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인즉슨 아내를 데리고 오라는 뜻이었다.조시언은 그 말에 바로 반박했다.“방금 여자를 데리고 같이 세배했잖아.”조시언은 일부러 안리영을 언급하면서 얘기했다.안리영은 약간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조수민이 원하는 건 아무 여자가 아니라 조시언의 아내인데 말이다.“수민이 말은, 내년 설에는 지은이랑 결혼하고 오라는 뜻이야.”할머니는 눈가의 눈물을 닦으면서 똑똑하게 얘기했다.안리영은 한지은이 조시언의 별장에서 곧 같이 동거할 거라는 것을 떠올렸다.어쩌면 두 사람의 결혼은 멀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네. 내년에 꼭 결혼할게요.”조시언이 긍정의 답변을 내놓았다.안리영은 그 대답을 듣고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조시언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용돈, 받아야지?”안리영은 선 자리에서 손을 내밀었다.“줘.”“세배해야지. 세배도 하지 않고 용돈을 달라는 거야?”조수민이 옆에서 장난스레 얘기했다.안리영은 조시언을 보고 또 바닥의 그릇을 쳐다보다가 용돈을 포기하려고 했다.어릴 때는 장난스레 조시언 앞에서 세배를 하면서 용돈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 나이를 먹고 나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그럼 됐어. 안 받아.”안리영이 손을 거두었다.조시언이 돈봉투를 꺼내면서 건네주었다.“새해 복 많이 받아.”안리영이 거절하려고 할 때 조시언이 얘기했다.“아주 두꺼운 봉투니까.”“얼마나 넣었길래 그래. 너무 많이 주지 마. 애한테 돈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조수민이 얘기했다.“두 사람의 일에 끼지 마.”옆에서 할머니가 조수민을 말렸다.안리영은 그래도 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 조시언이 안리영의 손을 잡고 봉투를 손에 쥐여주었다.조시언의 손바닥은 아주 부드럽고 따뜻했다. 안리영은 심장을 잡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손을 빼내고 싶었지만 조시언은 힘을 주고 풀어주지 않았다. 안리영은 본인의 감정을 들킬까 봐 아무 말이나 했다.“생각보다 가벼운데, 5만 원밖에 안 넣은 건 아니겠죠?”“세배도 안 한 주제에 5만 원이면 감지덕지인 줄 알아.
설에 가장 즐거운 것은 세배 시간이다.조수민이 가장 먼저 안리영과 안리영 아버지를 끌고 나와 두 어르신 앞에서 세배를 했다.두 어르신은 바로 세뱃돈을 건네주었다. 아무리 어른이라고 해도 조씨 가문에서는 세배만 하면 세뱃돈은 받을 수 있었다.돈이 모자란 나이는 아니지만, 조수민 부부는 세뱃돈을 받고 아이처럼 기뻐했다.그다음은 바로 조시언이었다. 안리영은 조시언이 어디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해외에서 명절을 보냈으니까 말이다.조시언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세배를 올렸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동작이었지만 조시언의 분위기 때문인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마치 왕자가 즉위 의식을 앞두고 한쪽 무릎을 꿇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안리영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삼촌 세배는 불합격이야.”안리영의 말에 모든 사람이 안리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수민이 가장 먼저 안리영을 쏘아보면서 장난 그만하라는 시선을 보냈다.“이마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야지. 근데 우리 집 바닥은 너무 단단하니까, 내가 도와줄게.”그렇게 웃으면서 말을 마친 안리영은 주방으로 가서 그릇 하나를 가져왔다.안리영이 그릇을 바닥에 놓으려는데 조수민이 안리영을 붙잡고 당장이라도 때릴듯한 기세로 얘기했다.“너 이젠 어른이야. 이런 거로 장난칠 나이 아니라고! 얼른 되돌려놔.”“아직 아이지. 시언이랑 같아. 어릴 때 두 사람은 이렇게 세배를 했잖아. 그럼 리영이가 하라는 대로 해.”할머니는 안리영의 생각이 마음에 든 듯 얘기했다.“그래, 너희 어릴 때 추억도 생각나고, 좋네. 두 사람이 같이 세배를 올리면 되겠어.”평소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안리영의 아버지도 나서서 얘기했다.그러면서 안리영 아버지는 주방으로 가 그릇 하나를 가져와 안리영 옆에 놓고 안리영의 어깨를 꾹 눌렀다.“세배 잘하면 삼촌보다 세뱃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야.”이런 분위기가 되자 안리영은 어쩔 수 없이 세배를 해야했다. 안리영은 입술을 비죽거리면서
