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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이미 아는 미래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06:52:15

물류 데이터 전면 공개를 결정한 그날 오후, 제이는 곧바로 임시 기자간담회를 소집했다.

회의실 안,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시범 사업 초기부터 사고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제이는 흔들림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공개된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문제로 지적된 건들은 신규 시스템 도입 초기에 흔히 발생하는 경미한 배송 지연이었습니다. 실제 손실이나 소비자 피해로 이어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그래도 검증되지 않은 사업에 회사의 명운을 걸고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한 기자의 질문에 제이는 잠시 여유롭게 웃었다.

"검증되지 않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흔들림 없는 확신이 실렸다.

"신선식품 콜드체인과 실시간 배송 시스템은, 조만간 이 업계의 표준이 될 겁니다.

지금은 낯설고 도전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몇 년 안에는 이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은 유통사가 오히려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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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91. 잦아든 폭풍

    아침 일찍, 사장실로 공문 하나가 도착했다.밤새 뒤척였던 탓인지, 제이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부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창밖으로 아직 옅은 새벽빛이 남아 있었다."사장님, 박진철 실장님 명의로 총회 안건 철회 공문이 왔습니다."비서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제이는 서둘러 문서를 확인했다. 짧고 간결한 문장이었다.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철회하며, 이사회 구성 변경 및 경영진 재신임 안건 역시 전면 철회한다는 내용이었다."드디어……."제이는 문서를 내려놓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며칠 동안 그녀를 짓누르던 무게가, 그제야 조금씩 풀리는 듯 느껴졌다.준호가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표정에도 옅은 안도가 서려 있었다."방금 확인했습니다."그가 낮게 말했다."정지훈 씨가 어젯밤 늦게, 실장님을 직접 찾아가 뵀다고 하더군요.""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아직 못 들었어요."제이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결과만 봐도, 어떤 대화였을지 짐작은 가네요.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얼굴이셨을 텐데."준호가 그녀의 옆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이, 며칠 만에 처음으로 평온하게 느껴졌다.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공기가, 이제야 비로소 느슨해진 듯했다."실장님이 스스로 물러서실 줄은, 솔직히 예상 못 했습니다.""저도요."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끝까지 밀어붙이실 줄 알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멈추셨다는 게, 오히려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 보게 만드네요.사십 년을 원망으로만 버텨온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 못했을 거예요."오후, 정지훈이 사장실을 찾아왔다.그의 얼굴에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눈빛만은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손에는 낡은 봉투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려 있었다."두 분께 감사드립니다."그가 자리에 앉으며 낮게 입을 열었다."제가 부탁드린 걸, 끝까지 도와주셨으니까요.""저희가 도운 게 아니라, 스스로 해내신 거예요."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90. 접어야 할 카드

    박진철의 서재, 늦은 밤.정지훈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박진철은 이미 낡은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여전히 그 낡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서재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벽면을 채운 오래된 책들과 빛바랜 액자들 사이로, 스탠드 조명 하나만이 노랗게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창밖에서는 초겨울 바람이 낮게 울고 있었다.박진철의 손에는 아직 온기가 남은 찻잔이 들려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마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정지훈이 앉을 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서재를 울렸다."기자들, 이미 부르셨습니까."정지훈이 먼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아니."박진철이 낮게 답했다."네 전화를 받고, 잠시 미뤘다."정지훈은 그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소파의 낡은 가죽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그는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여기까지 오는 내내, 그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수십 번을 고쳐 생각했다.원망을 앞세울지, 애원을 앞세울지조차 정하지 못한 채였다.하지만 막상 박진철의 지친 얼굴을 마주하자, 준비해온 모든 말들이 한순간에 흩어져버렸다."실장님."그가 낮게 입을 열었다."제가 여기 온 건, 막으러 온 게 아닙니다. 부탁드리러 온 겁니다."박진철의 눈빛이 흔들렸다."제 이야기를, 실장님의 방식으로 세상에 꺼내지 말아 주십시오."정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제 어머니의 이름이, 이렇게 이용당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걸,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어머니는 평생 조용히 살고 싶어 하셨어요. 그 삶을, 실장님의 싸움을 위한 도구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박진철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그의 시선이 낡은 봉투 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그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천천히 움켜쥐어졌다가, 다시 힘없이 풀렸다."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89. 마지막 카드

