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평생 사랑했던 세자에게 버림받았다. 이복여동생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뱃속 아이마저 잃은 끝에 차가운 별궁에서 죽음을 맞은 윤가연. 다시 눈을 뜬 날, 그녀는 세자와의 혼인을 거부하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의 숙부, 진왕 이무혁에게 청혼했다. “전하, 저를 아내로 맞아 주십시오.” 잔혹하기로 이름난 진왕은 뜻밖에도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자신을 그토록 경멸하던 세자가 미친 듯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가연아, 네가 사랑한 사내는 나였다!” 진왕은 가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차갑게 웃었다. “이제 네 숙모다. 감히 누구의 여인을 탐하는 것이냐?” 버린 여자를 되찾으려는 세자와 누구에게도 아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진왕. 두 남자의 집착이 마침내 황실 전체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View More가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길로 다시 갈 수는 없었다."혼서가 어디 있느냐?"몸종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벽장 쪽을 가리켰다."세자 저하께서 보내신 혼서 말씀이십니까? 마님께서 귀한 물건이라며 함에 넣어 두라고 하셨습니다."가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벽장 안에는 붉은 자개함이 놓여 있었다. 전생에는 그 함을 열어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렜고, 혼서에 적힌 이름을 손끝으로 따라 쓰기도 했다.그녀는 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붉은 비단 보자기를 걷자 반듯하게 접힌 혼서가 모습을 드러냈다.가연은 종이를 펼쳐 이태겸의 이름을 확인했다.일곱 해 동안 남편이라 불렀던 남자였다.아이가 죽어 가는 순간에도 다른 여인의 손을 잡고 돌아섰고, 별궁으로 내몰린 자신을 끝내 찾아오지 않았던 남자였다.그의 이름을 바라보는 동안 가연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졌다. 조금 전까지 아이를 떠올리며 떨리던 손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그녀는 혼서를 다시 접어 함에 넣었다."아씨, 무엇을 하시려고요?"몸종이 다가와 묻자 가연은 함을 품에 안고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봄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마당에서는 내일 간택에 입을 옷을 나르는 하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연은 잠시 문턱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전생의 자신도 저들처럼 기뻐했다. 세자의 아내가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 믿었고, 사랑받는 아내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믿음의 끝에는 피 묻은 문과 죽은 아이, 독차 한 잔이 기다리고 있었다.가연은 마당을 지나던 하인을 불러 세웠다."사랑채에 가서 아버지께 전해라. 내가 지금 찾아뵙겠다고."하인은 품에 안긴 붉은 함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예, 아씨. 그런데 그 함은……."가연은 하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함을 바로 안았다."세자 저하의 혼서다."그 말을 들은 몸종이 놀라 한 걸음 다가왔다."아씨, 설마 혼서를 들고 사랑채에 가시려는 겁니까? 마님께서 아시면……."가연은 대답 대신 마당으로 내려섰
태겸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가연아?"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가연은 눈을 뜨지 않았다.태겸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이상할 만큼 차가웠고, 손목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의원을 불러라."그가 뒤늦게 명령했지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했다.태겸은 목소리를 높였다."당장 의원을 부르라 하지 않았느냐!"내관이 황급히 문밖으로 뛰어나갔다.소화는 태겸의 팔을 붙잡고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태겸은 가연의 어깨를 붙잡아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고개는 힘없이 뒤로 젖혀졌고, 품에 안겼던 배냇저고리만이 그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그제야 태겸은 가연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다.아이의 옷을 끌어안은 채, 그저 아이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태겸은 가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가연아, 눈을 떠라."그러나 윤가연은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아씨, 일어나셔야 합니다. 내일이 간택일인데 아직도 주무시면 어찌합니까?"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가연은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에 몸을 일으켰다. 목구멍에 남아 있던 쓴맛이 너무도 생생해 손부터 목으로 가져갔지만, 손가락에 닿는 피부는 따뜻했고 어디에도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낯익은 비단 병풍과 자개 화장대, 창가에 놓인 향로가 눈에 들어왔다. 향로에서는 매화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창호지 너머로는 따뜻한 봄볕이 비치고 있었다.별궁이 아니었다.가연이 고개를 돌리자 어린 몸종 하나가 물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아씨, 악몽을 꾸셨습니까? 얼굴이 어찌나 창백하신지……."가연은 몸종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너……."몸종은 당황하면서도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아 주었다.가연은 그 손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눈앞의 아이는 분명 자신