진정우는 종이를 깔아주었고 나는 먹을 갈았다. 진정우는 또 옆에서 카메라를 세팅하고 내 영상을 찍어주었다.“뭐라고 쓸까?”눈앞의 종이를 보면서, 내가 진정우에게 물었다.“네가 쓰고 싶은 것으로 써. 아무거나.”진정우는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것처럼 얘기했다.나는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머릿속에 한 구절이 떠올랐다.[너와 내가 함께라면 언제나 따뜻한 이곳.][같이 맞는 봄.]글을 다 쓴 뒤 진정우를 쳐다보자 진정우는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진정우를 향해 얘기했다.“웃지 마.”“아니, 너무 잘 써서 그래. 우리 아내한테 시인의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네.”그렇게 얘기하면서 진정우는 내 손에서 붓을 가져갔다.“붓글씨도 이렇게 잘 쓸 줄은 몰랐어.”그 말에 나는 바로 부모님을 떠올렸다. 두 분이 살아계실 때, 나는 여러 학원에 다니면서 재능을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우씨 가문으로 온 뒤, 부모님은 여전히 더 배우고 싶냐고 물었었다.그때의 나는 빌붙어 사는 입장이라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대다수 학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포기하곤 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배움은 무시할 수 없었다.그래서 지금 붓을 다시 들어도 예전의 감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서예가처럼 멋지게 쓸 수는 없었지만 봐줄 만했다.진정우는 나를 자리에 앉히고 카메라를 보여주었다.카메라 속에는 카페를 꾸민 과정이 영상으로 담겨 있었다.“아쉬워할까 봐.”진정우는 역시 나를 너무 잘 알았다.종이가 마르자 나와 진정우는 문에 붙일 준비를 했다. 카페 안의 손님들은 배가 나온 내가 일하는 게 신경 쓰인 것인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우려고 했다.나와 진정우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손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어 더욱 재미있고 빠르게 끝났다.그중 한 여자아이는 종이로 꽃을 접을 수 있다고 했다. 진정우가 가위를 가져다주자 여자아이는 바로 종이꽃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작은 손으로 또 나와 진정우의 모습까지 만들어주었다.나는 너무 기뻐서 입
나와 진정우는 카페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자 명절 분위기가 흠씬 느껴졌다. 카페의 대문과 마당에는 무드등이 가득 늘어져 있었다.“거의 다 준비해 두긴 했지만 다 끝내지는 않았어, 아무래도 이곳의 주인은 당신이니까.”진정우가 나를 보면서 얘기했다.배가 불러왔으니 직접 이걸 다 꾸미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기는 아쉬운 나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것이다.진정우는 정말 점점 좋은 남편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진정우는 나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명절이지만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것도 거의 다 혼자 온 손님이었다.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멍을 때리거나, 책을 보거나,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가족끼리 모이는 명절에 카페로 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왜 이곳으로 도망 온 것인지 알 것만 같았다.“손님들한테 디저트 하나씩 내어드려.”내가 진정우에게 얘기했다.진정우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에서 디저트를 가져와 손님들에게 나눠드렸다.그리고 내 몫도 가져와서 얘기했다.“일단 먹고 있어. 이따가 일하게.”나는 마당을 둘러보며 아늑한 분위기를 만끽했다. 테이블 위에 새로운 화분도 생겨서 더욱 싱싱해 보였다.“당신이 다 준비했잖아. 내가 할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나는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진정우를 향해 얘기했다.그러자 진정우가 웃었다.“당연히 있지. 우리는 그저 당신이 손 대기 힘든 곳을 꾸몄을 뿐이야.”진정우의 말이 맞았다.나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진정우의 부축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가게를 지키던 직원이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사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너도. 얼른 정리하고 집에 돌아가.”나랑 진정우가 있으니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었다.직원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사장님.”“이건 보너스.”나는 진정우 손에서 돈봉투를 가져와 직원에게 건네주었다.직원은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사장님. 번창하세요!”직원이 떠나간 후
