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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죽은 여자의 기억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31 19:43:57

“안에 이상은 없는가?”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최 상궁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침상에 누운 채원에게 향했다. 붉게 부어오른 목은 이불로 가려져 있었고, 조금 전 천장에서 풀어낸 비단끈은 침상 아래 숨겨진 상태였다.

잠시 침묵하던 최 상궁이 문밖을 향해 대답했다.

“마마께서는 별다른 이상이 없으십니다.”

“알겠습니다. 조금 전 발견된 수상한 자는 담을 넘어 달아났습니다. 처소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남자의 발소리가 이내 멀어졌다.

채원은 아무 말 없이 그 소리를 들었다. 수상한 자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마마.”

최 상궁이 침상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 하신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으니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젊은 궁녀도 불안한 얼굴로 다가와 채원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채원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얼굴과 처음 보는 방, 낯선 몸까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부터 털어놓는 게 안전한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갈라진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최 상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박 의녀가 왔습니다.”

최 상궁이 직접 문을 열어 들인 사람은 약상자를 든 나이 지긋한 여인이었다.

박 의녀는 침상 앞에 앉아 채원의 손목을 짚었다. 한동안 말없이 맥을 살피던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

“맥이 몹시 약합니다.”

“목부터 보게.”

이불이 내려가면서 붉게 부어오른 목이 드러났다.

박 의녀는 상처를 살피기 위해 몸을 가까이했다. 손끝이 목에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쏴아―.

갑자기 귓가에서 빗소리가 터졌다.

채원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눈앞에는 비에 젖은 돌바닥과 그 위에 놓인 두 손이 보였다.

무릎이 아팠다.

오래 꿇고 있었는지 감각조차 희미했다.

―중전마마를 뵙게 해주십시오.

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입술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역모를 꾸밀 분이 아닙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살펴주십시오.

누군가를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다.

억울하다고, 잘못된 일이라고,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은데 목에서는 애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풍경이 갑자기 흔들렸다.

이번에는 방 안이었다.

눈앞의 젊은 궁녀가 울고 있었다.

―마마…….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면서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조여왔다.

―말해.

자신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젊은 궁녀가 끝내 눈물을 떨어뜨렸다.

―대감마님과 두 아드님께서…… 오늘 참형을 당하셨습니다.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분명히 알겠는데 머릿속에서 뜻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두 오라버니.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풍경이 다시 바뀌었다.

닫힌 문이 보였다.

한참 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누군가 올 것 같았다.

아니.

와야 했다.

지금이라도 저 문이 열리고 그 사람이 들어온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순간 기억이 끊겼다.

“마마!”

누군가 채원의 팔을 붙잡았다.

채원은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천장의 들보와 창호문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서는 젊은 궁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마마!”

채원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조금 전의 감정만은 끔찍할 정도로 생생했다.

억울함과 절망.

그리고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기다리던 마음.

그런데 이상했다.

그렇게 생생한데도 제 감정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채원은 언제 흘렀는지도 모를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제가…….”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구예요?”

젊은 궁녀의 얼굴이 무너졌다.

최 상궁 역시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정녕……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채원은 대답 대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최 상궁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윤서아 마마십니다.”

윤서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 나라의 세자빈이십니다.”

세자빈.

조금 전부터 자신을 그렇게 부르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윤정명 대감의 따님이십니다.”

최 상궁이 잠시 말을 멈췄다.

“윤정명 대감과 두 아드님 께서는 역모죄로 참형을 당하셨습니다.”

기억 속에서 들었던 말과 같았다.

채원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윤서아라는 이름의 세자빈.

역모죄로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를 잃었고, 그 소식을 들은 뒤 목을 맨 것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그 몸 안에서 눈을 뜬 강채원.

아무리 사고로 머리를 다쳤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이 촬영의 연장일 수는 없었다.

채원은 낯선 손가락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정말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난 거라면, 자신은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심정지였다.

그렇다면 강채원은 죽은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가슴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

전화한다고 했는데.

오늘 촬영이 끝나면 꼭 전화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채원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대신 조금 전 스쳐 지나간 기억 하나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닫힌 문.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도 윤서아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내 오지 않은 누군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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