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아!”강진혁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은 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날카로운 가시처럼 느껴졌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온화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어두웠다.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심지어 타인을 짓밟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말해 봐.”그의 말투는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현재 그는 강유형 대신 KS 그룹을 이끌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묻어났다. 역시 사람이 앉는 자리가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까지도 바꿔놓는 법이다.“우리 회사에 있던 직원, 이소희라고 아세요? 제 친구인데 얼마 전에 퇴사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혹시 오빠 인맥을 통해 그녀를 찾아줄 수 있을까요?”“이소희?”그는 내 말을 한 번 되뇌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알았어. 찾아볼게.”“고마워요, 오빠.”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네?”“우리, 만날 수 있을까?”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좋아요. 언제요?”“네가 편한 시간에 맞출게.”그는 언제나 내 의견을 먼저 물었고 내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를 향해 있었고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의 배려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럼 내일 저녁에 봬요.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오랜만에 삼촌이랑 아줌마도 뵙고 싶네요.”내 말에 강진혁이 순간 멈칫했다.“...알겠어. 부모님께도 전해 놓을게.”전화를 끊고 나는 손목의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그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속삭였다.‘정우야,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강씨 집안과 엮이지 말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였
나는 힘없이 웃었다. 허진호가 굳이 전화를 걸어 단순한 안부를 물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분명 내가 제대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작은 방울을 입술에 살짝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정우야, 네 친구가 널 대신해서 내 안부를 챙겨주고 있어.”해가 질 무렵, 나는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진혁을 발견했다.붉게 물든 석양 아래 그의 실루엣이 마치 빛을 두른 것처럼 선명했다.그가 서 있는 모습은 단정하고 부드러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젊은 여자 직원들이 연신 뒤돌아보며 속삭였고 어떤 용기 있는 이는 대놓고 감탄하며 말했다.“오빠, 진짜 잘생겼어요!”그러나 그는 그 모든 시선을 철저히 차단한 채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진혁 오빠, 인기 여전하네요?”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너까지 장난치지 마.”나는 가벼운 농담을 접고 본론으로 넘어갔다.“소희 소식은요? 아직도 못 찾았어요?”“아직이야. 하지만 그녀의 남자 친구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 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조용히 물었다.“뭐가 문제예요?”“그 사람, 빚이 많더라. 사채와 온라인 대출까지 뒤얽혀 있었고 동시에 여러 여자와 교제하고 있었어.”그 말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결국, 그녀가 힘들어했던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배신이었을지도 몰랐다.“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체포됐어.”나는 순간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면회 가능한가요?”“가능하지. 내가 알아볼게.”그는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차 안에 오르자 내 자리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화려한 장미가 아닌, 연보랏빛 라벤더와 안개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꽃다발이었다.나는 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이건...?”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별을 따다 줄 순 없어서 대신 이걸 준비했어.”그의 말은 부드럽고 낭만적이었
강진혁과 함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서자, 강유형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아줌마는 여전히 예전처럼 다정했다. 오랜만에 나를 보자 그녀는 감격한 듯 눈물을 훔쳤다.“이제야 다시 보게 되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삼촌은 소파 옆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몸 상태가 예전보다 더 나빠 보였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기 때문일까?우리 사이의 벽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삼촌, 오랜만이에요.”나는 이미 이들과의 감정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원한을 묻기로 했으니, 그들에게‘빚을 갚으라’는 듯한 태도를 보일 생각은 없었다.삼촌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강유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진혁을 노려보며 말했다.“잠깐 나와봐.”어릴 때부터 감정을 숨기지 않는 강유형의 성격을 알기에,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강진혁과 크게 한바탕 할 기세였다.아줌마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입을 열려다 이내 망설였다.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먼저 묻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지원아, 너랑 진혁이 요즘 많이 가까워졌니?”나는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오빠가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아줌마와 삼촌은 동시에 굳어버렸다. 아줌마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물었다.“그럼... 너도 그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이야?”그녀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예전에는 강유형과 내가 헤어졌을 때조차‘같은 집안사람인데 인연을 이어보면 어떻겠냐’는 식으로 말하더니, 지금은 확실히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아마도 이제는 단순한 집안 문제를 넘어, 그동안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겠지.“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오빠가