가연은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 기쁘기보다 먼저 아이가 그리웠다.만약 다시 태어날 아이가 그 아이일 수 있다면, 가연은 어떤 고통이라도 견디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세자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차갑게 굳었다.닫힌 문과 피 묻은 손바닥, 멀어지던 남편의 발소리가 떠올랐다.가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길로 다시 갈 수는 없었다."혼서가 어디 있느냐?"몸종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벽장 쪽을 가리켰다."세자 저하께서 보내신 혼서 말씀이십니까? 마님께서 귀한 물건이라며 함에 넣어 두라고 하셨습니다."가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벽장 안에는 붉은 자개함이 놓여 있었다. 전생에는 그 함을 열어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렜고, 혼서에 적힌 이름을 손끝으로 따라 쓰기도 했다.그녀는 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붉은 비단 보자기를 걷자 반듯하게 접힌 혼서가 모습을 드러냈다.가연은 종이를 펼쳐 이태겸의 이름을 확인했다.일곱 해 동안 남편이라 불렀던 남자.아이가 죽어 가는 순간에도 다른 여인의 손을 잡고 돌아섰던 남자.별궁으로 내몰린 자신을 끝내 찾아오지 않았던 남자.그의 이름을 바라보는 동안 가연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졌다. 조금 전까지 아이를 떠올리며 떨리던 손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그녀는 혼서를 다시 접어 함에 넣었다."아씨, 무엇을 하시려고요?"몸종이 다가와 묻자 가연은 함을 품에 안고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봄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마당에서는 내일 간택에 입을 옷을 나르는 하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연은 잠시 문턱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전생의 자신도 저들처럼 기뻐했다. 세자의 아내가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 믿었고, 사랑받는 아내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믿음의 끝에는 피 묻은 문과 죽은 아이, 독차 한 잔이 기다리고 있었다.가연은 마당을 지나던 하인을 불러 세웠다."사랑채에 가서 아버지께 전해라. 내가 지금 찾아
가연은 흐려지는 눈을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내관의 어깨 너머로 붉은 치맛자락이 잠깐 드러났다. 금실로 꽃무늬를 수놓은 옷자락이었고, 기둥 뒤로 몸을 돌리는 여인의 머리에는 꽃잎 모양의 금비녀가 꽂혀 있었다.가연은 그 비녀를 본 순간 손을 멈췄다.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금비녀의 꽃잎 끝이 유난히 뾰족했고, 가운데에는 작은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희미한 등잔빛을 받은 보석이 반짝이는 동안, 가연은 그 문양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그러나 여인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은 채 돌아섰다.가연은 입을 열었다."잠깐……."그 목소리는 문밖까지 닿지 못했다.가슴을 움켜쥐는 통증에 몸이 옆으로 기울었고, 차가운 바닥이 뺨에 닿았다. 궁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연에게는 그 소리마저 점점 멀어졌다.그녀는 품에 안은 배냇저고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노란 비단 위에 수놓았던 작은 꽃.한 번도 입혀 보지 못한 옷.그 옷을 만들던 밤마다 가연은 아이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 줄지 고민했다. 아이가 자라면 세자궁의 매화나무 아래에서 함께 놀고, 비가 오는 날에는 창가에 앉아 옛이야기를 들려주리라 생각했다.그 모든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가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세자에게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어째서 자신을 아내로 맞았는지, 아이가 죽던 날 왜 문을 열어 주지 않았는지, 마지막까지 자신을 이렇게 버려야 했는지.그러나 이제 그에게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처음부터 그의 아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그와 혼인하던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누구의 꾸지람을 듣더라도 그 혼서를 받지 않을 것이다.가연은 마지막 힘을 다해 비단을 끌어안았다."아가……."눈꺼풀이 무거워졌다."어미가 미안하다."그 말을 끝으로 윤가연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별궁의 등잔은 밤새 타올랐다.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아씨, 일어나셔야 합니다. 이러다 정말 늦으시겠어요."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가연은 숨이 막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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