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당구를 친다는 거야? 오늘 여긴 연회를 하는 자리야. 당구 대회를 하는 곳이 아니라고. 당구 치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허진호는 총알처럼 빠르게 말하며 브라운의 손목을 꽉 쥐었다.“이거 놓으라고.”순식간에 브라운의 얼굴이 빨개졌고 허진호의 힘 때문에 고통을 느낀 게 분명했다.허진호도 생각보다 꽤 손에 힘이 있는 모양이다.하지만 브라운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내가 가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진정우가 말을 던지면서 검은 정장을 입고 나타났고 그의 시선은 브라운이 내 손을 잡은 곳에 떨어졌다.브라운은 그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정우, 난 그냥 이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당구 한 게임 하자고 했을 뿐이야. 그런데 지원 씨가 내 체면을 전혀 세워주지 않네.”진정우는 내 얼굴을 지나쳐 브라운을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 “왜 지원 씨가 네 체면을 챙겨줘야 하는 거지? 넌 누구야? 누가 너를 데려왔어?”그의 세 가지 차가운 질문이 떨어지자 누군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진정우는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려. 이 자식과 이 자식을 데려온 사람은 오늘 이 연회에서 나가라고.”그러자 브라운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너는 그냥 진씨 가문의 외부에서 온 잡종이야... 나를 쫓아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이번엔 진정우가 말하지 않자 그의 경호원들이 움직이려 했지만 진정우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브라운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비아냥거리며 떠났고 떠나면서 나에게 윙크하며 한마디 덧붙였다.“지원 씨, 이제 게임 한 번 하자. 약속했어.”정말 거만한 놈이었다.“뭐야?”허진호는 욕하며 진정우를 바라보았지만 진정우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저 자리를 떠났다.허진호는 진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손목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붉어졌네요. 저 외국 놈은 정말 여자를 어떻게 대는지도 모르나 봐요.”허진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아파요?”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불어주
“오늘 전하려는 또 다른 기쁜 소식은 바로 진씨 가문과 용씨 가문의 결혼 소식입니다. 진정우는 3개월 후에 용씨 가문의 아가씨 용설아와 결혼할 것입니다.”진정우의 할아버지의 말은 마치 얼음물 한 바가지가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 같았고 나는 순간 온몸이 차가워졌다. 어쩌면 이게 진정우가 나와 헤어지려고 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용설아, 나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용준호의 여동생이며 해외에서 유학 중이었다. 내가 용진표를 조사할 때도 이 정보를 알게 되었고 당시 용설아의 높은 학력에 관심이 갔었고 그녀의 사진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도 정말 예쁘고 박사학위도 가졌으니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여자라고 할 수 있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 발걸음은 너무 빨라서 신은 하이힐이 내 발을 따라오지 못했고 나는 문 앞에서 거의 발목을 삐끗할 뻔했다.사람이 안 풀리면 물 한 모금 마셔도 체한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 것 같았다.발목의 고통을 참으면서 나는 문 앞에 도달해 차를 부르기 위해 손을 들었다. 지금 나는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고 1초라도 더 머무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그때 내 손이 겨우 들려 했을 때 한 대의 차가 내 앞에 멈춰 섰고 창문이 내려가면서 강진혁의 얼굴이 보였다.“내가 데려다줄게.”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강진혁은 내 말을 끊었다.“지원아, 네가 이미 우리 집안 사람들과 다 얘기를 했지만 나랑은 아직 확실히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것 같아서... 오늘이 딱 좋은 기회야.”그의 말이 맞았다. 삼촌이 모든 걸 털어놓은 뒤 나는 강유형과 이야기했고 아줌마와도 얘기를 나눴지만 강진혁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를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강진혁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멀리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었다.나는 마음속으로 슬픔을 눌러가며 말했다.“오빠는 내가
강진혁의 눈빛에 잠시 실망이 스쳤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택시를 불러주고 내 차 문을 열어줬다.그런데 택시가 떠날 때 강진혁의 차는 멀찍이 떨어져서 내 뒤를 따라왔다.“아가씨, 남자 친구랑 싸운 거예요?”택시 기사가 웃으며 물었다.“남자 친구분이 괜찮은 사람이네요. 억지로 차에 태우려 하지 않고 아가씨가 화가 난 걸 알고 그냥 뒤에서 따라오면서 걱정만 하잖아요.”기사 아저씨는 참으로 말이 많았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남자 친구 아니에요.”기사 아저씨는 잠시 놀란 듯 말이 없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그렇게 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차창 너머로 뒤에 보이는 차를 발견했고 강진혁의 차 외에도 한 대가 있었다.그 차는... 진정우의 차 같았다.아까 진정우 할아버지가 발표한 결혼 소식이 귀에 맴돌았다.나는 마음이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아팠고 모든 게 환상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잠시 후에 가슴의 고통이 조금 가라앉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진정우의 차는 여전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이번엔 확실했다. 이건 절대 환상이 아니라 진정우의 차가 맞았다.그는 지금 기쁜 마음으로 축하를 받으며 용씨 가문의 사람들과 결혼식을 준비해야 하는 게 맞잖아? 왜 내 뒤를 이렇게 따라오는 걸까?나는 궁금했지만 그가 직접 운전하는 차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사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기사님. 