“아줌마,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도 배신해요. 강유형은 이미 저한테 신뢰를 잃었어요. 설령 제가 진혁 오빠를 선택하지 않는다 해도, 유형이를 다시 선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의 부모님이 아직도 나와 강유형의 관계를 다시 잇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기대를 확실히 끊어놓을 필요가 있었다.“진혁이도 안 돼.”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삼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 말에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줌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 때부터 이미 부부가 함께 논의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삼촌, 요즘 세상에 연애는 자유로운 거예요. 그리고 아줌마랑 삼촌이 이런 이야기를 진혁 오빠한테도 했어요?”나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러자 삼촌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지원아, 우리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 알아. 네가 우리를 용서한다고 했지만 마음속 깊이 우리를 원망하는 거 아니야? 너한테 잘못한 건 우리니까, 화가 나면 나한테 직접 풀어. 하지만 우리 아들들까지 싸우게 만들지는 마.”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삼촌, 너무 과대 해석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는 누구의 사이도 이간질할 생각 없어요. 그저 제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나는 자신도 서글퍼질 만큼 씁쓸하게 웃었다.“저는 그저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제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집을 갖고 싶어요. 제게도 그런 가족이 있으면 좋겠어요.”“지원아, 만약 네가 정말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아줌마가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게.”아줌마는 다급한 듯이 말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그럼 진혁 오빠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오빠는 절 원하고 있어요. 제 마음속에 아직 진정우가 남아 있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어요.”그 말이 끝나자 거실이 순간 얼어붙었다.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이 굳어졌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참 후, 아줌마는 마치 울고 싶은 듯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강진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와 부모님과 마주했다. 그러자 삼촌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강진혁, 정말 끝까지 이럴 거냐?”강진혁은 부모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제가 기억하는 한, 유형이가 태어난 이후로 내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아버지는 유형이를 감싸고 사랑했지만 저는 점점 배제됐죠. 그가 아기일 때부터 부모님은 항상 유형이와 함께 잤어요. 그때 나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홀로 두려움에 떨었죠. 늘 그렇게 말하셨잖아요.‘유형이는 아직 어리니까.’하지만 저는요? 저도 그보다 겨우 몇 살 많았을 뿐이에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였다고요. 유형이는 부모님의 사랑만 빼앗아 간 게 아니었어요. 제 장난감, 제 옷, 제 모든 것이 하나씩 그에게 넘어갔죠. 심지어 제 물건을 빼앗길 때마다, 아버지는 ‘넌 형이니까 양보해야지’라며 저를 설득했어요. 그렇게 두 분은 늘 ‘형이니까 참아야 한다’고 저를 세뇌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익숙해졌어요.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도, 늘 유형이가 먼저 선택할 기회를 가졌죠. 그리고 그가 가져가 버리면 저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몰래 울 수밖에 없었어요.”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나는 강진혁의 눈동자 속 깊숙이 숨어 있던 억울함과 분노를 보았다.그가 품고 있던 상처는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채, 그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다가 지원이가 우리 집에 왔어요. 나는 지원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하지만 두 분은 ‘지원이는 유형이의 미래 아내’라고 못 박아버렸죠. 나는 또다시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면서도 티 내지도 못하고 조용히 그 감정을 숨겨야 했어요.”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사랑이 비록 뒤틀렸을지언정,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간직된 감정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나중에 부모님은 유형이에게 회사를 맡겼죠. 그러면서 저에게는 온갖 이유를 대며 칭찬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아줌마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녀는 끝까지 이 거액을 내 손에 넘겨주기가 아까운 것이다.그동안 아줌마가 정말 나에게 잘해준 덕분에, 나는 한때 그녀를 용서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호의는 오직 그녀 자신이 손해 보지 않는 한에서만 존재했다는 것을.그녀는 한때 나를 그렇게 아끼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나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겼다. 예전에는‘내가 며느리가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딸처럼 여길 거야’라며 나를 감싸줬다.