    박진철의 사무실, 늦은 밤.책상 위에 놓인 지분 현황표에는, 붉은 표시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그동안 공들여 확보해온 중립 지분들이, 제이의 간담회 이후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창밖으로 도심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사무실 안은 적막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오랫동안 그 표를 응시했다.사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판이 불리하게 돌아간 적은 없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늙고, 지치고, 궁지에 몰린 얼굴이었다.결국 그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봉투를 다시 꺼냈다.정지훈의 신원을 증명할 서류가 담긴 바로 그 봉투였다.손끝으로 봉투의 낡은 질감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그는 오랫동안 망설였다.지훈이 도와주지 않겠다면.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내 손으로 직접 세상에 알리는 수밖에.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배신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신념이라고. 하지만 그 말을 되뇌는 순간에도,마음 한구석에서는 이상하게 씁쓸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그는 몇몇 신뢰할 만한 기자들에게 은밀히 연락을 취했다.정 회장가의 숨겨진 핏줄, 그리고 사십 년 전의 스캔들. 이보다 더 확실하게 판을 뒤집을 카드는 없었다.같은 시각, 정지훈의 호텔 방.그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각의 전화벨은 언제나 불길한 예감을 먼저 몰고 왔다."박 실장님이 곧 기자들에게 당신 이야기를 터뜨리실 것 같습니다."준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정지훈은 순간 숨이 막혔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미세하게 떨렸다."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실장님이 지분 확보에서 밀리고 계세요. 궁지에 몰리시니까, 결국 당신을 명분으로 쓰기로 결심하신 것 같습니다."정지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사십 년 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존재가,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건 결코 그가 원하던 그림이 아니었다.어머니의 이름이, 사업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88. 이미 아는 미래

    물류 데이터 전면 공개를 결정한 그날 오후, 제이는 곧바로 임시 기자간담회를 소집했다.회의실 안,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로웠다."시범 사업 초기부터 사고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제이는 흔들림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공개된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문제로 지적된 건들은 신규 시스템 도입 초기에 흔히 발생하는 경미한 배송 지연이었습니다. 실제 손실이나 소비자 피해로 이어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그래도 검증되지 않은 사업에 회사의 명운을 걸고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한 기자의 질문에 제이는 잠시 여유롭게 웃었다."검증되지 않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그녀의 목소리에 흔들림 없는 확신이 실렸다."신선식품 콜드체인과 실시간 배송 시스템은, 조만간 이 업계의 표준이 될 겁니다.지금은 낯설고 도전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몇 년 안에는 이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은 유통사가 오히려 도태될 겁니다."회의실 안에 잠시 술렁임이 일었다."그렇게 확신하시는 근거가 있습니까?"제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하게 답했다."근거는 이미 시장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은 점점 더 빠르고, 더 신선한 것을 원합니다.그 흐름은 되돌릴 수 없어요. 저는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먼저 그 방향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그녀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회귀 전, 이미 그 미래를 두 눈으로 지켜봤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이었다.스마트폰 몇 번의 터치로 새벽마다 신선한 식재료가 문 앞에 도착하던 세상.그녀에게는 이미 지나간 미래였고, 실패할 수 없는 확신이었다.간담회가 끝난 뒤, 준호가 낮게 물었다."오늘 발언, 너무 과감했던 거 아닙니까? 근거를 더 구체적으로 요구받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었어요."제이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저는 확신이 있어요, 준호 씨. 이건 도박이 아니에요."준호는 그녀의 눈빛에서 단순한 자신감 이상의 무언가를 느꼈다. 마치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87화. 흔들리는 표심