잠깐만요. 차가 좀 미끄는척 해줄 수 있나요?”“뭐라고요?”기사 아저씨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남자 친구가 정말 나를 걱정하는지 확인해 보려고요.”내가 그렇게 말하자 기사 아저씨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역시 여자들은 정말 하루에도 세 번씩 마음이 바뀌는구나.’사실, 내가 뒤차를 남자 친구라고 부르긴 했지만 진짜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알겠어요. 남을 도와주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잖아요. 아가씨, 잘 잡고 계세요.”기사 아저씨는 흔쾌히 동의하며 가속을 붙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길게 늘어진 가로등 불빛 아래 진정우의 모습은 더욱 커져 보였고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키가 더 커진 것 같았다.그가 내 곁에 서자 내 그림자는 그의 그림자 속에 묻혀 마치 우리가 하나처럼 느껴졌다.그 순간, 내 마음은 다시 씁쓸하고 아려왔다.마음이 아프고 숨 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괴로워졌다.그 고통 속에서 그는 높은 곳에 올라서서 용씨 가문과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내 마음은 더 아파왔다. 결국 나는 고통을 견디며 입을 열었다.“진정우, 나를 불러서 뭐 하려고 그러는 거야?”진정우는 나를 보지 않고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너... 신지태 경기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다음 주에 경기가 있어. 가고 싶으면 내가 항공권 사줄게.”내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경기를 보라는 게 아니라 그냥 나를 떠나라고 하는 것이었다.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내가 여기 있으면 그 좋은 기회를 방해할까 봐 두려운 거겠지?그와 헤어진 이후 나는 그가 날 상처 입히는 방식이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누가 가고 싶다고 했어?”내가 이 말을 할 때 나의 목소리는 마치 기가 빠진 공처럼 약해졌다. 화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가 내 앞에서 내게 흘린 눈물을 본다면 그건 내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마저 잃어버리는 거니까.예전에는 내가 그를 붙잡기 위해서 울었고 그랬을 때 그는 오해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나보고 경기 보러 가라는 건 다른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나보고 자리를 비워달라는 뜻이었다.그는 이제 내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에 내가 울면 그저 내 가치를 떨어뜨릴 뿐이다.“네가 가면 신지태가 반가워할 거야.”진정우는 비꼬듯 말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나는 진정우가 질투하는 걸로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그냥 차가운 조롱처럼 들렸다.나
사랑 때문에 나는 한 번만 비참할 수 있어.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거야.“너는 잊었나 봐. 우리는 원수지간이었지. 그래서 나는 이미 너를 다 잊었어. 너랑 무슨 일도 없을 거야. 네가 누구랑 결혼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아. 방해하지도 않을 거고. 원한다면 결혼 축하 선물이라도 보낼 수 있어.”“그리고 넌 나를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나는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아. 원래 그렇지 않았어. 내가 한번 놓아버리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아. 너랑 나는 몇 달밖에 안 됐잖아. 난 10년이나 함께한 강유형과도 금방 끝낼 수 있는 사람이야.”"그리고 너의 아버지는 내 부모님을 죽인 범인이야. 그 복수는 너한테 묻지 않겠다고 해도 원한은 사라진 게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너랑 다시 사랑할 수 있겠어? 그럴 수 없지. 그러면 나는 매일 밤 악몽을 꾸고 부모님도 날 용서해 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용씨 가문도 내 원수야.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이 일을 잊은 게 아니라 그냥... 그냥...”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할 말은 이미 다 했으니까.이렇게 한 번에 다 말하고 나니 나는 목이 꽉 막혔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우리 사이에 이렇게 많은 원한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내가 네 결혼식에 방해받을까 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복수하려면 다른 방법으로 할 거야. 너의 사랑과 결혼을 깨뜨릴 생각은 없어. 반면에 나는 정말 널 축복해 주고 싶어. 너의 행복을 기원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안 믿겠다면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나는 손을 들어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고 그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그리고 드디어 진정우의 눈 속에서 아픔과 함께 그가 긴장한 듯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내 말에 반응한 걸까? 혹시 내가 진정우를 마음 아프게 한 걸까? 아니면 진정우가 아직 나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걸까?그렇지만 이런 생