명절마다 선물을 챙겨주는 상사라니, 나였어도 받들어 모실 것이다.“우리는 일단 집에서 명절을 보낼 생각이에요. 상황을 지켜보다가 다시 오려고요.”진정우도 조시언에게 얘기했다. 조시언은 나와 진정우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새해 인사를 주고받았다.조시언의 차량이 병원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진정우가 나를 보면서 물었다.“왜 웃어?”“선물을 나눠준다는 걸 보니까 곧 안리영이랑 만날 거 같아서.”그러다가 내가 물었다.“정우 씨, 조시언 씨가 이 병원에 잘해주는 거, 설마 리영이 때문일까?”“잘 모르겠는데?”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진정우를 쳐다보았다.“정말 모르겠어요?”진정우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다른 사람들은 임신하면 멍청해진다더니, 우리 지원이는 총명해지는 것 같네.”내 예상이 맞았다.조시언이 나타나기 전까지, 안리영은 다른 의사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안리영의 옆에는 심장외과의 젊은 남자 교수가 앉아 있었는데 짙은 얼굴선이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은 재미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원장이 나서서 얘기했다.“다들 조운 그룹의 조시언 회장님을 열렬한 박수로 맞아주시길 바랍니다.”안리영은 그대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고개를 들어 조시언의 시선을 마주한 안리영은, 조시언의 눈동자에서 불쾌함을 읽어냈다.‘누가 또 조시언을 건드린 거야.’그리고 또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할 일이 없으면 부모님이나 챙겨드릴 것이지, 왜 내 직장까지 찾아온 거람.’안리영 옆의 남자 교수가 안리영을 툭 쳤다.“박수 쳐요.”회의실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안리영을 제외하고 말이다.안리영이 박수 치려고 했을 때, 조시언이 얘기했다.“환영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돼요. 여러분이 그동안 얼마나 수고했는지 잘 아니까요. 그러니 힘을 아껴 써야죠.”조시언의 말에 다른 교수들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남자 교수는 안리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아청소년과에서 온 간호사야. VIP 병실 담당이지.”나는 안리영의 설명을 듣고 바로 이해했다.“지원아, 네가 그 남자한테 빠진 후로 자주 오지 않았잖아. 그 사이에 의사랑 간호사 인사 변동이 있었어. 그래서 네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안리영의 말이 맞았다. 세상은 매일 변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내가 카페 사장이 된 것처럼 말이다.출산일이 아직 멀었지만 진정우는 긴장해서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음력설 전날까지도 내 배는 미동도 없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정우 씨, 나 돌아가고 싶어. 카페에서 맞는 첫 음력설이잖아.”나는 음력설을 카페에서 보내고 싶었다.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사방에 예쁜 무드등을 켜놓고 창에 예쁜 스티커를 붙여두고 맛있는 과일을 준비해서 다과회를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안리영 씨한테 물어봐. 의사의 동의가 있어야 하잖아.”진정우는 긴장한 말투로 얘기했다. 하지만 내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기회를 놓치면 언제 올지 모르니까 말이다.안리영은 간단하게 검사를 해주고 얘기했다.“아직 출산 정황은 보이지 않아. 하지만 출산은 예정대로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여기서 멀쩡해도 집에 가면 다를 수 있어.”나는 그렇게 말하는 안리영을 보면서 장난스레 안리영을 툭 쳤다.“음력설 이후에 낳을 거라고 빈말이라도 해주지.”안리영은 피식 웃었다.“그게 내가 정할 수 있는 거야? 네 뱃속의 아이한테 물어봐야지. 그렇지, 아가야?”안리영은 내 배를 어루만지면서 얘기했다.안리영의 동의를 받은 나는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퇴원할 때, 안리영이 진정우에게 얘기했다.“무슨 일 일어나면 얼른 얘기해요.”진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돈봉투를 꺼내주면서 얘기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요.”안리영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얘기했다.“병원에서 이런 거 받는 거 위법이에요.”“새해 인사예요. 어차피 우리는 가족 같은 사이잖아요.”진정우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