둬.”오늘 조태혁은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커피 자국이 이미 티셔츠를 망쳐놨다. 머리카락도 젖어 커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초라해 보였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건방졌다.“이렇게 하면 내가 겁먹을 것 같아?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나...”그의 뒤로 이어지는 말은 듣지 않고 나는 바로 카페를 나와버렸다.그러자 강진혁이 뒤따라왔다.“저 자식은 누구야?”“조나연의 동생.”나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손에 묻은 커피를 닦으며 말했다.“자주 저렇게 너를 괴롭히는 거야?”“몇 번 그랬어요.”나는 물티슈를 쓰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강진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도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삼촌 이야기를 꺼냈다.“삼촌 병원에 입원하실 거죠?”“이미 입원했어. 병실은 812호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중에 병실로 가서 뵐게요.”“그래. 나는 좀 사러 갈 게 있어서 넌 먼저 할 일 봐.”강진혁은 나에게 먼저 가보라고 했다.나는 걸어 나가다가 문득 진소영이 지난번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커피나 밀크티를 마셔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그런데 마침 조태혁이 강진혁을 따라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그 광경에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강진혁이 나보고 먼저 가라고 했던 이유가 조태혁을 손봐주려는 것이었구나?’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밀크티와 커피를 샀다.병실에 들어가 보니 진소영은 혼자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아까 그녀가
“언니, 그렇게 오빠랑 함께 있고 싶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다. 순간 약간 민망했지만 이어서 나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그래. 네 오빠가 참 좋아!”“이 고약한 꼬맹이야.”나는 일부러 그녀를 째려봤고 그러자 진소영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병실을 나와 복도를 둘러봤지만 진정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소영 말대로라면 아마 조용한 곳에서 전화를 받고 있을 것이다. 잠깐 고민하다가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계단에 가까워지자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때의 정비소는 없어졌지만 정비사들은 아직 있을 거야. 방법을 찾아봐야 해... 물론 필요하지. 지원이한테 정확히 말해야 하고 아버지의 결백도 증명해야 해.”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며칠 동안 사고 당시 브레이크 문제를 다시 조사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진정우가 이미 알아보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가 전화를 끊자마자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또 다른 전화가 울렸다. 나는 다시 멈춰 섰다.문틈으로 보니 진정우가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든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돌아왔어... 응. 같이 왔어... 나랑 지원이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알았어. 올 필요 없어. 들키면 안 되니까... 문제없어. 코드 계속 쓰고 있어.”그의 대화는 회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통화 상대는 아마 허진호일 것이다.그런데 진정우의 말투는 마치 허진호가 부하처럼 느껴졌다.‘진정우... 혹시...’갑자기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나... 또 속은 건가?’하지만 그는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혹시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그가 전화를 끊고 복도로 나왔을 때 우리는 마주쳤다.“여기서 뭐 해?”그가 내 옆에 서서 물었다.“널 찾았는데 못 찾았어.”나는 거짓말했다.“전화 받고 있었어.”진정우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삼촌 쪽은 어떠셔?”“폐암이래.”나는 무겁게 대답했다.폐암이란 병이 가진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예전에 같이 일하던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늘 진소영이 받은 검사들을 떠올리며 물었다.“검사 결과가 안 좋았어?”안리영은 하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아니야. 검사 결과는 괜찮아. 문제는 기증자 쪽에서 생겼어.”“응?”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기증자는 뇌사 상태의 환자였어. 가족들이 기증을 동의했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꿨대.” 안리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이 기증자가 진소영과 이식 조건이 완벽히 맞았던 사람인데 기증을 포기했다면 진소영은 다시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왜 기증을 포기했는지는 알아?”안리영은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몰라. 단지 기증자 정보는 기밀이잖아. 나도 그저 통보만 받았어.”진소영이 새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는 걸 알기에 그녀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실망할지 상상이 됐다. 그리고 아까 진정우를 부르러 갔던 이유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럼 진정우를 찾은 이유도 이 문제 때문이었어?”“아마도 그럴 거야.”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선배가 분명히 다른 방법을 찾을 거야. 다만 수술 일정이 조금 늦어질 뿐이야.”“그렇다면 병원에 계속 있지 말고 퇴원해서 여행이라도 시켜주는 게 좋겠어.”나는 진소영을 위해서 생각을 털어놨다.“네 시누이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안리영이 내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했다.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밀며 미소를 지었다.“근데 너랑 구 교수님은 어떻게 연애 중이야? 어느 정도까지 나갔어?”“나가기는 무슨. 나 야근하고 선배는 또 초과근무 중이라 제대로 볼 시간도 없어.”그녀는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었다.“이러다 연애는커녕 지구가 멸망해야 겨우 데이트라도 할 수 있겠네.”나는 그녀를 놀렸다.“그게 뭐든 할 거야. 지금은 좀 어렵더라도 해결해야지.”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서 네 계획이 뭔데? 설마 의사 그만두고 주부 9단이 되는 건 아니지?”내가 짓궂게 물었다.“말도 안 돼. 난