“언니도 휴링턴에 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진소영은 예전처럼 밝게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마치 진정우와 관련된 인터넷 정보를 전혀 모르는 듯했지만 나는 그녀가 다 봤다는 걸 알았다. 다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척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다.그녀는 진정우의 동생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개별적인 사람이다. 내가 진정우와의 감정적인 얽힘 때문에 그녀에게 뭐라 할 수는 없다.“날 그냥 언니라고 불러. 어차피...”내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오빠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거니까.”내 말에 진소영의 웃음이 굳어졌고 그 후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언니는 나한테 영원한 언니예요. 나는 언니만 언니라고 부를 거예요. 아무도 못 바꿔요.”비록 그녀의 말이 내 마음의 상처를 모두 치유해 주진 않았지만 그 말은 어쩐지 내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해줬다.진소영은 내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이해하고 있구나 싶었다.“언니, 오빠는 아직도 언니를 사랑해요. 제가 맹세할 수 있어요.”진소영이 갑자기 손을 들어서 맹세하는 시늉을 했다.그 모습을 보니 어젯밤 진정우 앞에서 나도 똑같은 행동을 했던 게 떠올랐다.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그만해. 일단 어떻게 네 오빠가 아직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건지 말해봐.”“언니, 내가 전에 말했던 것 말고도 한 번은 오빠가 술에 취했을 때 난 오빠가 목이 마를까 봐 방에 가서 물을 따라줬어요. 그랬더니 오빠는 언니 인형을 안고 있었고 나를 부르며 언니 이름을 계속 불렀어요. 그때 오빠가 뭔가 말했어요. 언니가 기다리면 일이 끝나면 언니를 데려갈 거라고...”내 마음이 확 쪼여왔다.진정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혹시 진소영이 나를 위로하려고 그런 말을 만든 걸까?“언니, 오늘 이 비행기 티켓도 오빠가 사줬어요.”진소영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그럼 진정우는 내가 이 비행기를 탄다는 걸 알았다는 말이야?”“그건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경기
“언니, 사실 저도 스누커를 좋아해요. 이상한 일이긴 한데 전에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수술 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 맛이나 생각들이 예전과 달라졌어요.”“언니, 이건 내 심장의 주인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장기 이식을 하면 원래 주인의 습관이나 취향을 물려받는다고요.”진소영은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사실 나도 TV에서 이런 걸 본 적은 있지만 의학적으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은 많다고 했다.간 이식만 해도 이전에 매운 걸 못 먹던 사람이 간 이식 후에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그럴 수도 있겠네.”나는 그녀의 가슴을 쳐다보았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어라. 얘기가 왜 이렇게 흘러갔지? 제가 아닌 오빠 이야기하고 있었잖아요. 언니,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오빠는 겉으로는 차갑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언니를 몰래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진소영은 단호하게 말하자 난 방금 본 뉴스가 떠올랐다. 병원에 실려 간 브라운이 생각났고 누군가가 그의 항문에 스누커 공을 넣었다는 사건 말이다.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그냥 그런 식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었을 텐데...설마 날 괴롭힌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그래서 이 일을 처리한 사람이 진정우였던 걸까?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휴대폰으로 허진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어젯밤 그 혼혈 남자 사건은 혹시 진정우가 처리한 거예요?]그러자 몇 초 만에 답이 왔다.[그렇죠. 아니면 또 누구겠어요?]메시지가 보내고 바로 삭제되었지만 나는 이미 보아버렸고 허진호는 다시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원 씨가 직접 진정우한테 물어보는 게 낫겠네요.]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웃음이 나왔고 휴대폰을 껐다.“언니랑 오빠 사이가 어떤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뭐? 그런 일이 있었어?”나는 진정우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사실 우리가 함께한 이 몇 달 동안 진소영을 제외하고는 그가 가족이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처음엔 그가 가족이 형편이 안 좋아서 자존심이 상할까 봐 아예 물어보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마 그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말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그 생각에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어떻게 된 거야? 유괴라도 당했어?”나는 농담처럼 물었다.“유괴보다 더 끔찍했어요. 그냥 납치된 거 같은데... 부모님은 그 얘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진소영이 그때의 일을 말하며 고개를 저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놀랐다.“납치? 그때라면 너희 오빠도 이제 꽤 컸잖아. 어떻게 납치가 되지?”“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부모님이 저 몰래 이런 얘기 하셔서 저도 몰랐어요. 나중에 오빠가 돌아왔고 부모님은 오빠를 군대에 보냈어요.”진소영은 머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언니, 오빠가 군대 간다고 할 때 나는 정말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나는 진정우가 군대에 갔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아마도 그의 부모님은 그를 강하게 키우고 싶었을 것이고 앞으로 어떤 위험에 처하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말이다.“언니, 오빠가 그런 얘기 한 적 없었어요?”진소영이 갑자기 묻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아니, 그런 얘기는 없었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걸 공유하고 싶은 법인데 말이야. 그렇지 않겠어?”진소영은 소지훈을 좋아해서 그 마음을 잘 이해할 것이다.그녀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했다.“오빠는 정말 너무 말이 없어요. 집에 있을 때도 한 해 내내 말 몇 마디 안 했어요.”진소영의 말은 다소 억지스러워서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진소영은 이미 비행기표를 샀고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녀를 배려해서 기내에서 자리를 바꿔주기도 했다.그녀는 비행기에서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