나는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라 믿었지만 지금에서야 알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것은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재산이었다는 것을.나는 냉정하게 말했다.“아줌마, 이건 원래 제 거예요. 이 돈은 원래 제 부모님의 것이었고 당신들이 빼앗은 거죠.”그녀는 당황한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지원아,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믿을 필요도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던 순간 강유형이 내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나는 그를 차갑게 올려다보며 물었다.“너도 이 돈이 아까워서 날 붙잡는 거야?”나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덧붙였다.“강유형, 내가 가져가는 이 돈은 너희 집안 전체를 생각하면 티끌만도 못해. 하지만 이 돈이 있었기에 지금의 KS그룹이 존재하는 거야.”그는 눈을 좁히며 날카롭게 말했다.“내가 이깟 돈에 연연할 것 같아?”그는 내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쥔 채, 강진혁을 노려보았다.“형, 잘 봐. 윤지원은 내 여자야.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래도 내 전 여자 친구야. 형이 누구를 만나도 상관없지만 지원이는 안 돼.”강유형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지만 강진혁은 한결같이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네가 허락한다고 결정되는 일이 아니야.”강진혁이 태연하게 받아넘기자, 강유형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형, 아직도 형제 사이를 생각한다면 윤지원과 엮이지
진정우는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누군가가 죽어가는 걸 보고도 방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설령 그가 나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관심하게 외면할 사람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날 내가 그렇게 애원했는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려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나는 한 달 동안 그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그날의 모든 장면을 수도 없이 떠올렸다.하지만 진정우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결국 문제는 강유형에게 있는 게 아닐까?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너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나는 그의 팔을 바라보았더니 악어에게 물린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었다.“정우가 널 구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을 거야.”나는 단호하게 말했다.“넌 지금 대체 뭘 의심하는 거지?”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난 그냥 궁금할 뿐이야. 다 같이 헤르나와 브라운을 상대하려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왜 정우는 널 돕지 않았을까?”내 말에 강유형의 표정이 굳어졌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낮게 중얼거렸다.“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제 진정우에게 물어볼 수도 없잖아.”나는 이미 그가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강유형 역시 답을 모를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진정우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설마, 단순히 강씨 가문을 증오해서 자기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강유형을 버린 걸까?“...지원아, 네가 우리 집안을 증오하는 건 이해해. 그리고 네가 원하는 걸 가져가도 좋아. 하지만 제발, 강진혁은 건드리지 마.”그는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왜? 네가 보기 안 좋을까 봐? 아니면 자존심 상할까 봐?”“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원아, 방금 들었지? 형이 널 향한 감정이 전부
나는 입학 통지서를 들고 진소영을 찾아갔다.그녀는 한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고 내가 도착했을 때는 아이들과 신나게 놀이를 하고 있었다.활짝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내가 다시 그녀에게 학업을 권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순간 망설여졌다.“언니! 내가 이번 주말에 언니 안 찾아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아이들을 달래고 온 진소영은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아이들 돌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지?”나는 그녀에게 티슈를 건네며 물었다.“응, 그래도 나는 정말 좋아.”진소영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환하게 웃었다.“이제는 이 심장이 완전히 내 것 같아요. 더없이 건강해!”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그 심장, 그 심장을 주고 간 건... 나는 자연스럽게 소지훈과 유희연 그리고 그의 애매한 감정을 떠올렸다.“소영아, 너랑 지훈이랑 잘 되고 있어?”나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그녀는 순간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그냥...그대로야.”“소영아, 지금은 네가 지훈이를 좋게 보지만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면 지금의 감정이 변할 수도 있어.”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설득해 보고 싶었다.소지훈이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가 오로지 그녀의 심장 때문이라면 진실을 알게 된 후 진소영이 감당해야 할 상처가 너무 클 것이 뻔했다.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아니, 언니. 난 지훈 오빠를 단순히 그의 외모나 지식 때문이 아니라...”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처음 봤을 때부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졌어. 그냥...자연스럽게 끌렸어.”나는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소지훈과 처음 만난 건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이후였다.그렇다면 소영이가 느끼는 감정이 정말로 그녀 자신의 감정일까?아니면 그녀의 몸속에서 뛰고 있는 그 심장이 만들어낸 감정일까?이런 생각은 너무 비현실적이었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