생리가 시작된 것 같았다.“잠깐만!”나는 안리영을 불러 세웠다.“네가 자꾸 얘기하더니 진짜 왔어. 너희 휴게실에 생리대 있지? 좀 쓸게.”안리영은 주머니에서 휴게실 열쇠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알아서 쓰고 와.”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과로 올라가는데 복도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 뻔뻔한 여자야! 우리 아들이랑 결혼했으면서 다른 남자를 꼬셔서 우리 아들을 죽게 만들다니!”“네가 지금 배에 든 게 우리 아들의 아이라고? 누굴 속이려는 거야?”“우리 아들 보상금 노리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안리영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순간 멈춰 섰다. 이 익숙한 소리 어디서 들었는지 금세 기억났다.비록 지금 당장 생리대가 급하지만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나는 소란이 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이 아이가 당신들 손자라고요! 아이 태어나면 유전자 검사하면 될 거 아니에요!”익숙한 목소리는 조나연이었다.‘그래서 이 장면이 낯설지 않았던 거구나.’“검사한다고 우리가 믿을 줄 알아? 네가 요즘 얼마나 돈 있는 남자들에게 들러붙는지 다 알아. 그따위 검사 결과를 우리가 믿을 것 같아?”“이 여자가 얼마나 뻔뻔한지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아야 해요! 남편을 사고로 몰아넣고, 이제는 우리 아들한테 들러붙어 보상금까지 노리다니!”“하늘이시여! 이 여자를 벌하시고 우리 아들의 원한을 풀어주세요...”아줌마의 울부짖음에 병동이 떠나갈 듯했다. 그때 안리영이 차분히 나섰다.“아줌마, 여긴 병원이에요. 이렇게 소리 지르시면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가 됩니다. 다른 데로 가세요."‘여기서 울고 소리치지 말라니, 그럼 다른 곳에서는 괜찮다는 건가?’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안리영은 조나연을 알아보고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말한 게 분명했다.“의사 선생님, 제가 왜 이러겠어요? 이 여자가 우리 아들과 우리 집안을 망가뜨렸어요.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 하나뿐이었다고요!”아주머니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아
이 한 방은 강진혁을 향한 것이자 강씨 가문의 체면에 날린 일격이었고 동시에 그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역시 용진표였다. 본색을 드러낼 땐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명백히 아들을 대신해 분풀이를 한 것이다.“이 자식아, 네 아버지도 생전에 감히 나한테 아니오라고 하지 못했어. 어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것이냐.”그는 비서에게서 건네받은 실크 손수건으로 사람을 때린 손을 천천히 닦았다.강진혁의 입가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눈동자 밑바닥엔 살기를 담은 분노가 깔려 있었지만 겉으론 억지웃음을 지으며 피 묻은 입가를 닦았다.“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예의도, 규칙도 몰랐습니다.”그 모습은 비굴하기 그지없었다.나는 안다. 그건 그저 잠시 몸을 낮춘 것일 뿐이라는 걸 말이다. 이미 조시언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운 판에 용진표까지 자극했다간 내일 세운 계획은 아예 무산될 것이다.용진표가 오늘 조문이라는 명목으로 이것에 온 것도 결국엔 그를 윽박지르기 위함이었다. 내일은 아마 큰 소동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하지만 내일은 본래 강두식의 발인이 예정되어 있었다.나는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죽어서조차 편히 쉬지 못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어쩌면 이것도 업보인 셈이었다.선과 악은 결국 되돌아오고 하늘은 공평하게 그 누구도 쉽게 용서하시지 않는다.강진혁이 상황을 파악하고 꼬리를 내리자 용진표도 더는 문제 삼지 않고 돌아섰다.강진혁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용진표가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엔 마치 죽여버리겠다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는 참았다. 스스로도 말했듯이 그는 인내에 가장 능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때 김희연이 다가가 그의 입가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려 했으나 그는 조용히 몸을 피했다.“아주머니, 구급상자 좀 가져와 주세요”김희연이 가사도우미에게 말했다.“필요 없어요”강진혁은 단호히 거절했다.김희연이 뭔가를 더 말하려 했
조시언은 강두식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리고 김희연에게 다가가 애도의 뜻을 전했다.그 모습은 마치 그가 정말로 단지 조문하러 온 사람인 듯한 착각이 들게 했지만 조금 전 지하 주차장에서 강진혁과 벌인 격렬한 대치전을 생각하면 그렇지만은 않았다.“엄마.”강유형도 김희연에게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슬이 맺힌 눈으로 고개만 끄덕였다.“옷 갈아입고 아버지 곁을 지켜드리렴.”강유형은 이미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가사도우미의 도움 아래 옷을 갈아입은 그는 김희연의 곁에 나란히 섰다.찾아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이 흩어지는 건 당연했다.강씨 가문은 강유형의 손에서 강진혁에게로 넘어간 뒤 눈에 띄게 힘을 잃었다. 게다가 강진혁이 용씨 가문과 얽히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기류도 감지되었다.이런 때일수록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마지막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것이다.“조시언 씨를 모셔다드려!“조시언이 막 애도를 마친 순간 강진혁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조시언이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내쫓듯 말을 꺼냈다.“괜찮아요, 전 우리 리영이를 기다려야 하거든요.”조시언은 안리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단번에 뜻을 알아채고는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난 지원이와 함께 있을 거야.”나는 당연히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누군가가 김희연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고 안리영도 내 옆에 있겠다고 했으니 조시언은 자연스레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강진혁의 눈빛엔 거슬린다는 기색과 도발적인 분노가 아른거렸지만 이곳은 장례식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럼 조시언 씨는 접견실에서 잠시 쉬시죠.”강진혁의 목소리는 차디차고 딱딱했다.조시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안리영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조용히 자리를 나섰다.하지만 그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문 밖엔 여전히 그의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의미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