    박진철은 총회 안건을 확정한 뒤로, 곧바로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정지훈을 잃은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그는 오랜 인맥을 총동원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중립 지분 주주들을 하나씩 접촉하기 시작했다."현 사장이 아무리 유능해 보여도, 결국 스물다섯짜리 애송이입니다."그는 한 원로 주주와의 자리에서 낮게 읊조렸다."신선식품 사업이라는 것도, 검증 안 된 도박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회사의 미래를 그런 모험에 맡기시겠습니까."그의 말은 교묘했다. 사실과 왜곡을 절묘하게 섞어, 듣는 사람이 스스로 의심을 키우게 만드는 화법이었다.같은 시각, 제이의 사장실."박 실장님이 개별적으로 주주들을 만나고 계신 것 같아요."제이가 보고를 받으며 미간을 좁혔다."신선식품 사업 자체를 흔드는 방향으로 여론을 만드시는 것 같은데."준호가 서류를 넘기며 답했다."저희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실적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어요.""마침 좋은 소식이 있어요."제이가 태블릿 화면을 그에게 돌려 보였다."콜드체인 시범 물류망, 이번 주부터 정식 가동에 들어갔어요.초기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좋아요. 배송 지연율이 기존 대비 삼십 퍼센트 이상 개선됐고요."준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이 수치라면, 중립 주주들 설득하는 데 확실한 무기가 되겠습니다."두 사람은 곧바로 실적 자료를 정리해,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한 주주들에게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며칠 동안, 준호와 제이는 하루도 쉬지 못한 채 여러 주주들을 만나러 다녔다.어떤 자리에서는 냉담한 반응을 마주하기도 했고, 또 어떤 자리에서는 이미 박진철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쉽지 않네요."늦은 밤, 차 안에서 제이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실장님이 사십 년 동안 쌓아온 인맥이,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어요."준호가 운전대를 잡은 채 낮게 답했다."그래도 조금씩 저희 쪽으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오늘 만난 세 분 중 두 분은,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86. 멈출 수 없는 걸음

    박진철은 서재에 홀로 앉아, 정지훈이 다녀간 자리를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다.찻잔은 이미 식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낡은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고 있었다.'주주총회,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이건 부탁입니다.'정지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십 년 가까이 키워온 아이의 부탁이었다.그 말 한마디에, 그동안 단단하게 세워온 신념이 하루 사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하지만 박진철은 곧 고개를 저었다."이제 와서 멈추면……."그가 낮게 중얼거렸다."그 사십 년이 전부 헛것이 되는 거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한쪽의 낡은 액자를 바라보았다.회사가 처음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되던 시절, 셋이서 함께 찍었던 빛바랜 사진이었다.젊은 정 회장과, 젊은 자신, 그리고 그 옆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조희진."희진아."그가 사진 속 얼굴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내가 지금이라도 멈추면,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럴 순 없다."그는 휴대폰을 들어 법무팀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예정대로 진행한다. 총회 안건, 변경 없다."전화를 끊은 그의 눈빛은 다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흔들렸던 것도 잠시, 그는 다시 사십 년 동안 걸어온 그 길 위에 스스로를 세워놓았다.같은 시각, 제이의 사장실."박 실장님 쪽에서 총회 안건에 변경이 없다는 공문이 왔습니다."비서의 보고에 제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예상은 했지만, 정지훈 씨 부탁도 소용없었나 보네요."준호가 서류철을 넘기며 말했다."법무팀에서 확인한 결과, 삼촌 지분 이전 건의 절차적 하자는 확실합니다.관리 권한과 소유권 이전은 별개의 사안인데, 그 경계를 명백히 넘으셨어요.""그럼 총회 당일, 그 부분을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면 되겠네요."제이가 서류에 표시를 남기며 답했다."동시에 우호 지분 확보도 계속 진행해야 해요. 법리로만 밀어붙이기엔, 표 대결에서 지면 아무 소용 없으니까요.""이미 절반 가까이는 확보했습니다."준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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